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47/103)

제국들의 비명 (1)

1916년.

기후가 좋지 않았다.

“옘병. 비료도 없고 사람도 없는데 날씨까지 지랄이여.”

“군바리 새끼들은 시키면 농사가 척척 되는 줄 알아.”

“육시럴 놈들.”

오랫동안 흙에서 자라왔던 농부들은 날씨가 심상찮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전쟁이 장기화되리라는 사실이 명백해진 이후, 독일은 식량에 대한 배급제를 시행하는 한편 치솟는 물가를 억제하기 위해 일정 가격 이상으로 생필품의 가격을 올려 받는 걸 금지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나라든 간에 농부들은 항상 ‘너희에겐 정책이 있지만 우리에겐 대책이 있다’를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들.

농민들은 열과 성을 다해 식량을 얌전히 나라에 갖다 바치는 대신 온몸을 비틀어대며 최대한 자기 집 지하실에 수확물을 짱박았고, 훨씬 웃돈을 받고 암시장에 내다 팔기 시작했다. 도시는 만성적 식량난을 겪었고, 도시민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패물을 싸들고 농촌으로 가야만 했다.

농촌은 도시와 군대로 인력이 유출되어 인력난에 시달렸고, 정부는 놀랍게도 전쟁 포로를 데려다가 농사를 지으라고 던져주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니 러시아에서 농사일하러 넘어와 있던 외국인 노동자들을 붙잡아 ‘하하! 너흰 집으로 못 돌아간다! 전쟁 끝날 때까지 닥치고 계속 농사를 지어줘야겠다!’를 외쳤다. 임금을 후려치는 건 당연한 옵션.

이렇게 해도 노동력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애초에 포로나 노예에게 노동력을 기대한 게 문제였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

“힌덴부르크 선으로 물러나면 더 적은 병력으로도 전선을 지킬 수가 있다. 여유가 되는 병력을 제대시켜 공장과 농촌으로 보낸다.”

“병력을 줄이면 전쟁은 어떻게 수행합니까?”

“루마니아를 끝장내고 러시아를 밀어버리면 전력의 여유가 생기지 않겠나. 게다가 힌덴부르크 프로그램에 따라 군수품 생산이 더욱 늘어나면 부족한 병력을 메꿀 수 있다.”

독일은 14년과 15년의 파멸적인 실수, 예컨대 숙련공 징병이라거나 비료 생산 지연 같은 것들을 되풀이하지 않을 만큼의 지능은 있었다.

문제는 당장 다가온 16년 가을.

평년보다 비가 더 많이 내렸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된 전쟁통에 대자연이 막타를 넣은 결과.

“아, 빌어먹을.”

“다 썩었어. 다 썩었다고!!”

“흐흐. 망했다. 하늘이 벌을 내린 거야. 천벌이라고, 이건.”

감자마름병이 퍼졌다.

독일 감자의 절반이 쓰레기가 되었다.

그 뒤 성큼성큼 다가온 겨울은 이상하리만치 살을 에는 혹한이었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 석탄 사용량이 급증했지만, 이미 석탄 공급은 삐걱거리게 된 지 오래.

“혹한 때문에 강이 얼었습니다.”

“국내 수운이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철도 수요가 폭증합니다.”

“창고와 화물 열차에 실린 감자가 얼어 터졌다는 보고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공장이 멈춰 섰습니다. 탄약 생산이 중지되었습니다.”

“정말··· 신이 우릴 버린 건가?”

<순무의 겨울>이 찾아왔다.

***

독일 제국 육군참모총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하루는 오전 9시에 느지막이 시작된다.

전임자, 몰트케와 팔켄하인이 밤낮을 잊고 일에 몰두했던 것과 달리 고령의 힌덴부르크는 잠을 좋아했다. 때때로 그는 늦잠을 자거나 혹은 낮잠 삼매경에 빠져 일정을 취소할 때도 있었지만, 아무도 그걸 가지고 그에게 뭐라 하지 않았다.

“오늘 안건은 뭔가?”

“예, 총장님. 금일 보고서를 드리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대부분의 업무는 루덴도르프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오.”

“음.”

“그렇군.”

“호오.”

“자네가 알아서 하게.”

힌덴부르크는 자신이 보기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대개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다. 9시의 첫 미팅은 그래서 몇 분도 걸리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총장의 승인이 떨어지자마자 루덴도르프는 성큼성큼 걸어나가 부하들에게 거침없이 새로운 임무를 던져주기 시작한다.

그리고 힌덴부르크는 그 모습을 대강 눈으로 슥 훑어보고는, 홀로 아침 산책을 다니며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거나 아니면 접견 희망자를 만나곤 했다.

“반갑습니다, 총장님. 오늘은 다름이 아니옵고-”

“으음. 이 늙은이가 영 몸이 찌부드드해서 말이오. 혹시 걸으면서 좀 이야기할 수 있겠소?”

“물론입니다!”

어중이떠중이는 감히 독일의 최고 권력자인 그를 만날 약속조차 잡을 수 없다. 그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은 대개 거물이었고, 거물답게 당연히 원하는 게 있었다.

그가 노인이 가장 잘하는 일, 근엄하지만 인자하게 들어주기라는 막중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한바탕 일감의 폭풍을 휘몰아친 루덴도르프가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찾아온 손님의 의견과 희망사항에 대해 참모차장과 공유하고, 그의 의견을 듣고, 대개 힌덴부르크가 동의함으로써 끝나는 일 대 일 합의를 한다.

이 합의가 끝나고 나면 각 부서별 전체 회의가 시작된다. 힌덴부르크는 아까의 ‘합의’ 사항에 따라 회의를 이끌고, 지시를 내린다. 지시를 내린 뒤엔 산더미 같은 편지를 읽어보고, 답장을 하고, 서신을 보낸다. 접견 희망자가 급할 경우엔 편지 보낼 시간을 포기하고 상대를 만난다.

그러니까.

“반갑군, 젊은 영웅. 우리 차장이 자네를 그토록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군.”

“위대한 영웅 힌덴부르크 각하를 만나 뵙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아르민 로젠바움이라고 합니다.”

이런 골치 아픈 상대들.

힌덴부르크는 가만히 생각했다.

참모차장은 그가 갖고 있던 공장을 빼앗았고, 그는 군말 없이 내놓았다. 아르민 로젠바움은 누가 봐도 명백히 납작 엎드려 기고 있었다.

하지만 루덴도르프의 생각과 달리 항공기 생산성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는데, 그는 어지간히 문책당하기 싫었는지 ‘공장 내 빨갱이 노동조합원들이 사보타주를 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노조위원장을 비롯한 강성 노동자 여섯 명은 즉각 징병 대상으로 지정되어 동부 전선으로 끌려갔지만 여전히 생산성은 바닥을 기었다.

어쩌면 이 젊은이가 공장을 되찾기 위해 직원들에게 정말 사보타주를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저토록 성공한 인물이니만큼 자신만의 생산 관리 비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힌덴부르크는 속내를 숨긴 채 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동안 제국의 하늘을 지키기 위해 놀라우리만치 큰 공헌을 했네. 제국은 결코 그대의 공헌을 잊지 않을 걸세.”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직 신민이 행해야 할 일을 행했을 뿐입니다.”

“루덴도르프 그 친구가 사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닐세. 제국의 영웅이 몸이 좋지 않아 후방으로 물러나야만 했다고 공표했는데, 경영에 매진하는 모습이 보여진다면 누가 봐도 좀 그렇지 않겠나.”

“아. 저는 괜찮습니다. 더 나은 분들이 회사를 경영해주신다면 당연히 저야 좋지요. 실제로도 야전에서 건강을 해친 탓에 제겐 너무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하지만 귀관이 이리 건강한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새삼스레 조금 더 조국을 위해 일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드는군. 어떤가. 중요한 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겠네.”

낚싯바늘을 힘껏 던진다.

루덴도르프도 이 정도면 충분히 건방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줬다고 여기고 있었고, 한 명 한 명이 아쉬운 현 실태를 고려했을 때 저만한 인재를 놀리는 것도 웃기는 일. 팔켄하인조차 루마니아 전역에 투입된 마당 아닌가.

이렇게 선물 한 꾸러미를 툭 던져준다면, 돈에 미친 자본가든 명예를 원하는 프로이센 남자든 당연히 달려들 터. 로젠바움을 끌어안음으로써 괜히 사석에서 흘러나오는 뒷말도 끝내고 좋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각하. 제 부족한 경험과 연륜으로는 도움이 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무엇인지 듣지도 않고 말인가?”

“저는 이미 외부와의 접촉과 자원 수출입이라는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국가의 명운이 달린 중대한 일이며, 무엇보다 황제 폐하께 이 일을 하겠노라 자랑스레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제 와서 딴일을 하게 된다면 폐하께서 얼마나 저를 줏대 없는 이로 여기시겠습니까?”

사리에 맞는 말이다.

로젠바움이 카이저의 후원으로 컸다는 걸 모르는 이는 드무니, 그가 황제에 대한 충심을 내세우는 것 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힌덴부르크의 시선은 이 젊은이의 눈으로 향해 있었다.

지극히 냉정한 저 눈빛.

얼굴 가득 띄운 충심은 모조리 기만과 자기최면에 불과하다.

호엔촐레른 황가에 대한 충심은 있더라도 빌헬름 2세에 대한 충성이 사그라들고 있는 그는, 모든 이성과 합리를 무시한 채 단숨에 로젠바움의 마음속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황제가 핑계에 불과하다면.

대체 왜 중책을 맡는 것을 거부하는가?

힌덴부르크는 연신 간사하리만치 굽신거리고 있는 젊은이에게 조금 더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로젠바움 대령.”

“예, 총장님.”

“자네. 이 전쟁, 진다고 생각하고 있군?”

아주 일순간, 그의 동공이 살짝 커졌다.

이놈 봐라?

“총장님. 무언가 오해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수작을 싹 무시한 채, 198센티미터의 거한 힌덴부르크는 로젠바움을 내려다보며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정말, 정말 전 억울합니다. 장군님. 저는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전전했습니다.”

“가면놀이 그만하게. 내가 자네를 역겹다고 판단하기 전에. 변명은 여기까지야. 왜지?”

“······저희 집 어린 애기들이 순무가 먹기 싫답니다.”

모기 목소리만 한 자그마한 말이 그의 귓전에 쑥 파고들었다.

“독일에서도 가장 많은 돈을 갈퀴로 긁어모은 군수업자에 속하는 제가, 애들한테 순무와 루타바가(Rutabaga)를 먹이게 되었습니다. 각하. 저 밑바닥 서민들은 톱밥을 먹고 삽니다. 먹을 게 없습니다.”

“이래서 농사에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힌덴부르크는 어깨를 내리누르던 양팔에서 힘을 쭉 뺐다. 비단 팔뿐만 아니라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우리의 아들들을 굶주리게 한 것은 정부의 책임을 피할 수 없겠지. 하지만 정부보다 먼저 책임을 물어야 할 곳은 바로 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섬나라 놈들일세. 그렇지 않나?”

“그야, 그렇습니다만.”

“우린 이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할 걸세. 우리의 아들들이 굶주리는 만큼 저들 또한 굶주려야 해. 계산에 따르면 반년 정도면 영국이 항복하지 않곤 못 배긴다더군.”

로젠바움은 정색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은 미국의 참전을 불러올 겁니다. 각하. 영국이 무너지는 것보다 미국의 참전이 훨씬 더 막중한 일입니다.”

“됐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을 맡은 뒤에나 말하게.”

“각하.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비서실장의 말에 고개를 든 힌덴부르크는 로젠바움과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다음 주 중에 다시 일정을 잡고 날 보러 오게. 그땐 뭐든지 좋으니 일을 해야만 할 거야. 폐하껜 말씀드려 놓지.”

“···알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네, 젊은 영웅.”

로젠바움은 지갑을 도둑맞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물러났다.

힌덴부르크는 담배 한 대를 태운 뒤, 점심을 먹으러 일어났다. 밥은 먹고 살아야지.

그리고 다음 주.

“각하. 다시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이건 뭔가?”

“올해가 각하의 탄생 70주년이 되는 해잖습니까. 제가 각하를 위해 약간의 성의를 표시하고자 합니다.”

로젠바움은 천연덕스럽게 서류를 내밀었다.

동프로이센 지방 시골 어드메의 농장 땅문서였다.

“···뇌물인가?”

“제 충성의 증표입니다. 아무쪼록 각하께서 제 성의를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이쯤되면 뻔뻔함을 넘어서 존경스럽기까지 하군.”

힌덴부르크는 땅문서를 집어 들어 자신의 서랍에 넣었다.

솔직히, 농장은 참을 수가 없었다.

몇 달 뒤.

미국이 참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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