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겨울 (2)
“불쌍하기도 해라. 저렇게 예쁜 아이인데 어째서···.”
에르나가 부엌칼을 꺼내와 날 찌른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전화번호부를 대신할 두툼한 책, 예컨대 공산당 선언이라도 옷 안에 끼워야 하나 고민했던 게 허탈할 지경이었다.
오히려 나보다 더 그 아이를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해 보이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하루아침에 여동생이 생기고 가정윤리 대붕괴 현장을 맛보게 된 나도 좀 위로해 달라고?
내 사춘기 애새끼 같은 생각은 에르나의 그다음 말에 깡그리 삭제당했다.
“진짜로 아버님 아이지? 확실하지?”
“내 애 아니라니까.”
“잘 모르겠는데. 오히려 당신이랑 눈매가 좀 닮은 것 같은데.”
“진짜 아니라고.”
“알아본 적 있어? 혹시 모르잖아. 옛날에 당신이랑 만났던 사람 중에 애 생긴 사람이 한 명쯤 있을지도-”
“없어! 한 명도 없다고! 내가 그 정도로 막살진 않았어!”
정정하겠다.
에르나 입장에선 갑자기 내가 생뚱맞게 애를 하나 데려온 것 아닌가. 마리아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 걸 믿는 데 이미 인내심을 모두 소비하고 거기에 관해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한 듯했다.
- 우리는 전후사정을 다 아니까 그렇지, 부인 입장에서도 충분히 날벼락이야. 그냥 믿어줄 때 넘어가. 왜 자꾸 꺼진 불에 기름을 끼얹어?
그래. 아무튼 안 찔렸으니 됐다. 여기서 더 이야기 끌고 가 봐야 내 애 아니냔 억울한 추궁이나 당하지.
하지만 장작을 넣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
“우리 사위, 힘도 좋구만. 원래 한 시대를 호령하는 사내대장부라고 한다면 정부(情婦) 한둘 좀 거느리는 게 무에 그리 큰 흠이겠나. 정부 소생 애들이야 적당히 학교 보내고 호구지책 마련해줘서 좋은 혼처 구해주기만 하면 남자가 할 일 한 거지. 모름지기 그 훌륭한 씨를 널리 널리 퍼뜨려야-”
“아빠? 지금 그 사내대장부가 누구 남편이게?”
“-퍼뜨렸다간 내 단단히 경을 칠 게야! 하늘이 무너져도 나는 용서 못 하네! 공중항모 비행선을 만든다 하더라도 절대 용서 못 해!”
여기서 720도 턴을 홱 꺾네. 브루노 씨와는 다른 귀족의 품격··· 이라고 하기엔 둘 다 추하다. 추해. 오십보 백보야.
“아이고 무섭다, 무서워. 한마디만 더 했다간 내일 아침도 못 얻어먹겠네. 사위, 고생허이.”
괜히 몇 마디 붙이며 위엄을 떨치려던 백작은 사자의 코털을 뽑아 줄넘기를 했다는 걸 직감했는지 괜히 크흠 크흠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다.
왜 굳이 불발탄 옆에서 담배를 피우려는 겁니까, 이 망할 늙은이야. 이러면 뒷감당 전부 내 몫이잖아. 내일 아침은 영감 이빨로는 절대 못 씹을 톱밥 섞인 흑빵이다.
- 패륜아 아르민 로젠바움. 그의 인성의 끝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친부를 구타하고 은혜 입은 장인에게 빈 도시락을 보내는-
당신도 옆에서 부채질하지 말고 닥쳐. 빈 도시락은 또 뭐야.
아무튼 ‘누구 아이인가?’라는 오프닝에 대한 합의가 끝났으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 했다.
“한 명 더 기르는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아들만 둘이라 나도 딸애 한번 키워보고 싶단 생각도 있었고. 어릴 땐 힘이 넘쳐서 고생시키더니 이제 하나는 사춘기가 왔다고 또-”
“몇 년만 좀 돌봐주면 나이 차는 대로 기숙학교 보내자. 내가 알아볼게.”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아이가 커서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때 다시 논의해보면 좋을 것 같네.”
에르나는 슬그머니 문지방 즈음에 서서 괜히 맴도는 백작을 한차례 노려보고는 입을 열었다.
“고아원에 보내자고 하진 않을 거야. 그런데, 저 아이를 그냥 직원 애라고 키울 거야?”
“그러면 어쩌자고. 우리 아빠가 말년에 힘 좀 써서 거의 스무 살 차이 나는 여동생을 만들었다고 사방천지에 광고해?”
“지금 나한테 날 세우는 거야? 키우자고 했는데도?”
“아, 아니. 그럴 리가 있겠어.”
“이미 서류상 부친인 그 직원분 사망일시랑 마리아가 태어난 날짜가 안 맞는다며. 어설프게 숨기려 했다간 오히려 문제가 커질지도 몰라. 언제고 당신을 흠집 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걸 문제라고 떠들겠지.”
미묘하게 감정이 실린 내 말에 같이 화를 내도 되련만, 에르나는 조곤조곤 말했다.
“도의적으로 보나 다른 면으로 보나, 우리가 제대로 키우는 게 맞지 않겠어? 여동생이라고 하는 것보단 딸이라고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지금 순간적인 동정심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라면 차분하게 다시 생각해 보는 게-”
“동정심이 아니야. 합리적 선택이지.”
- 뭐. 조금 경우는 다르지만, 어린것들이 사고 쳐서 애 낳았으면 애 엄마 호적에 올리는 게 아니라 할머니의 늦둥이인 것처럼 출생신고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 지금은 그 반대겠지만.
에르나는 드물게도 단호한 태도였고, 조스비 역시 은근히 내 딸처럼 키우라고 푸시를 넣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집에 데려왔잖아. 그럼 당신도 키우고 싶단 뜻 아니었어?”
“어쩌겠어. 친부도 살아 있는데 고아원 보내는 건 더 못 할 짓인데.”
“우리가 키운다 치고, 자기들보다 어린 고모가 갑자기 생기면 애들도 혼란스러워할 거야.”
“쩝.”
바깥만 내내 싸돌아다닌 내가 애들에 관해 뭐라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저 아이도 마찬가지야. 사생아로 태어나길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그런 딱지를 달고 평생을 살게 할 순 없어.”
“말이야 바른말인데 그게 그렇게 쉬울까.”
“적어도 성만큼은 바꿔줘야지. 저 아이는 어쨌거나 로젠바움이야. 로젠바움 성을 받는 건 저 아이의 권리라고.”
“혼외자한테 뭘 굳이 권리씩이나 있다고-”
“아빠는 좀 가만히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와 동등하게 ‘논의’를 하는 게 어쩐지 처음 같았다. 집을 산다거나 애들 학교 고르는 일은 그냥 그녀 하자는 대로 했었으니까. 나는 당장 내쫓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에르나가 저렇게 더 강하게 키우자고 하다니 뭔가 좀···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괜찮아?”
“뭐가?”
“남의 자식이잖아. 나 죽고 나서 유산 배분이라거나.”
“그래서 지금 미리 다잡는 거잖아? <로젠바움 부자(父子)에게 버려진 비운의 삶> 같은 기사나 책이 나오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분명하게 해결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녀가 제 머리를 꾹꾹 누르며 내 말을 칼같이 잘랐다.
- 네가 졌다. 인성도 마음 씀씀이도 모두 벼멸구만 한 네놈에 비해 과분할 정도로 넓구나. 저런 부인 만난 게 행운이니까 빨리 감사하다고 고개나 조아려.
그러니까.
하.
빌어먹을.
- 대놓고 말해주마. 그녀도 짐작하고 있어. 네게 있어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저 애를··· 영원히 말을 못 하도록 묻어버리는 거란 걸 말야. 사람에서 괴물로 넘어갈 마지막 선이다. 지금 네놈 눈에 살기가 묻어 있다고!
나를 쓰레기 보듯 쳐다보던 범석이가 얼른 덧붙였다.
- 지금 네 처가 순수하게 저 어린아이에 대한 동정심만 있을 것 같아? 저건 너에 대한 동정과 안타까움도 섞인 거야. 인간 아르민의 아픔에 공감해주고 있잖아! 닥치고 그냥 받아들여. 부탁이다.
나를 왜 그렇게 쓰레기로 매도하냐.
쟤를 슥삭한다니. 합리적인 것 같아 보여도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다. 하늘 아래 비밀이 뭐 얼마나 있다고,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핵지뢰를 파묻는다는 게 말이나 되냐.
다시 스리슬쩍 착석한 백작과 함께 셋이서 논의하길 한창.
나는 뜬눈으로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를 서재로 데려왔고, 에르나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내어 왔다.
“우리는 널 입양하고 싶단다. 네 생각은 어떠니?”
“네? 네?”
“나랑 남편은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이러면 네 친모에 관해서는 더 이상 바깥에 말할 수 없겠지만, 너는 자유로워질 수 있어.”
“아니면 브루노 로젠바움, 너를 데려온 그 사람이 친부라고 정식 절차를 밟는 방법도 있지. 하지만 그 경우엔 네 앞날에 치명적인 문제가 생긴다. 이 두 사람은 모든 과거를 이 전쟁의 혼란 속에 떠내려 보내는 게 가장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단다.”
마리아는 고민도 하지 않고 열심히 고개를 흔들었고, 그 모습을 보던 에르나는 눈이 뻘게져서는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니라고 해도 한참 어린 애가 조숙한 저 모습을 보고 동정심이 흘러넘치는 게 훤히 보였다.
“죄송해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저, 시켜만 주시면 청소든 빨래든 뭐든지.”
“그런 말 하지 말고. 자. 일단 씻자.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아무리 생각해도 개판 5분 전의 해결책이지만.
키우겠다는 사람이 총대 멨는데 구구절절 더 떠들어서 뭐 하겠나.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대강 침대에 몸을 날려 곧장 잠들었다.
피곤했다.
땀을 잔뜩 흘려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
***
콘라드 슈미트는 베를린에 당도했다.
그의 군복은 너덜너덜해져 걸레로도 쓰기 힘들어 보였고, 다 해진 군화는 오는 길에 엿 바꿔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총 한 자루만큼은 끝까지 붙들고 있었는데, 이 친구가 없었다면 오는 길에 어딘가에서 이승 하직했을 게 틀림없었다. 아주 도움이 되는 친구였다.
1918년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인들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고 철십자 훈장까지 받았던 그.
하지만 그의 부대가 서부 전선으로 재배치된 이후부터는 끝없는 패배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장에서 살아남았던 베테랑 전우들 중 상당수도 서부에서 죽거나 다쳤다.
사지 멀쩡히 돌아왔으니, 그는 참으로 행운아라 할 수 있었다.
쿵쿵쿵!
그리웠던 집.
이 마당을 보고 싶어 몇 년을 참아 왔던가.
문을 몇 차례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혹시나 해 열쇠를 보관해 두곤 했던 화분을 들춰보자, 옛날처럼 열쇠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곧장 문을 따고 집 안으로 들어온 그.
하지만.
“누, 누구세요?”
“넌 뭐야! 여긴 우리 집이야!”
“자, 잠깐!”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아기를 품에 안은 채 그의 집 안에 있었다.
콘라드는 곧장 몸에 익은 동작대로 총을 겨누었고, 남자는 아기를 꽉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며 손을 휘저었다.
“호, 혹시, 콘라드 슈미트 맞습니까?”
“그래! 내가 콘라드 슈미트다!”
“바, 반갑습니다, 형님. 처, 처남이 한 분 있는데, 전쟁터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내 매제가 생겼다고? 못 들었는데?”
“편지 보냈다고 했었는데···.”
괜히 뻘쭘해진 콘라드는 조용히 총을 내려놓고 반쯤 폐허가 된 부엌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찬장을 열어젖혔지만, 안엔 먼지만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찬장을 닫고 식탁 의자에 대강 앉았다.
“내 여동생은? 자네, 부인 말일세.”
‘부인’이라는 단어가 오늘따라 왜 이리 외국어처럼 느껴질꼬.
최근 몇 년간 쓸 일이 없던 일반적 대화문을 만들기 위해 간신히 공통 주제를 끄집어낸 그의 기대에 호응하듯, 이 매제란 사람은 아기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출근했습니다.”
“출근? 여자들도 직장을 다닌다니. 도대체 전쟁이 얼마나 세상을 바꾼 건지. 걔는 무슨 일 하고 있소?”
“로젠바움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노조 위원입죠. 저도 거기 출근했는데, 잘리기도 했고 애 볼 사람도 필요해서 그만···.”
노조라는 단어를 듣기 무섭게 콘라드의 인상이 구겨졌다. 사장님의 은덕도 모르고 뭐라도 더 받아내려고 날뛰던 빨갱이들이 얼마나 극악무도하고 야비한 놈들인지 그토록 설명해줬건만, 감히 사장님을 배신해?
“아. 그.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로젠바움 사장님께서 노조 위원장도 겸하고 계십니다.”
“사장님이 돌아오셨나?”
“그렇습니다. 말이 노조 위원이지, 형님 하시던 일과 거의 똑같을 겁니다.”
“으아아아앙!!”
한참 말똥말똥 제 아비만 바라보던 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자가 아기를 달래기 위해 연신 토닥이는 동안, 콘라드는 더럽고 지저분해진 손을 움찔거리며 천천히 아기에게로 다가갔다.
피로 물든 이 더러운 손으로 저 순백의 도화지 같은 아이를 만져도 될까.
손을 뻗었지만 차마 손대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을 때, 아기가 먼저 손을 쭉 뻗어 남자의 굳은살 가득한 손가락을 매만졌다.
“꺄하!”
“애 이름이 뭔가?”
“프란츠입니다. 프란츠 바이젠바움. 제 소개를 아직 못 드렸군요. 막스 바이젠바움이라고 합니다.”
“유대인인가?”
“그, 그렇습니다.”
“내가 딱히 반유대주의자는 아니고, 그냥 성이 그래서 물어본 걸세. 이미 애까지 생겼는데 더 뭘 말하겠나. 그럼 자네, 지금 직업은 뭐고?”
“저는 그, 시를 쓰고 있는데-”
더 들어볼 것도 없었다. 룸펜 한량이라니.
딱 보니 깡마르고 비리비리해서 군대도 안 간 것 같은 게 골방에서 글만 쓸 상 아닌가. 생긴 걸 보니 여동생이 왜 결혼했는진 아주 잘 알겠다만, 제 부인이 바깥일 하게 두고 본인은 집에서 애를 본다? 이거 순 기둥서방 아닌가?
여동생 얼굴도 볼 겸, 회사로 가봐야겠다.
그가 없는 동안 도대체 무슨 곡절이 있었는지 좀 들어봐야 했다.
“그리고 혹시··· 우리 부모님은, 어디 계신가?”
“죄송합니다. 그··· 두 분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독감에 걸리셔서 그만. 저희 부부가 임종을 지켜보긴 했습니다만, 두 분 모두 형님을 한 번이라도 뵙고 싶어 하셨습니다···.”
콘라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빨리 회사로 가야겠단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