소설리스트

28화 (28/103)

8월의 포성 (1)

1914년 8월 1일.

런던.

1주일 전까지만 해도 런던 정계를 불태우던 떡밥은 대륙의 전쟁 위기가 아니라 아일랜드 자치권 허용에 관한 갑론을박이었다.

하지만 사라예보 암살 사건에 엮인 국가들을 외교적으로 중재하려던 영국의 모든 노력이 끝끝내 무로 돌아갔고, 외교관들과 총리는 슬슬 대륙 전체가 불타오르리라는 현실에 아연해지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영국의 동맹은 어디까지나 일본제국 하나뿐.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영국과 러시아는 ‘동맹’이 아니라 ‘협상’관계였다. 

“작작들 좀 합시다. 이건 기만이에요. 마지막 순간까지 대륙의 전쟁에 끼어들까 말까 고민할 권리를 가질 수 있게 설계한 기만이란 말입니다.”

“처칠 장관.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프랑스는 우릴 동맹이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이제 와서 빼지 마십쇼. 당장! 지금 즉시 밖으로 뛰쳐나가 총동원령을 선포하고 독일에 맞설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게 우리의 책무입니다!!”

“삼국협상은 애초에 군사동맹이 아니었어요! 대륙의 전란에 우리가 피를 흘릴 이유가 없다니까!”

“말장난이잖아!!”

보어전쟁의 영웅, 해군 장관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은 위풍당당하게 외쳤다.

전날인 7월 31일.

아직 무수한 정치인들이 고함을 빽빽 질러대고 있었지만 참전을 확신한 처칠의 ‘비범한 결단’은 총리 재가를 받았다.

바로 영국 조선소에서 다 만들어져 인도만을 앞두고 있는 오스만 제국의 전함 두 척을 갈취하는 것.

[아무튼 우리가 급하니 압수하고 대금은 몇십 년 할부로 매주 지급하겠음.]이라는 이 일방적 통보에, 전함 인수받으러 영국까지 온 오스만 해군 장병들은 길길이 날뛰며 강제로라도 배에 오르려 했지만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영국군에 두들겨 맞고 피눈물을 흘렸다. 

오스만 전 국민이 피 같은 방위성금을 모아 사들인 전함은 이제 와 이라는 해적선이 되었다. 영국인을 믿는 게 바보라는 무수한 예시 중 또 하나가 새롭게 갱신된 것이다.

물론 이렇게 즉시 참전, 즉시 동원을 외치는 처칠과 같은 초강경파는 의회 내에 거의 없다시피 했다.

오히려 영국 정계의 주류 의견은 정반대.

“총리께선 지금 당장 세계만방에 영국의 불개입을 선언해야 합니다! 이러다 우리도 저 불길에 휘말려요!”

“꺼지시오. 만약 저 대화재를 손 놓고 구경만 하자고 의회 의견이 모인다면 그 즉시 나는 사임하겠소.”

총리는 단호하게 이들의 의견을 뿌리쳤고, 다시 한번 독일과 러시아, 프랑스에 부지런히 접촉하며 전쟁을 막기 위해 몸부림쳤다.

처칠은 회의실을 빠져나오고 청사로 향하며 연신 혀를 찼다.

“저 훈족 놈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놈들의 목표는 세계 정복이라고. 다들 머리에 나사가 빠진 건가?”

그는 젊은 사람답게 누구보다 진보한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누구보다 강경하며 무력을 통한 ‘해결’을 선호했다.

“독일인들, 특히 독일 권력자들은 지배와 정복 욕구에 찌들어 있지. 그토록 해군을 강화하고, 심지어 비행선과 항공기를 대량으로 보유하는 놈들이 영국을 침략할 생각이 없다고? 다들 미쳐버렸지. 눈이 어두워졌어.”

그의 한탄은 끝없이 계속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감투가 벼슬이었기에, 해군 장성들과 해군부 공무원들은 장관의 끝없는 장광설을 인내하며 들어야만 했다.

“설령 머저리들이 불의한 평화를 꿈꾸더라도, 우리만큼은 전쟁을 준비해야 합니다! 모두들 바짝 긴장하십시오! 우린 곧 대륙으로 갈 테니!”

문득 처칠은 창문을 통해 살풋 보이는 하늘이 유난히 신경 쓰였다.

이제 오대양의 지배자가 대영제국인 것만으로는 브리튼 섬의 안보가 완벽히 지켜진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함선에서 출격 가능한 군용 항공기’의 확보에 열을 올리고 비행선 전력을 확충하던 그였지만, 상대는 항공기의 종주국.

과연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을까? 조금 더 혁신적인 방법은 없을까?

이런저런 명령과 준비를 지시하던 그는, 한참 떠들다 말고 잠깐 멈칫하더니 새로운 지시를 하달했다.

“우리가 보유한 비행선들로, 독일인들의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트릴 순 없는지 한번 고민해 봅시다.”

“알겠습니다.”

처칠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제독들은 슬그머니 삼삼오오 무리끼리 똘똘 뭉쳐 제각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번 오스만 전함 인수 말이오.”

“예.”

“그런 짓을 했으니 오스만이 적국의 편에 붙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데.”

“그래봐야 <유럽의 환자>잖습니까. 그깟 이빨 빠진 호랑이 따윌 두려워하면 어찌 왕립 해군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지중해 제해권이 위협받으면 곤란한데. 오스만 군대는 병신이지만 국토의 입지는 기가 막히거든.”

문득 그들은 깨달았다.

바로 저 처칠의 주도하에, 영국 해군은 석탄 보일러 대신 석유로의 전환에 박차를 가했다는 것을.

“······별로 수지맞는 장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석유는 당연히 수에즈를 건너 지중해를 통해 브리튼으로 온다. 

잔뜩 독기 품은 오스만이 기다릴 통로로.

처칠의 적은 처칠.

그의 찬란한 전설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8월 1일 저녁.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그리고 그 순간.

“<슐리펜 계획>을 시작한다! 동원이 완료되는 대로 전 병력을 기동시켜!!”

참모총장 몰트케의 지시하에 전쟁기계 독일이 프로그래밍된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14년 전쟁의 특징은 바로 철도.

분, 초 단위로 정밀하게 작성된 철도 시간표를 따라 정해진 목적지까지 수십만, 수백만 대군을 수송해 목표 지점까지 도달해야만 한다.

장군들은 모두 이 시간표의 노예였고, 시간표가 찢어지는 순간 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철도 시간표는 몇 년 동안 최고의 참모들이 골방에서 숫자만 만져대서 만든 군사학의 정수였고, 임시방편으로 대충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국은 수백만 대군을 동원해 우리 집 안방으로 던질 수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못 한다면? 고스란히 나라가 망하는 셈 아닌가?

이 논리에 따라 러시아가 총동원을 선언한 순간 독일은 물러설 수 없었다.

독일이 총동원을 선언한 순간 프랑스는 물러설 수 없었다.

“참모총장! 영국이 전쟁을 멈출 방법이 있다고 했네. 아니, 더 나은 방안이 있다고 했네. 지금 당장 벨기에로 가려는 군대를 멈춰 세우시오!”

“폐하.”

몰트케 참모총장은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말에, 혼이 다 빠져나가 호두까기 인형이 된 것처럼 끼릭끼릭 대답했다.

“이미 시작됐습니다.” 

“···전쟁이라니. 니키도, 나도, 그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소. 이건 이상해. 이건 이상하다고.”

“폐하. 멈출 수 없습니다. 멈추면 프랑스가 우릴 모두 죽일 겁니다.”

8월 2일.

독일은 오스만 제국과 비밀리에 동맹을 체결했다.

한편 “프랑스가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를 지나 독일을 공격하리란 첩보가 입수되었다.”라는 개소리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 두 나라에 통지했다.

“우리가 너희 지켜주려고 들어갈 거니까 막지 마. 막으면 너희도 우리 적이다.”라는 기적의 논리에 두 나라는 세 번째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유럽의 소국 룩셈부르크는 그날 즉시 독일군의 손에 점령당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도시 리옹(Lyon)에선 세계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꿀잼의 민족 프랑스인들은 여기 있던 독일관과 오스트리아관을 강제 폐쇄시켰지만 박람회는 계속 진행했다.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8월 4일.

독일군이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

영국은 최종적으로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할 것’을 요구했고, 독일은 거부했다.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세계는 불타올랐다.

***

세계제국이 되고 싶었던 독일의 욕망.

욕망이라고 하기도 조금 그렇다. 위대한 나라가 되고 싶은 갈망이 없는 나라가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나 지금처럼 민족주의의 열기가 미칠 듯이 뿜어져 나오는 이 시대.

가장 새빨간 극좌에 속한 이들조차 민족주의라는 시대의 명령에 거스르기란 참으로 힘들겠지.

스위스 취리히에 갔던 에베르트는 돌아온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당원 동지 여러분! 우리의 조국이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카이저와 융커들의 정치는 분명 시대착오적이며 전제적이고, 노동자와 농민의 권리는 아직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패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전제적이고 야만스러운! 러시아 짜르의 노예로 전락할 것입니다!!”

“에베르트!! 에베르트!!”

“우리 사민당은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이는 모든 전쟁을 반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압제자에 항거하려는 투쟁과 남을 짓밟기 위한 전쟁은 결코 같은 선상에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

8월 6일.

독일 제국 의원들은 의사당에 모여 엄숙하게 결의를 채택했다.

정부에 반대하지 않는다.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다.

전쟁 채권 발행에 동의한다.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사민당 내 강경파들은 이를 야합으로 규정하고 극렬하게 반발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여기서 전쟁 반대 같은 소리 했다간 진짜 무장한 군대가 당사로 쳐들어와서 전부 쳐죽일 것 같단 공포.

애국 열풍에 눈이 돌아간 국민들의 눈에 매국노로 비쳐 보여 ‘고놈들 참 잘 죽었다’ 하고 손가락질당할 것만 같은 불안감.

그리고 정부 시책에 협조하고 전쟁 승리에 공헌함으로써 노동자의 힘을 과시해 더 많은 권리를 보장받겠다는 평화적인 정치 전략까지.

- ······그래도 눈치는 있는 빨갱이들이군.

웬일로 AI 비서가 저런담.

황궁으로 가는 길.

차량 유리창 속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 어째 나보다 더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눈치 없는’ 빨갱이들은 사민당을 뛰쳐나와 이른바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하고 자기들만의 활동을 개시했다.

- 패배가 예정된 전쟁을 위해 머리를 굴리는 일은 그다지 익숙하지 않아. 보통은 북괴를 상대로 한 계획을 상정했으니. 그래서 중국과의 전쟁 위기가 시작되었을 때 다들 반쯤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군.

차가 멈췄다.

나는 곧장 채비를 마치고,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움직였다.

한없이 가라앉은 분위기.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웃음꽃을 피우고 있지 않다.

‘유럽인들은 웃으면서 전쟁터로 향했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건 모조리 거짓이었다. 그 누구도 죽음이 기다리는 곳으로 향하는데 쉽사리 미소를 짓진 않았다.

오직 전쟁을 찬미하는 머저리들만이 웃었을 뿐.

군복을 입고 열차에 올라타는 순간, 가장 골이 텅텅 빈 놈들조차 싸늘하게 얼굴이 굳어버리는 게 정상 아니겠나.

나 또한 황제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 근육에서 힘을 뺄 수 없었다.

“짐의 충신 로젠바움이여. 제국은 그대의 노고를 필요로 한다.”

“제 모든 것은 폐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결코 이룩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폐하께 바치겠습니다.”

“그대는 항상 사탕발림 가득한 말로 나를 미소 짓게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생각해 보니 마누라와 자식들은 못 바치겠습니다.”

“흐하하하하하!!!”

엄숙한 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카이저는 그대로 폭소했다. 시종들이 날 째려보았지만 나는 당당했다.

“폐하를 알현하러 궁에 오기 전, 이미 전시에 준해 공장을 돌리기로 노조와 합의를 끝냈습니다.”

“그놈들이 아직도 그따위로 군다고? 버르장머리없는 놈들.”

“그들 스스로 일을 더 하기로 맹세했으니 당분간은 오히려 사기가 충천할 겁니다. 저희 회사의 직원들 중 일부가 징병된 탓에, 신규 직원을 채용해야 합니다. 여성을 뽑아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건 그대가 알아서 할 일이지. 개입하지 않겠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군부와 협의하여 최고의 항공기를 납품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크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 신 아르민 로젠바움과 로젠바움사 소속의 항공기 조종사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자원입대를 청하고자 합니다. 부디 저희가 이 나라 최초의 전투비행대원이 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전쟁터에 나가겠다고? 그대가 직접?”

“그렇습니다. 폐하. 육군도 자력으로 연구를 하였겠지만, 이 세상에서 하늘을 가장 잘 아는 이는 오직 저뿐입니다. 저희는 이미 군용으로 쓸 수 있는 항공기도 있으며, 적진의 하늘 위로 날아갈 용기 또한 있습니다.”

“참으로 장하도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날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손을 꽉 붙들었다.

“그대들의 용기는 결코 허투루 할 수 없다! 모든 신민들이 그대들의 결단을 알아야만 할진저!”

“제 의무를 다하고자 할 뿐입니다, 폐하.”

간단한 논리였다.

첫 1년.

독일이 가장 유리했던 시기.

그때만 전쟁터에서 활약하고 귀환해 후방 업무에만 전념한다면, 내 명성과 업적은 불후의 무언가가 되고 만다. 패배와 엮이지 않는 셈이다.

“저 옛날 튜튼 기사단이 슬라브를 징벌할 때와 똑같구나. 그야말로 용맹히 떨쳐 일어난 하늘의 기사들이로다. 시종, 공보 담당 아무나 불러오너라!”

“예, 폐하!”

“로젠바움과 그 직원들이라고 하면 너무 밋밋하지. 사악한 개구리들과 루스인들을 징벌하는 기사들이라면 또 모를까.”

그. 폐하. 그런 낯뜨거운 말을 당당히 하시면 이번엔 제가 좀 수치스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저는 우리의 자원입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누구 맘대로? 어째서 고작 예비역 소위 따위가 군무에 끼어든단 말이야!!”

“폐하의 명이라고 하십니다.”

“말세군.”

그러니까, 몰트케가 백날 지랄을 떨어도 이미 늦었다. 

병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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