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기사 (3)
“명성 자자한 로젠바움 사장을 뵙게 되니 반갑소.”
“저 또한 총장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앉으시오. 할 말이 많소.”
해임된 몰트케 다음으로 새롭게 참모총장 자리에 취임한 사람은 전쟁부 장관이었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Erich von Falkenhayn).
개인적으로 이 인선은 조금 놀라웠는데.
“뭐 하시오? 얼른 안 앉고.”
“알겠습니다.”
팔켄하인은 싸가지가 밥 말아 먹은 것으로 명성 자자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군사에 딱히 아는 바는 없지만, 아무튼 유능한 것 같긴 하다. 저렇게 싸가지가 없는데 전쟁부 장관에 이어서 육군참모총장 취임? 대단한 능력자이신갑지.
“시간이 없으니 명령만 빠르게 하달하겠소.”
“아, 예.”
“말이 짧군. 귀하는 엄연히 육군 소위 신분에 불과하다는 걸 상기시켜 드리겠소.”
뭐지, 이 새끼? 왜 자꾸 이딴 거로 나를 긁지?
“폐하께서 그대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고자 하시오. 2급 철십자와 1급 철십자를 동시에 수여한다는 방침은 다소 과분한 것 같지만 폐하의 의지가 굳건하시니 그렇게 알고 있으시고. 내 전쟁 계획을 위해서는 항공력을 강화해야 하니 부지런히 협조하시오.”
- 어. 음. 그래도 나쁜 악의가 있어서 저러는 건 아닌 거 같은데.
죽고 싶습니까, 망령?
- 군바리 중에 저런 사람 제법 있어. 평생 군대라는 울타리에서만 살다 보니 자신이 상급자라면 뭘 해도 다 되는 줄 아는 부류인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실드치기 위해 피땀 어린 노력을 하는 범석 군.
나는 잠깐 정신을 집중해 범석이가 입은 군복에 늠름히 자리하던 쓰리 스타를 삭제하고 작대기 하나로 바꿔준 뒤 눈앞에 닥친 내 일에나 전념하기로 했다.
- 이 악마 같은 놈! 차라리 내 머리카락을 뺏어가고 계급장은 돌려놔라! 이등병이 뭐냔 말이다, 이 사탄도 울고 갈 개자식아!
“어떻게 협조해드리면 되겠습니까.”
“내가 봤을 때 지금 중요한 건 비행선이 아니오. 당신이 제안한 각종 무기 개발 등을 봤을 때, 비행선은 소이탄이나 예광탄의 개발이 완료되는 시점에서 더 이상 운용이 불가능해질 테지. 이제 비행선보다는 항공기에 집중해야 하니 더 많은 공중 전투용 항공기를 생산하시오.”
“알겠습니다.”
“내 전임자는 항공 정찰의 필요성과 유용성을 다소 경시했고, 그것은 파리 함락 실패라는 결과로 이어졌소. 여전히 최전방에서 전투를 희망한다면, 지금 전투가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배치해 프랑스군 항공기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다면 계급장 떼고 후방으로 물러나 무기 생산에 전념하시오.”
말투에 대해선 대충 적응이 끝났다.
그리고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전장으로 가겠습니다.”
“그렇다면 새로 배치될 파일럿들도 당신에게 맡기겠소. 대신 반드시 전선에서의 제공권을 장악해야 하오.”
“말씀하신 대로 저는 고작 소위에 불과합니다만?”
“계급은 내가 해결해주겠소. 최소한 영관까지는 확보해주지.”
“제게 책임을 지게 할 작정이시라면 그것만으론 모자랍니다. 더 많은 걸 넘겨주십쇼.”
“···뒷감당에 자신이 있으시다면야.”
“반대로 묻겠습니다. 지금 처지가 조금 위태로우신데, 저 같은 전쟁영웅과 손잡지 않으면 조금 많이 힘들지 않겠습니까?”
결국 참다 못한 나는 그대로 박아버렸다. 심기가 불편해졌는지 그의 수염이 꿈틀댔다.
- 너무 그렇게 굽힐 필요 없어. 저놈, 어차피 프랑스랑 싸우다가 전쟁 말아먹고 짤리거든. 그다음엔 힌덴부르크가 총장이 되면서 카이저도 몰락해버리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내 계급장 좀 돌려주··· 면··· 안 될까?
왜 쓸데없이 들이받냐고 한소리 할 줄 알았던 AI 비서 역시 오히려 괜찮다고 고 싸인을 준다. 이런 경우가 요즘 들어서 드물었는데. 그러면 당연히 끝까지 가야지.
“제가 궁에 조금 친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폐하의 주변에, 동부 전선의 영웅인 힌덴부르크 장군께 모든 전권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틀린 말이오. 대체 어느 세월에 러시아를 무너뜨린단 말이오? 도대체 몇 명을 얼마나 투입하면 모스크바에 다다를 수 있냔 말이오. 나폴레옹조차 모스크바를 점령했음에도 러시아를 무너뜨리진 못했소.”
아. 틀린 말이 그러니까, 힌덴부르크와 경쟁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동부 전선에서 전쟁을 해야 한단 말이 틀렸단 뜻이구나.
이 사람 대가리엔 정말 전쟁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벽을 보고 떠드는 것 같다.
“그러면 총장께선 서부 전선에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렇소. 하루속히 프랑스만 끝내면 이 전쟁은 끝이오. 그런다고 이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지금 전쟁의 승리를 부정하십니까?”
“귀하는 내게 답변을 채근할 권한이 없소.”
조금 올랐던 호감도가 다시 폭락했다. 진짜 김나지움 다닐 적에 ‘말 좆같이 하는 법’ 강의라도 수강했나.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새로이 내가 맡게 될 독립비행대의 현황에 대한 서류를 건네받았다.
- 이겼다! 이건 못 먹어도 고다!
“그 정도입니까 이게?”
- ‘붉은 남작’ 리히트호펜 집안 남자들에 ‘뵐케의 금언’을 남긴 뵐케, 괴링은 더 잘 알 테고. 하나같이 훗날 이름깨나 떨칠 인간들이야. 지금은 비행기 조종석 한 번 앉아보지 않은 햇병아리들이겠지만.
“그 말은 제가 다 사람으로 만들어주면 된단 뜻이군요.”
- 1년만 뻑적지근하게 일하고 전설이 돼서 베를린으로 돌아가자고.
“근데 돌아갈 순 있습니까? 그렇게 잘 싸우면 당연히 천년만년 전쟁터에 놔둘 것 같은데.”
- 흐흐. 그러니까 팔켄하인 편을 들어줘야지. 팔켄하인이 몰락하고 힌덴부르크가 정권을 장악할 때 같이 해고당하도록 말이야.
오랜만에 이 인간이 마굴 같은 대한민국 육군에서 살아남은 인간이었다는 깨달음이 전해져 왔다. 그동안 너무 약한 모습만 보여줘서 그냥 평범한 빨갱이 아닌가 싶었는데.
- 너희들이 미친 거다. 이 비정상아.
***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트리아 황제를 암살하도록 배후에서 조종하고, 러시아가 독일을 정복하도록 막대한 자금을 지원해줬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지켜야만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
[영국인들은 우리가 살인마, 강간마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저들은 수십 년 전부터 독일을 음해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날조라도 거침없이 자행해 왔습니다.]
[신민 여러분! 승리를 위해 조금만 더!]
1914년 가을.
전시의 험악한 분위기를 타고 국뽕 마취제가 투입되었다.
연극이나 공연, 영화 등을 만들던 이들은 모조리 나랏일을 맡아 선전물 만드는 일에 투입되었다.
[‘장미의 기사’, 그의 고결한 기사도, 후안무치한 영국인들마저 감동케 하다!]
[“여기가 바로 로젠바움의 나라입니까” 포로가 된 영국인들이 베를린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말!]
[이제 영국인들은 더 이상 독일 본토로 비행선을 타고 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아무도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간인 지역을 폭격하기 위해 온 악마들조차 관대하게 포용한 로젠바움의 미덕이란?!]
그리고 이들은 미쳐버렸는지 어느 순간부터 이상한 걸 만들기 시작했다. 팔켄하인. 진심으로 이게 날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냐? 아니면 그냥 날 꼽주려고 이러는 거냐?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번 약은 좀 셌는가 사람들이 하나같이 훼까닥 돌아버리기 시작했다.
“나는 폐하로부터 인정받은 창공의 기사 로젠바움이다! 내 칼을 맛봐라!”
“앗, 나는 그럼 힌덴부르크 할래.”
“시끄러, 너는 영국인 해.”
“영국인이다! 영국인이 나타났다!”
“해치우자 벨기에! 내버려 두면 우리 손목을 잘라 갈 거야!”
딱 봐도 이제 걸음마나 할 수 있게 된 꼬꼬마 어린이들이 장난감 나무칼을 들고 저런 수치스러운 대사를 치고 있다.
나는 결코 저딴 프로파간다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적이 없는데도 어느새 ‘국민영웅’의 반열에 올라버린 것이다.
육군의 힌덴부르크 - 루덴도르프.
해군의 티르피츠.
그리고 하늘의 로젠바움.
“저길 봐! 로젠바움이야!”
“싸인해주세요!!”
“또 런던을 잿더미로 만들어주세요!!”
“저도 영국인을 죽여버리고 싶어요, 데려가 주세요!!”
- 미친 시대구만.
너무하네. 적국의 침략을 당했는데 화가 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닐까?
- 침략이라니. 무슨 웃기지도 않는 소릴. 굳이 따지자면 전쟁을 일으킨 건 독일이잖나. 지금 전쟁터가 돼서 불타고 있는 게 독일인가? 아니지. 벨기에와 프랑스야.
조스비는 아무래도 고장이 난 것 같다.
결과론적으로 해석하면 확실히 독일 본토엔 아무 일이 없고, 지금 참호가 도배되고 있는 땅은 분명 프랑스 땅이 맞다.
하지만 수십 년에 걸쳐서 독일이 크는 꼬락서니를 볼 수 없어 끝없이 견제해오던 건 어느 나라인가? 영국과 프랑스 아닌가.
식민지에서 신나게 인간사냥이나 하고, 원주민의 골수까지 쪽쪽 짜먹으며 착취한 부로 국력을 끌어올리던 놈들이 이제 좀 급에 맞는 상대에게 죽빵 한 대 처맞으니까 바로 징징대면서 가해자가 어쩌고 하는 것 좀 봐라.
어차피 민족주의에 미쳐서 상대 민족을 다 죽여버리자고 날뛰는 건 비단 독일뿐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가 다 마찬가지다. 아마 나랑 똑같은 논리로 적국의 사람들 또한 자국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겠지.
“사장님! 부탁드립니다! 꼭 우리 아들을 전쟁터에서 몸 성히 돌아오게 해주세요!”
“크리스마스엔 전쟁이 끝나겠지요?”
“한 번만 더 런던을 불태우면 영국인들이 항복할 테고, 그러면 다들 돌아오지 않을까요? 사장님, 그쵸?”
난 유감스럽게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 비행선단 요격 작전에서도 대체 몇 명이 목숨을 잃었던가. 내 바로 뒷자리에 있던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한 내가 무슨 염치로 입을 열겠나.
- 전쟁터에서 그런 고민을 했다간 오래 살기 힘들지. 그냥 잊으라고. 재수가 없던 것뿐이야.
그렇지. 그냥 그거지.
어차피 내가 역사를 바꾸지 못하면 미친 칫솔수염 정신병자맨이 나타나서 전부 죽을 사람들 아닌가.
설령 이 전쟁이 얼마나 더 지독하게 바뀐다 한들.
최악의 미래만 막을 수 있다면 그 대가는 싼 편에 속했다.
***
같은 시각.
윈스턴 처칠은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독일 놈들이 도대체 어떤 야비한 짓을 해서 우리 비행선단이 전멸을 했냔 말이야!!!”
“그, 그것이 저희도 잘.”
“첩자인가? 내부에 첩자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이야!”
비행선단 전멸.
아무리 봐도 독일인들은 비행선을 격침시킬 만한 비밀무기가 있는 게 틀림없다.
처칠은 연신 ‘간첩의 음모’를 떠들어대면서도 머릿속에선 비행선의 가치를 하향 조정했다.
독일이 만들 수 있다면 영국이 만들지 못할 리가 없다.
그걸 만들어서 도입해야만 브리튼섬의 안전을 굳힐 수 있는데.
“로젠바움.”
“네?”
“아르민 로젠바움. 이번에도 독일 놈들은 그를 전쟁영웅으로 포장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장미의 기사>라느니 <붉은 혜성>이라느니 하늘에서 세 배 빠른 남자라느니-”
“엿이나 먹어. 침대에서도 세 배 빠르다고 삐라를 날려줘야겠군.”
세 배 빠르게 탈모가 온 남자가 투덜댔다.
만약 제리들이 떠드는 것이 진실이라면?
정말 로젠바움, 비행기의 발명가가 항공전에도 천재적이었다면?
“위험해. 위험하다고.”
“장관님. 혹시 무언가 지시하실 사항이라도-”
“당장 국내의 항공기 전문가들을 소집하게. 어쩌면 우리 생각보다 독일은 훨씬 더 항공기와 항공전에 대해 진지하게 임하고 있을지도 몰라.”
“그야, 당연히 진지하지 않겠습니까. 전쟁인데요.”
“그런 수준이 아니라!! 이 멍청한 자식들, 두 번째 체펠린 폭격이 오기 전에 당장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처칠은 지극히 상식인이었다.
따라서 상식인 처칠은 너무나도 당연히 ‘아르민 로젠바움은 베를린의 사무실에서 펜대를 굴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설마 최전방에서 붉은 비행기를 타고 날아다니진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선전영화? 그건 당연히 거짓말이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항공력을 강화하고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도입해야만 더욱 신형 기체를 끌고 나타날 적에 맞설 수 있다는 그의 판단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처칠은 로젠바움의 덜미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다음 안건은 또 뭐지?”
“오스만 제국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조만간 놈들이 독일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할 듯합니다.”
“그럼 그렇지. 그놈들이 참전한다면 반드시 콘스탄티노플을 불바다로 만들어버려야 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해야 한다고.”
매우 안타깝게도 그에겐 ‘갈리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