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1)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로젠바움 후보.”
나는 사민당의 중진이자 1919년 혁명의 주역 중 한 명인 필립 샤이데만(Philipp Heinrich Scheidemann)과 만났다.
에베르트가 죽고 난 뒤, 나는 고의적으로 사민당과 거리를 두고 중앙당, 민주당과 더욱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나는 사민당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한때의 옛정을 생각해 잘되라고 회초리를 드는데~’ 식의 돌려까기를 날려댔다.
사민당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을 만도 하다.
카이저의 제국에서 핍박받던 자들은 바이마르 공화국 권력의 중추가 되었고, 사민당은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우향우를 거듭해나갔다. 세상을 개혁하고 부정에 맞서려는 노력보다는 현실타협적으로 점점 찌들어간 것이다.
그렇다면 자본가 입장에선 오히려 환영할 변화일 텐데, 정작 그 자본가인 아르민 로젠바움이란 놈은 미친 듯이 ‘당이 맛이 갔다’며 비난을 해댄다. 이쯤 되면 누가 빨갱이고 누가 부르주아지인지 구분도 안 간다. 웃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그렇고.
“출마 안 하시겠죠?”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소?”
“지지 선언이나 해주시지요. 공화국이 지옥의 불구덩이로 빠지는 꼴은 막고 싶지 않으십니까.”
“아주 맡겨 놓은 것처럼 당당하게 말하는군.”
“진짜 맡겨놨으니까요.”
로젠바움 대 히틀러.
딱딱한 흑빵 대 톱밥 반절 섞인 순무.
똥맛 카레 대 똥맛 똥.
사민당에게 더 선택지가 뭐가 있나? 마음에 들진 않지만 아무튼 먹을 수 있는 것 부류에 해당하는 것과 그냥 못 먹는 돌 중 하나를 먹어야 하는데?
“싫으면 히틀러를 뽑으시거나-”
“그만.”
“아니면 공산당이라는 또 다른 옵션도 있지요.”
“그래! 우린 당신밖에 없지! 이 선거판에 후보를 내느니 그냥 네놈에게 표를 주고말고! 암!!”
샤이데만은 신경질적인 어조로 내뱉듯 말했다.
나와 에베르트가 호흡을 맞춘 지도 10년이 훌쩍 넘었고, 내가 복지사업을 진행한 것도 제법 오래됐다.
이 말인즉슨, 이미 사민당이나 중앙당 같은 거대 정당의 조직 곳곳에 내 빨대를 꽂아놨단 뜻이다.
단순히 로젠바움사 사원들이 당원이라서가 아니다.
나와 함께 협업했던 이들.
우리 회사에 납품하거나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이들.
내게 정치자금을 받거나, 소소한 은혜를 입거나, 시민단체의 투표로 당선된 이들.
내가 명색이 거대 기업을 굴리는 자본가인데 설마 정경유착도 안 했겠는가. 이런 건 너무 당연한 기본 스킬이다.
중앙당은 이미 파펜과 브뤼닝이 손을 쓰고 있었고, 언론을 통해 히틀러의 모가지에 <적그리스도>라는 그럴듯한 호칭을 붙여준 관계로 그들의 표심 또한 제법 빨아먹었다.
대충 이러한 야합과 정치적 합의를 도출한 뒤.
남은 것은 이제 선거 유세뿐이었다.
***
“빨갱이들에게 죽음을!!”
“하일 히틀러!! 그분을 대통령으로!!”
“우리가 아니면 누가 독일을 지킬쏘냐!”
나치 돌격대 SA(Sturmabteilung)는 이 시점에서 무려 40만 명의 회원을 자랑하는 초거대 극우 깡패 조직이었다.
각지의 나치당원들과 돌격대는 말 그대로 이번 선거에 총력전으로 나섰다.
온 사방에서 행진, 구호제창, 각종 대회, 행사, 집회, 가두시위가 이어졌고 전국 곳곳에 하켄크로이츠가 휘날렸다. 히틀러 또한 열흘간 독일 주요 도시 열세 곳을 찍으며 정력적으로 유세에 나섰다.
하지만.
“베를린의 정치가들이 어디 밑바닥 인생을 한번 돌아본 적이 있습니까?”
“혁명하겠다고, 나라 바꾸겠다고 해서 나라 바뀌었습니까!”
“아니오!!”
“하지만 누가 바꿨습니까! 누가 미래와 희망을 줬습니까!!”
“로젠바움!! 로젠바움!!!”
로젠바움의 시민단체 <독일중흥민족각성운동>은 나치의 행사에 맞불을 놓듯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일제히 집회를 열기 시작했다.
수만의 열성회원.
그리고 수백만의 회원.
그동안 단 한 번도 이 시민단체가 정치적인 움직임은커녕 어떠한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모두가 망각하고 있었지만.
로젠바움의 이 시민단체는 덩치로만 따지면 모두의 상상을 초월한 거대한 단체였고, 특정 계급이나 지역에 치우치지도 않았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기까지 했다.
당연히 규모가 크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거대할 줄은 몰랐다.
당연히 움직이리라 생각은 했지만 이토록 민첩할 줄은 몰랐다.
이 거대 단체가 앗 하는 순간에 정치세력으로 변모하자, 그제서야 몇몇 사람들은 로젠바움의 정계 진출이 어쩌면 아주 거대한 대계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한편.
“햣하! 돌격대는 전부 소각이다!!”
“매국노다! 매국노가 티롤에 이어 나라마저 팔아먹으려 한다!!”
“칫솔수염 단 오스트리아 촌놈에게 엉덩이를 대주고 싶어 환장한 머저리들 따위 독일 민족의 수치. 좀 패죽여도 괜찮다! 공격!”
<독일중흥민족각성운동>의 산하단체, <애국형제단>이 발단식을 선언했다.
이들 <형제단>의 일은 당연히 돌격대를 막고, 돌격대와 나치를 후원하는 악의 무리들을 계도하는 것.
전국 방방곡곡이 형제단과 돌격대의 패싸움으로 몸살을 앓을 때쯤.
이제 다들 대선 때문에 까먹고 있었지만 아직 총리 명패를 달고 있던 브뤼닝 총리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 현 시간부로 나치 돌격대를 불법 단체로 지정하고 그 활동을 금한다. 치안 기관은 이들의 활동을 단속해야 할 의무가 있다.
너희 불법.
해산해.
히틀러와 나치는 이를 ‘의회 폭력’으로 규정하고 브뤼닝의 인형을 불태우는 행사를 벌였지만, 바로 이 행사에서조차 몽둥이를 든 형제단이 떼로 몰려와 습격당하는 일이 허다했다.
한편 로젠바움은.
“로젠바움!! 로젠바움!!!”
“회장님!! 살려주세요!!”
“이 나라를 살려주십시오 회장님!!”
“시민 여러분! 이 아르민 로젠바움, 죽은 산업과 죽은 도시를 살려낸 명의 로젠바움이 왔습니다! 이제 이 나라를 살리겠습니다!!”
“와아아아아!!”
자신의 장기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다니며 전국을 유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젠바움사가 회장을 추락사시키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제작한 황금빛 전용기 <누렁이>는 베를린에 번쩍, 헤센에 번쩍, 뮌헨에 번쩍 하며 사방천지를 날아다녔고, 가슴팍엔 훈장을 매달고 파일럿용 고글을 쓴 채 터프하게 나다니는 그의 모습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시그니쳐였다.
그리고 마침내.
1932년 3월 13일.
선거일이 다가왔다.
***
32년 5월 5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임기가 끝났다.
그리고 이 나라에 새로운 대통령이 나타날 때가 되었다.
- 마침내 이 날이 왔군.
선거 결과.
공산당 후보 에른스트 텔만, 약 15%.
나치당 후보 아돌프 히틀러, 약 30%.
그리고.
무소속.
아르민 로젠바움.
52.8%.
결선투표는 없었고, 선거는 그대로 끝났다.
“각하. 시간이 되었습니다.”
“가지.”
나는 천천히 걸어나가 연단을 향했다.
1884년생, 집에서 애비에게 처맞기나 하던 코흘리개 평민이 마침내 1932년 독일의 지도자가 되었다.
내 평생.
내 평생을 오로지 여기에만 바쳤다.
남들이 본다면 미친 새끼라고밖에 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나는 했다.
왜냐.
멀리 보는 자는 행동해야만 하니까.
저 아돌프 히틀러라는 악귀에게서 이 나라를 지켜내야 하니까.
잘못된 길로 이 나라를 인도하려는 거짓 선지자를 밀어내고, 진짜 선지자인 내가 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만 하니까.
누가 감히 내게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이 거룩한 사명을 띠고 내려온 나를 누가 감히 막겠는가.
나는 마침내.
연단에 올랐다.
“와아아아아아아!!”
수천, 수만의 군중이 오직 나만을 기다리고 있다.
곳곳에서 카메라가 플래시를 터뜨렸고, 영화사 직원들은 기록영화를 촬영하기 위해 열심히 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곳곳에 휘날리는 깃발과 플래카드.
저들은 오직 나를 원하고 있었다.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지루한 맹세 절차가 지나가고, 나는 마침내 마이크에 입을 댔다.
“반갑습니다.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뜨거운 지지 덕택에 이 자리에 취임하게 된, 공화국 제3대 대통령 아르민 로젠바움입니다.”
다시 한번 환호.
나는 저들의 환호가 잦아들길 기다린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전 세계가 경제 불황의 고통 속에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이번 위기는 결코 쉽게 극복될 유형이 아니며, 앞으로 우리는 뼈를 깎는 수술의 고통을 겪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래전부터 이 경제 위기가 올 것을 예측하고 있었으며, 적절한 처방 또한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은 저를 믿고 경제 회복의 그 날까지 생업에 종사해주시기 바랍니다.”
내 최대의 과업이 될 경제 문제.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의 목을 졸라매던 국제 금본위제가 파괴되었고, 이는 독일 경제당국의 운신의 폭을 조금이나마 넓혀주었다.
뉴딜 정책과 유사한 케인지언식 대대적 경제 부양책.
그리고 샤흐트에게 전권을 준 뒤 메포-벡셀 채권 발행.
거기에 얹어서 재무장.
경제는 언제나 신뢰가 있어야만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아르민 로젠바움이란 이름은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어마어마한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는 브랜드가 있고, 이를 이용하면 더 빠른 경제 재건이 가능할 터.
“하지만, 공화국의 위기는 고작 경제뿐만이 아닙니다. 경제 위기가 이 나라 독일의 피부병이라면, 진짜 병! 진짜 암은 따로 있습니다!
우리의 조국 독일을 멸시하고, 번영보다는 혼란을 기원하고, 조국의 멸망을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겠다고 선서한 반역도당들이 여러분의 좌우 앞뒤에 가득합니다! 이들이 국회의사당에 앉아 입법을 가로막고 가래침을 뱉고 저열한 욕설을 내뱉으며 모든 것을 마비시켰습니다.
이들이 바로 나라를 망쳤습니다.”
그 어떠한 정치적 수사도 없는 선동적 어조에 대중들은 물론 내빈들조차 모조리 얼어붙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간단합니다. 의사 10명을 불러다 앉혀 놓고 진단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가장 많은 의사가 내미는 진단이 가장 좋은 것이리라 믿고 이에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를 보십시오.
의사 10명 중 네 명이 팔짱을 낀 채 ‘나는 이 환자가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수결은 번번이 부결되고 환자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직장은.
여러분의 가정은.
이 의사 아닌 장의사들에 의해 지금 무덤에 들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저편에 있던 나치당 관계자들이 발작하기 시작했지만, 대기 중이던 경호원들에 의해 제압당했다. 아주 좋다. 더 그렇게 날뛰어 달라고.
“이제 이 거짓 의사들을 몰아내야만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공화국의 적이 의원으로 앉아 있는 현실을 단호히 배격하고, 이들을 모조리 의회에서 추방해야만 한다고 여러분들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무리 올바른 처방전을 끊는다 하더라도, 저자들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당리당략과 역심으로 가득 차 그 어떠한 처방전도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화국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에 따라, 저는 긴급조치로서 공화국의 적이자 반역도인 공산당과 나치당의 모든 법적 권리를 부정하는 바입니다.
공화국 헌법이 마찬가지로 제게 부여한 권한에 따라, 저는 의회를 해산하고 즉각 새로운 총선을 열 것을 선언합니다.
저는 새로운 정당, <독일민족혁명당>의 창당을 선언합니다!
국민 여러분.
저와 제 친구들이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힘을 모아주십시오!
1년에 선거를 다섯 번 해야 하는 이 끔찍한 현실을 끝내고 제대로 된 국정 운영이 가능하도록 여러분의 힘을 모아주십시오!!”
다시 한번.
거대한 환호가 터져나왔다.
- 지금 실시간으로 다른 당 사람들 표정 썩어들어가는 거 안 보이나? 나치 놈들은 어쩌고!
썩으라면 썩으라지.
심심하면 연정이다 뭐다 짝짓기철 개나 고양이처럼 들러붙고 깨지고를 10년 넘게 했다.
모든 독일인들은 지금 그냥 정치혐오가 가득 차 있다.
매년 선거가 몇 차례씩 있는 이 꼬락서니에 넌더리를 내고 있다.
지금이 아니면 못 한다.
- 나치는? 공산당은?
폭발하겠지.
이래도 폭발 안 해? 이래도?
이래도 반란 안 일으킬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