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겨울 (2)
레닌.
빨갱이 두목.
러시아 제국의 시체 위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건국한 뒤엔 가장 영향력 있는 빨갱이가 되어 세계에 혁명을 수출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되겠지만, 지금은 이 중립국에서 하염없이 세월만 녹이고 있는 신세.
지금 신분은 어디까지나 혁명을 꿈꿀 뿐인 망명가에 불과하다.
하지만.
- 당장 내년이겠군. 러시아에 혁명이 터지고, 독일은 밀봉 열차에 저 레닌을 실어서 보내버리지. 레닌은 러시아를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로 바꾸고.
당첨 복권이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잭팟.
어차피 지금 나는 라이트 형제가 오길 기다리며 스위스에서 유유자적해야 한다. 그러니 이 짧은 여유 시간을 약간 할애해서, 당첨 복권에 미리 살짝 양념만 쳐놓는 셈이지.
레닌은 내 놀라운 예언을 들었음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다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들은 인민의 고통도, 장병들의 어려움도 모른 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소. 모든 전제 정권은 그들의 죄를 끌어안고 무너질 것이오.”
“조금 더 구체화하지요. 1년. 아니, 몇 달 안에.”
“어째서?”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당신네들이나 독일의 막연한 희망이 아닌, 확실한 근거를 거친 추론이라고 말씀드리지요. 그보다 중요한 건 제가 찾아온 목적 아니겠습니까.”
“말해보시오.”
레닌의 경계심이 점점 올라가고 있다. 거참 까탈스럽군.
“만약 제정이 무너지고 혁명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이곳 스위스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조국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독일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러시아로 돌아가기 무척 수월할 테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혁명이 정말 일어난다면, 그렇겠지요. 부정하지 않으리다.”
“도와드리지요.”
아르민 로젠바움이란 사람이 없어도 러시아 혁명은 일어난다.
아르민이 없어도 레닌은 돌아간다.
아르민이 없어도 독일은 레닌을 투하하는 데 협력한다.
나는 미래 지식에 탑승해 저 과정에 살포시 끼어들 뿐이다.
저 ‘치적’을 내 것으로 먹어버리면서.
“혁명이 일어나면, 귀하께서 독일의 열차를 통해 러시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도와드리겠다, 라니. 제발 러시아로 가서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엉망으로 만들어 달라고 당신들이 부탁하는 것 아니오?”
레닌은 슬며시 고개를 빳빳이 펴면서 자신이 갑 행세를 하려고 했다.
이러는 건 조금 못 참거든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우린 러시아 정부의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판단했습니다. 당신이 없어도 혁명은 일어납니다. 누굴 보내야 조금 더 시끄러워질지, 국익에 도움이 될지 고민하는 것뿐이지요.”
나는 은근슬쩍 마치 내가 여기에 온 게 독일 정부의 의지라는 듯한 뉘앙스를 섞었다.
실은 아무 권한도 없지만,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는 전쟁영웅이 갑자기 모든 임무를 내려놓고 정체를 숨긴 채 선글라스 끼고 중립국까지 왔는데 아무 권한도 없는 맹탕이다? 이걸 누가 믿지?
실제로 레닌은 내가 아닌 내 뒤에 있을 독일 제국이라는 거대 권력을 상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당신들의 국익에 도움이 될 것 같소?”
“러시아에서 혁명을 꿈꾸는 이들은 많고 많지만, 당신이 가장 도움 될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내 개인 의견입니다.”
“호. 그렇게 고평가해주니 고맙소. 이유를 들어볼 수 있겠소?”
“나는 윗대가리들이 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몸을 살짝 기울인 채 목소리를 낮췄다.
“오직 혈통과 상속에 힘입어 막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이 세상의 피라미드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미친 전쟁이 왜 일어났습니까? 황태자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공화국의 총리가 죽었다면 이만큼의 위기가 되었을까요? 일말의 타협의 여지조차 없는 일이었을까요? 그깟 국가의 위신이 수백만 명을 저승에 보낼 만큼의 가치가 있었습니까?”
“······듣고 나서도 조금 믿기 힘든 과격한 발언이군. 당신은 바로 그 혈통과 상속의 정점에 선 사람의 후원을 받아서 컸잖소.”
“애초에 그런 게 중요하지 않은 세상이었다면 후원을 받을 필요도 없었겠죠. 니콜라이 씨도 빌헬름 씨도, 그들 머리 위에 왕관만 없었다면 무척 매력적이고 착한 사람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혁명을 원한다?”
“당신네들 논리대로라면, 내가 원하는 건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 그 사이의 어드메쯤 되겠습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끌 전위당이 충분한 통치 역량을 갖추고 사회 지도층을 대체할 수준이 되어야만 제대로 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레닌은 내 말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틀렸소. 통치 역량을 갖추려면 당연히 통치를 해봐야지. 독일 사민당이 백날 거수기 야당 노릇한다고 어디 통치 역량을 갖췄겠소? 그건 권력자들의 기만일 뿐!”
“뭐, 고작해야 장사치인 제가 이론으로 입씨름하면 당연히 당신에게 밀리겠죠. 그러고 싶진 않습니다. 중요한 건, 어느 나라에서든 한번 구태에 물든 권력 집단이 싸그리 ‘청소’당하는 사건이 있어야만 다른 나라에도 경종을 울리게 된단 거죠. 난 그걸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러시아에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를 만든 뒤 혁명을 수출한다면?”
“그게 바로 당신과 함께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당신들 공산주의자들은 민족이 허상이라 주장하지만, 내겐 내 민족이 소중합니다.”
“우리의 간극은 이해했소. 하지만···.”
그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할 만하다는 것 또한 이해했소. 부디 내가 시도할 혁명이 당신을 설득할 수 있기를 기대하리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이만하면 양념 다 치고도 남았다.
***
레닌 앞에선 내가 사회개혁의 선봉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천만의 말씀.
- 레닌이나 그 밑의 공산당 놈들은 널 죽여버리고 싶을걸? 원래 이교도보다 이단이 더 미운 법이야. 모든 걸 뒤엎고픈 혁명가가 가장 증오하는 건 반동이 아니라 개혁가고.
그야 당연하지. 아무리 내가 보수 언론에 대놓고 ‘붉은 자본가’ 같은 시뻘건 소릴 듣는다 해도 사업으로 어마어마하게 떼돈 번 놈을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런데 어쩌라고.
레닌, 지금 손에 쥔 패 한 장 없는 백수잖아.
그 소련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 나타난 뒤엔 당연히 세계혁명이니 뭐니를 수출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나보다 더 힘세지겠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지. 그 소련이란 나라도 어차피 세계의 공적이었다며.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레닌을 만난 덕에 직시하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념과 사상.
세계대전의 광기가 사그라들면서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과 왕국의 시대도 같이 사그라든다. 혈통이 곧 통치 권한이던 시절이 저무는 것이다.
내가 이 나라의 키를 잡으면 어떻게, 어디로 이 나라를 이끌지를 제시해야 하고, 그 비전에 대중이 매력을 느껴야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여기에서 대단히 앞서 있다. 저건 최신식이란 말이지.
패전 후의 국민들이 매력을 느끼면서도 분명한 비전을 제시할 사상이 필요하다.
놀랍게도 이 독일에서 벌어진 이념 경쟁의 승리자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물건.
게르만족은 세계 최고의 민족.
유대인은 소각해서 비누로 만들어야 제맛.
슬라브인은 죽이거나 노예로 삼아야 마땅.
고대 원시 게르만 종교로의 회귀.
최고지도자에 대한 일방적인 절대적 복종과 숭배.
이게··· 먹힌다고? 진짜로? 혹시 프랑스인들이 독일인이 먹을 밀가루에 저능해지는 약이라도 타놓은 거 아닐까?
- 그건 그거대로 웃기구만. 그 저능해진 독일인들이 프랑스를 6주 만에 때려잡거든.
믿기지가 않는다. 다들 단체로 퇴화의 시대라도 겪었나.
저딴 걸 사상이랍시고 들고 나온 칫솔수염도 웃기고, 저거로 민중을 사로잡았다는 데선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내가 만들어도 저것보단 더 잘 만들 자신이 있다고.
- 오, 이제 사상가 로젠바움이냐.
하나씩 조립해 보자고.
먼저 사회주의가 그토록 대세 트렌드라니까 당연히 사회주의를 일단 한 큰술. <모두가 함께 잘 먹고 잘살자>는 솔직히 사기 슬로건이라고 생각한다. 되냐 안 되냐는 둘째치고.
빨갱이들은 민족이란 개념을 자본가들이 싸게 하층민을 부려먹기 위해 쓰는 최면술의 일종으로 취급하지만, 우리나라 독일에선 저런 게 먹힐 리 없다. 저런 건 승리자들이나 떠올릴 법한 배부른 발상이지, 패배의 굴욕을 씹고 있는 사람들이 동의하려야 동의할 수 없지 않겠나.
고로 나 또한, 독일 민족의 특수성에 관해 논해야만 한다.
그다음엔 좋아 보이는 그럴듯한 문구를 더 담아야지. 그리고 그런 문구는 대개 성경에 들어 있다. ‘네 이웃의 아내를 간음하지 말라’라거나 ‘부모를 공경하라’, ‘서로 사랑하라’ 같은 말에 반발할 변태는 드물거든.
- 왜 첫마디가 하필 ‘간음하지 말라’냐. 너무 네 트라우마가 정직하게 드러나잖아.
조용히 해라, AI 비서. 사람이 발정기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이놈저놈 붙으면서 질펀하게 노는 게 말이나 돼? 당신네 나라 유교에도 있다며. 가정이 먼저다.
21세기 한국이 더 이상 유교를 신앙하는 나라가 아니라곤 하지만 그 도덕의 핵심엔 결국 유교가 있듯.
- 좀 들어봐라 자식아. 유교는 애초에 종교가 아니라니까? 하나님 예수님 하듯이 공자님 맹자님 하고 비는 게 아니라고!
자꾸 사소한 데서 태클을 거네.
유럽의 핵심 도덕은 결국 기독교 윤리였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자연스레 종교는 도태되었다. 거기다 독일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갈등도 심한 편이고, 21세기 가톨릭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 현시점에서 가톨릭은 굉장히 보수적이다 못해 수구에 가깝다. 비스마르크가 가톨릭을 적대하지만 않았어도 이들은 오히려 친정부적이었을 거다.
그러니까 직접적인 특정 종교를 내세우지는 않아도 기독교 윤리에 기반한 도덕성 재고.
독일 민족의 각성과 부흥 호소.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함에도 여전히 배가 뒤룩뒤룩 부른 기성 권력층에 대한 날선 비판과 부의 재분배 제창.
- 야. 잠깐. 이건 뭔가.
벌써 그럴듯한 무언가가 뚝딱 나오지 않았는가.
이걸 대강··· <민족사회주의>라고 이름붙이고 비싼 철학자 나리들에게 용역 주면 되겠지.
- 이거 그냥 파시즘이잖아.
파시즘?
이탈리아에서 파스타 데쳐먹는 놈들이 만든 그런 키메라 사상이랑 세트 메뉴로 묶이면··· 아니, 뭐 그래도 상관 없나. 거기서 차용할 만한 요소 있으면 또 들고 오는 거지.
나는 대강의 생각을 정리해 머릿속 짬통에 일단 넣어 놓은 뒤, 윌버 라이트가 도착하기까지 며칠간 푹 쉬었다.
***
“오랜만입니다, 사장님. 몸은 건강하십니까? 오는 길에 본 신문에 따르면 건강을 크게 해치셨다던데-”
“걱정 마시지요. 전 팔팔합니다. 국내 권력자들이 절 질투해서 끌어내리려고 갖다붙인 명분입니다.”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전부 그 때문입니까? 국내 정치?”
“그야 물론이지요. 군인들이 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노동자 복지 체계를 전부 때려부쉈습니다. 저야 벌어들인 돈이 있으니 그렇다쳐도, 우리 직원들의 앞날이 참으로 염려됩니다.”
“이토록 직원들을 걱정하는 사업가는 사장님밖에 없을 겁니다.”
윌버 라이트는 나를 참 딱하다는 듯 바라봤다.
나는 거기에 대해 뭐라 답해주는 대신, 곧장 미리 준비해 둔 편지 한 꾸러미를 건넸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다.
“꼭 전달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전달해 드리지요.”
“그런 무서운 말씀 마시고요.”
나는 빠르게 편지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했다.
먼저 카이저의 지시로 작성한 평화 호소문. 이건 지시받은 사항을 이행했다는 면피용에 불과하다.
내가 괜히 나서는 탓에 덜컥 휴전이 이루어지면 어쩌나 하고 고민하기도 했지만, 스위스로 출발하기 전 윗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해보고 그런 걱정은 깡그리 사라졌다.
‘그··· 알자스-로트링겐만 돌려주면 대충 협정 맺을 수 있지 않을까?’
‘세르비아나 루마니아 쪽 땅은 우리가 점령했으니 이 정도는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우리 괴뢰국인 폴란드의 주권은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곳의 자원과 산업시설, 노동력을 저렴하게 가져와야 그래도 본전은 칠 수 있습니다.’
글렀다.
저딴 마인드론 죽었다 깨나도 협상 타결 안 된다. 2년 뒤에 나라가 망하는데 본전 생각이라니. 동네 술집에서 포커 치는 주정뱅이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저 허무맹랑한 발상을 담은 평화 협상 요청 따위, 백날 전달돼봤자 쓰레기 소각장으로 향할 게 뻔하니 신경 쓸 필요 없고.
핵심은 내가 직접 쓴 편지들.
[군부가 무제한 잠수함 작전 재개를 강력히 주장.]
[황제, 총리, 의회의 권력이 소멸하고 참모차장 루덴도르프가 국가의 전권을 탈취하려는 중.]
[독일 제국의 모든 정복 욕구와 주전론은 군부에서 나오고 있음.]
[평화를 외치는 민중의 시위가 강제 진압되고 있음.]
루덴도르프.
베르사유 조약엔 네가 서명해 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