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03)

20세기의 악령

아침.

아이들은 내 훈장 두 개를 붙잡고 절세의 신공을 득한 무림인처럼 눈을 빛내더니, 밥은 안 먹고 내 훈장 하나씩을 챙겨 “내가 독일 최고의 파일럿 로젠바움이다!” “죽어라, 조프르!” 하면서 저들끼리 칼싸움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얘들아, 왜 파일럿이 칼싸움을 하는 거니?

하지만 나 역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상태인 건 애들과 매한가지였고, 샤워를 한 번 했는데도 여전히 등엔 식은땀이 축축 배어나오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밖에서 축구 한판 뻑적지근하게 하고 집에 들어왔는데 부모님이 대낮부터 2세 제작 프로젝트에 열중하는 모습을 본 느낌인가. 갑자기 후회된다. 내가 그때 조금만 늦게 들어왔다면 동생이 생겼을지도 모르는데. 내 아들과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동생이라.

이봐, 조스비. 뭐라고 말 좀 해보시지. 우리 사이에 조금 상황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데.

- 뭐가 말이냐.

어젯밤에 본 거.

- 본 그대로. 더 말할 게 있나? 나는 결국 결심했고, 제안을 받아들였고, 군사 반란을 기도하다 부관에게 저지당했네. 그게 전부야.

에르나 말로는 커피콩 구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고 했지만, 여전히 우리 집 지하실엔 커피 몇 포대가 쌓여 있다. 그런데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커피는 어째 옛날보다 향이 덜한 것 같았다.

- 애초에 그게 뭐라고 그리 소스라치게 놀라는지 모르겠군. 심지어 그건 이 시대엔 아직 벌어진 일도 아닌데.

음.

아니. 그러니까.

다시 봤다, 이거지. 음.

- 뭐?

생각해 보라고. 그냥 갑자기 권력욕에 훼까닥해서 융커들마냥 쿠데타나 일으킨 찐따 빨갱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가족의 원한을 갚기 위해 거병을 결의한 상남자 아닌가.

이러면 그동안 너무 내가 막대한 게 미안해지는데. 그렇지. 역시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명예에 흠집내는 새끼들은 결투를 해서라도 조지고, 가족의 원수라면 피의 복수를 해줘야 하는 법이다. 그치. 그게 남자지.

- 빌어먹을 미개르만 새끼. 너는 어떻게 되먹은 게 네 애비보다 더 19세기 마인드냐? 아니지. 이건 19세기도 아니고 9세기잖아! 미래 지식을 받았으면 좀 법치주의, 민주주의 이런 걸 대가리에 탑재할 생각은 안 들디?

아침부터 잔뜩 불편한 심기가 역력하던 조스비가 떽떽대기 시작했다. 안 들려. 안 들린다고. 얘, 에르나가 해준 감자가 참 맛있단다.

애초에 우리 아빠가 어쩌고 떠들어봤자 그 양반은 강약약강의 찌질한 모습만 보여줘서 딱히 공감할 수 없다. 아들 대가리가 너무 굵어지다 못해 가부장의 자리마저 뺏기는데 거기서 말 한마디 못 하고 깨갱하니까 좀··· 안구에 습기가 차잖아. 마지막까지 실망만 쌓인달까.

사람이 말이야, 좀 풍채도 있고 남자다움이 있어야지. 우리 체펠린 백작님처럼.

- 한국말에 늦바람이 무섭단 말이 있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내려놓으니까 그 뒤론 아주 쉽더라고.

이해하기 어렵다.

국가가 국민을 지키긴커녕 가진 자들에게만 부역하며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면, 한 대 때려줘서라도 고쳐야 하지 않겠나. 그 컴퓨터라는 최첨단 기기도 때리면 말을 듣는다던데, 국가는 발명된 지 몇천 년 된 올드타입이다. 당연히 때리면 고쳐지게 되어 있다.

불쌍한 조스비가 너무 세뇌당해서 그렇지, 국가는 딱히 신성불가침한 무언가가 아니다. 당장 이 독일 제국도 5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옳은 일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 왜 저리 죄책감을 가지고 있담.

- 됐다. 말을 말자. 네가 역사를 바꾼다면 내 고민도 전부 사라지겠지. 그거 하나만 믿고 있을 뿐이다.

산신령인가 뭔가 그거를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칫솔수염 대신 세계의 역사를 갈아치운다면 당연히 조범석이의 미래도 바뀌겠지.

요컨대, 여전히 우리에겐 공동의 목표가 있는 셈이다. 이게 바로 진정한 의미의 운명공동체.

나는 잠시 지하실에 들러 남은 식량과 물자를 점검하고, 쥐덫을 좀 더 깔아 놓았다.

운명공동체고 나발이고, 당장 감자 한 포대에 곰팡이 안 폈나를 살펴봐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범석이는 좋겠다. 밥 걱정 안 해도 되고.

***

로젠바움사는 점점 더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었다.

또 한 뭉텅이의 내 충직한 직원들이 열차 타고 전쟁터로 떠나갔고, 그 자리를 메꾼 건 독일어도 모르는 전쟁포로들.

- 포로를 노역에 동원하는 건 제네바 협약 위반이야. 협약을 떠나서, 쟤들이 어디 독일군 전쟁병기를 열심히 만들겠어?

공장과 수용소를 왔다 갔다 하기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공장 부지 일부에 포로 수용소가 지어졌다.

포로들은 항상 도망치고 싶어 하니 곳곳에 철조망과 담장을 세워야만 했다.

포로들이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 모르니 총 든 군바리들이 이제 대놓고 작업 현장에까지 쫙 깔렸다. 나는 뇌물을 좀 써서 원래 우리 회사 직원이었던 이들 중 일부를 경비병 자리에 꽂아넣었지만, 모든 병사들을 다 직원 출신으로 박아 넣을 순 없었다.

그 와중에 포로 대신 차라리 독일 여자들을 채용하겠단 내 제안은 단칼에 거부당했다.

“저희 회사는 이미 일부 여성들을 채용했습니다만.”

“그거야 그냥 쓰레기 청소 같은 잡무거나 매점 직원 같은 일이잖소. 실제 생산 업무가 아니라.”

“적어도 포로보단 낫지요! 여자들은 사보타주는 안 할 테니까요!”

“이보시오, 로젠바움 사장. 아녀자들의 일은 집안을 지키는 거지 무언가를 만드는 게 아니에요. 젊어서 그러시나 본데, 우리로서는 계집이 만든 전쟁병기를 인수했다가 괜히 트러블 생기기 싫어요.”

놀랍게도 이놈들의 대가리는 꽉 막혀 있었다.

조금 웃기다 못해 서글퍼지는 이야기지만, 여자들을 공장에 써먹자고 주장하는 유일한 군부 인사는 내가 대놓고 쌍뻐큐를 치켜 들었던 루덴도르프였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게 이런 건가.

한때 경애하는 사장 로젠바움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모두 활기차게 일하던 내 사랑스러운 일터, 내가 구축한 작은 유토피아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지금은 세계 각국의 전쟁 포로들과 경비들이 드글대는 짬통이 되어 있었고, 예상했던 대로 생산 능력과 품질 모두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시발놈들.

결국 나는 잔뜩 성이 난 채 다시 뛰어가고 말았다.

“반품.”

“예?”

“반품! 반품이라고!! 저 망할 포로 새끼들 당장 치워!”

“이보세요, 로젠바움 대령. 아무리 당신이 폐하의 총애를 받는다 할지라도-”

“너 이 새끼들! 지금 우리 회사의 항공기 생산력을 깎아먹으려는 영국 첩자지! 당장 참모총장 나오라고 해!! 당장!!”

한바탕 개지랄 끝에, 나는 포로들의 국적을 모조리 프랑스인으로 통일한다는 타협안을 받아냈다.

영국인, 러시아인, 세르비아인 등이 싹 사라지고 나서, 나는 수용소의 개구리 포로 놈들을 모아 둔 뒤 곧장 연설에 나섰다.

“반갑습니다. 아르민 로젠바움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로젠바움사 가족이 된 여러분들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야! 사생아! 너네 제리들은 유괴범도 가족으로 취급해주냐?!”

“죽어! 빨리 하늘에서 뒈지라고!”

“닥치지 못해!”

음. 개판이야. 나라도 그렇겠지.

나는 소란이 진정되길 기다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여러분들의 처지에 대해, 나는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서 진심으로 가슴 아파 하고 있습니다. 나는 프랑스군에 붙잡힌 우리나라 포로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길 원하며, 또한 여러분들에게 우리나라 포로들이 받길 원하는 만큼의 대우를 해드릴 예정입니다.”

“이 시발, 포로를 노동에 종사시키는 호로새끼가-”

“주 5일 40시간 근무. 노동에 따른 수당 지급. 초과 근무시 초과근로수당 추가 지급. 야간 근로시 야간근로수당 추가 지급. 지급받은 급여를 쓸 수 있는 매점 지원.”

포로들의 목소리가 잦아들더니, 적개심 어린 눈빛이 점점 생전 처음 외계인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50분 근로 후 10분 휴식 보장. 휴식 중 적절한 통제하에서 자유로운 여가 보장. 로젠바움사 사원증 발급. 프랑스어가 가능한 가톨릭 신부의 주일 미사 보장. 종전 후 로젠바움사 취직 시도시 경력 인정 및 우선 채용 약속. 원하는 인물에 한해 항공기 제작에 필요한 기술 및 노하우 전수. 보름에 한 번 꼴로 영화 상영. 로젠바움배 브릿지 게임 대회 개최. 프랑스 신문 반입 검토 약속-”

“······.”

“더 필요합니까? 아, 우수 근로자에 한해 주류를 제공하지요.”

“저기.”

침묵이 깔린 가운데, 한 사람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대체 우리에게 뭘 바라는 게요?”

“말했잖습니까. 비록 서로 원하는 바는 아니더라도, 여러분은 이제 내 가족이라고. 가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법입니다.”

나는 내친김에 조금 더 이들의 감성에 호소하기로 했다.

“미국의 로젠바움사는 여러분의 조국을 위해 항공기를 제작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로젠바움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은 훌륭하게 조국을 위한 의무를 다하였으며, 이제 그대들에게 남은 마지막 의무는 몸 성히 조국으로 돌아가 가족을 건사하고 조국을 재건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당신들의 적이 아닙니다.

나 또한 모두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어차피 전쟁 포로들이래봤자 원래 농부 아니면 노동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을 압도적 복지 혜택에 짓눌린 그들은 내가 제공한 퇴로에 따라 충실히 논리 회로를 그려나갔다.

‘쟤들도 협상군 무기 만들고 있으니 쌤쌤 아닌가?’

‘내가 독일의 봉급을 타내 적의 물자를 축내면 이게 바로 사보타주 아닐까?’

‘솔직히 나는 할 만큼 했잖아. 집에 돌아가서 애들 입에 빵 한 쪼가리라도 물리려면···.’

여전히 반항적인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을 위해선 범석이가 알고 있는 ‘중공식 세뇌 프로그램’을 베풀어줄 예정이다.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한번 보자고.

물론 내가 제공하는 이 어마어마한 복지는 당연히 이해타산 따져보고 돌리는 것이었다.

포로들에겐 진짜 마르크화 대신 오직 수용소와 공장 내에서만 쓸 수 있는 <로젠바움마르크>가 지급되었다. 수용소를 탈출했을 때 돈을 쓰지 못하게 한다는 그럴듯한 명목까지 있으니 완벽.

그리고 영국의 해상 봉쇄로 인한 물가 상승분을 반영해, 매점 물가가 아주 조금 비쌌다.

정말 아주 조금. 그러니까··· 초과근무를 가열차게 하면 포로 신분으로는 호사를 누리며 살아갈 만큼 아주 조금 비싼 물가.

“이봐요. 나 좀 이번에 야간조에 배치시켜줘요.”

“안 됩니다. 가득 찼어요.”

“제발 부탁이요. 담뱃값은 왜 또 오른 게요?”

“우리나라 사람도 없어서 못 피우는 게 담배라니까?”

생산성 업그레이드 완료.

“안녕하십니까, 로젠바움 사장님!”

“안녕하세요, 마르탱 씨. 이번에 프랑스가 조금 더 진격에 성공한 모양이더군요. 축하드립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예? 사장님, 독일인이 그런 말 하셔도-”

“뭐 어때요. 오늘도 힘내서 일들 합시다. 안전! 좋아!”

이제야 좀 내 유토피아가 돌아왔구만.

아주 보기 좋아.

***

내가 혁신적인 경영 관리 프로그램으로 빌어먹을 똥덩어리들을 수습할 때쯤.

협상군은 말 그대로 물량을 쏟아부으며 제공권을 탈환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제공권을 확보해야 포격 제원을 산출할 수 있다.

포격 제원을 따야 참호에 포탄을 때려박을 수 있다.

포탄이 제대로 때려박혀야 진격할 수 있다.

따라서, 제공권 탈환은 그야말로 전쟁의 사활을 건 필사적인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인즉슨.

우리 파일럿들 또한 미친 듯이 소모되기 시작한단 소리였고.

이제 슬슬 장사를 접을 때라는 직감이 오고 있었다.

나는 천신만고 끝에 다시 한번 카이저 빌헬름을 비밀리에 만났다.

“로젠바움이여, 내가 그대를 비밀리에 독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를 들였는지-”

“폐하.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불쑥 저지른 무례에 그는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지만, 무어라 더 말하진 않았다.

점점 힘의 균형이 바뀌고 있었다.

카이저를 향한 민심은 날로 쪼그라들고 있었고, 원래 병풍이었던 의회와 내각은 무척추동물처럼 흐물흐물해지고, 카이저가 임명한 총리는 무력해졌다.

카이저는 오직 자신이 임명한 팔켄하인 참모총장을 통해서만 권력을 행사할 따름이었고, 그가 쫓겨나는 순간 그도 함께 끝이다.

반면 나, 아르민 로젠바움은 비록 가진 건 딱히 없을지언정 어마어마한 국민적 지지와 팬덤을 거느린 일종의 아이돌. 무언가 어마어마한 힘이 있는 건 아니라도 일부러 담가버리기엔 꽤 피곤한 셈.

“이 전쟁은 졌습니다.”

“짐이 듣기로, 발칸에서 세르비아 역도들을 쓸어버리고 동부 전선에서도 백이면 백 모두 이기고 있다 들었다.”

“힌덴부르크 장군은 러시아인들이 대대적인 철군을 감행해 오히려 아군의 보급이 힘겨워지고 적들의 공세 역량은 비축되고 있다고 보는 듯합니다. 폐하. 올해는 몰라도 내년부터 온 나라의 자원이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겐가? 항복하자고?”

“명예로운 강화, 또는 휴전 협상에 나서야 합니다.”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 외교부가 협상에 움직이는 순간 군부가 어떻게 나설지 알 텐데?”

그 순간.

빌헬름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안색이 환해졌다.

“나의 친우 로젠바움이여.”

“예, 폐하.”

“그대에겐 친구들이 많았지?”

“그렇습니다.”

프랑스나 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선 카이저의 밀명이 필요했다.

이 제국 말고.

나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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