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90화 (90/103)

잿더미 밖으로 (3)

소비에트 연방의 수도이자 세계 공산주의의 심장 모스크바.

그중에서도 가장 깊고 깊은 곳, 크렘린 궁전엔 세계 만마 빨갱이들을 다스리는 지배의 악마, 이오시프 스탈린이 살고 있다.

자본주의 국가들이 모조리 대공황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재난을 맞이해 셀프 고꾸라짐 현상을 선보이는 지금.

<5개년 계획>이라는 놀라운 경제 정책을 통해 매일매일 러시아 역사를 갱신하며 힘차게 산업화, 근대화의 기치를 치켜 올리는 소련과 공산주의야말로 최후에 살아남는 승자가 되지 않을까?

“동무들은 눈이 없나, 귀가 없나, 아니면 머리가 없나.”

그런 끝없는 희망과 자부심과는 별개로, 스탈린은 냉정하다 못해 무자비하리만치 부하들에게 가혹하게 말했다.

“독일의 로젠바움이 구축한 건 누가 봐도 전제적 독재정권이잖은가.”

“하지만, 그는 보통 선거를 통해 총선과 대선 모두에서 승리했습니다. 저만한 승리를 거두었으면 으레 있는 권력의 집중 아니겠습니까?”

“다들 왜 빤히 보이는 개수작에 넘어가는지 모르겠군. 혹시 우리가 혁명할 때 어디 술집에서 잠만 자고 있었나?”

이미 그가 권력을 꽉 쥐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백정 짓을 해본 사람만 할 수 있는 공감의 일종인가.

어떤 이유에서건, 스탈린은 부족한 근거를 깡그리 무시하고 직관을 통해 진실에 도달했다.

“로젠바움 그룹은 혁명을 위한 돈줄, 자금원 역할. 그 시민단체니 뭐니 하는 것들은 혁명의 전위 세력.”

“혁명가라고 칭하기엔 그는 출신이 황실에 부역한 자본가지 않습니까?”

“수십 년에 걸쳐서 그를 가로막던 적들은 사분오열되었고 자신의 세력은 공고히 했어. 그리고 집권한 이후엔 신기하게도 적들이 알아서 내란을 일으켜주고, 거추장스러운 놈들은 픽픽 총에 맞고 죽어나가.”

이득을 보는 자가 곧 범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순전히 본업만 열심히 했더니 어부지리로 집권하는 이가 없지는 않겠지.

하지만 집권한 뒤에도 오직 그에게만 이로운 일이 연속해서 일어난다면?

“서기장 동지의 혜안이 실로 놀랍습니다.”

“탄압을 피해 천신만고 끝에 모스크바로 온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로젠바움은 이미 1919년 당시부터 공산당에 대단히 적대적이었으며 지속적으로 반-공산당 활동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레닌 동지께서도 아르민 로젠바움은 이상주의적이고 온정주의적이지만 우리와는 함께할 수 없는 개량주의자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열심히 그를 칭송해대는 무리들의 아첨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스탈린은 더욱 골똘히 고심했다.

대중을 선동해 권력을 쥐고, 그 권력을 공고히하기 위해 정적과 반대자들을 죽였다.

그렇게 죽이고 또 죽인 끝에 쥔 권력으로.

로젠바움은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는 민족주의적 정서에 호소해 집권한 만큼, 추후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유럽에 전쟁 위기를 몰고 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입니다.”

“실제로 징병제 재도입을 선언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내세운 구호 중에선 평화와 안정 또한 있습니다. 몇십 년간 살아온 행적이 모조리 위장이 아니고서야 그가 평화주의적 성향이라는 건 확실해 보입니다.”

독일과 소련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딱히 좋을 일이 없었다.

“독일이 영국, 프랑스와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면 이는 곧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내분을 뜻하니 우리에게 이익. 이미 독일과 이탈리아의 관계가 뒤틀리고 있으니, 저들이 자중지란을 일으킬수록 우리에게는 득이 될 것이오.”

소 닭 보듯.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되리.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은 독일에서 보낸 밀사를 맞이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정해야 했다.

“더 강력한 협력?”

“그렇습니다. 로젠바움 대통령께서는 독일과 소련 두 나라가 모든 분야에서 서로 협력하며 좋은 관계를 구축할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공산당을 잔혹하게 짓밟은 이를 우리가 어찌 믿을 수 있겠소?”

“그들이 국가를 흔들려고 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조치를 취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중요합니까?”

사실 전혀 중요치 않았다. 독일 공산당이 뒈져 나가든 말든.

‘독일 공산당 타령하면서 개수작 부릴 거면 판 엎자’라는 시그널을 접수한 스탈린은 그 순간 곧바로 그들의 존재마저 머릿속에서 싹 지워버렸다.

“그래서, 무역을 더 자유로이 하자? 아니면 비밀 협력을 더 강화하자?”

“그 모든 것을 다 포괄할뿐더러, 우리는 그 이상을 원합니다.”

그 이상이라.

독일과 소련이 협력할 만한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폴란드로군.”

그리고 인간백정 스탈린은 그게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

세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아니, 적어도 독일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래.”

“이야. 이 시간에 이렇게 광장이 조용한 건 몇십 년 만에 처음 같은데.”

당연히 베를린 한복판의 광장이니만큼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피켓과 플래카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깡패도 보이지 않았다.

항상 광장은 무언가 정치적 요구를 하러 뛰쳐나온 시위대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당연한 일이었는데, 오래간만에 광장 상인들은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 바깥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 개 같은 데모꾼들 없어지니까 이렇게 좋은걸.”

“이제 싹 다 해체한다지?”

“다 잡아 처넣어야 돼. 빌어먹을 놈들. 군대를 안 가니까 발랑 까져가지고 헛소리나 주워섬기는 거잖아.”

“이제 다시 징병제도 부활한다니까 다 군대 보내면 되겠네.”

“그렇고말고. 요즘 군대가 어디 군댄가? 참호에서 시궁쥐랑 뒹굴면서 파리 목숨 취급 받는 것도 아닌데 그걸 못 가겠다고 징징대면, 어휴.”

총리 겸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의회의 과반마저 거머쥔 로젠바움 정부는 가장 먼저 모든 무력 조직을 강력하게 옥죄기 시작했다.

[모든 무장조직 해산 명령]

[이제 정치깡패의 시대는 끝났다! 시민들이여, 자유를 맞이하라!]

반역자들로 낙인찍힌 나치 돌격대와 공산당 전위대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흑적금국기단>이니 <철모단>이니 모든 조직이 일제히 해산 명령을 받았다.

각 정당이 부리던 이러한 조직들은 당연히 반발하려 했으나.

“이대로 해산합시다.”

“하지만-”

“어차피 조직원들이 전부 형제단으로 넘어가고 있는데 어쩌겠소?”

한몫 잡고 싶은 기회주의자, 그냥 삼시 세끼 밥이나 얻어먹고 싶은 한량, 잘 모르겠고 아무튼 주먹이나 휘두르고 싶은 건달패들은 모조리 형제단에 가입했다. 권력이 어느 쪽에 있는지 너무 명확하지 않은가?

형제단은 순식간에 수백만 회원을 자랑하는 초거대 조직이 되었으며, 나머지 조직은 모조리 소멸되었다.

하지만 로젠바움 정부의 그다음 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애국형제단 해산!]

[평화의 시대, 애국형제단 모든 역할을 완수하고 역사 속으로]

[로젠바움 총리 겸 대통령, <범죄와의 전쟁> 선포. 사회 기강 확립과 법질서 회복을 위한 총력전 개시]

놀랍게도 로젠바움은 자신이 거느린 조직조차 해산 대열에 합류시켰다.

“로젠바움은 진짜다. 다른 정치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완장만 바꿔 차고 무단취식에 술주정에 행패 부리던 새끼들, 꼴 좋다!”

“로젠바움, 그는 신이야!”

형제단 완장만 차면 권력의 단꿀을 빨며 호의호식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깡패들은 완장 대신 <저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목판을 목에 건 채 끌려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심각한 수준의 악질까진 아니라고 판명된 이들은 구치소 맛을 잠깐 본 뒤 ‘재판 갈래? 군대 갈래?’의 선택지를 접하게 되었다.

형제단마저 해체 수순을 밟자 군부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행복해했지만, 그 행복을 편안히 즐길 수 있는 이들은 몇 되지 않았다.

“군복 벗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겠나, 아니면 한직에 처박히겠나?”

“이런다고 후배들이 명령을 들을 것 같습니까? 젝트 장관! 당신은 지금 망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보게, 블롬베르크. 세 번째 선택지도 있다네. 히틀러와 한패가 되어 반역을 시도한 혐의로 총살당하는 거야.”

“······살려만 주십시오. 죽고 싶진 않습니다.”

블롬베르크와 라이헤나우를 위시한 군부 내 친나치 세력은 모조리 도려내졌다.

그 대신, 군부 내에서의 ‘정치적 중립’ 규정은 독일민족혁명당에 한해서는 예외로 처리되었고 민족혁명당 입당은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했다.

“하일 로젠바움! 역사책을 아무리 읽어도 독일 민족을 영도하던 이들 중 로젠바움 대통령 각하를 따라잡을 이는 없었습니다. 군부는 로젠바움 대통령을 결사옹위하여야만 하며-”

“만슈타인. 그만 좀 딸랑거려.”

“딸랑거린다니! 국가와 민족, 당을 향한 나의 충심이 그만큼 어마어마하단 거지!”

슬슬 진급과 출세가 고픈 중간 관리자급, 영관급들이 가장 빠르게 민족혁명당의 문을 두드렸고, 친나치 인사로 찍힌 이들 중에서도 아직 은퇴하고 싶지 않은 이들은 더욱 누구보다 광신적인 당원이 되어 살아남고자 몸부림쳤다.

군부 전체가 젝트발 칼바람 앞에 모가지가 날아가기 싫어 자라처럼 목을 움츠린 상황.

로젠바움 정부는 다음 수에 착수했다.

“정부는 안심하고 밤길을 나다닐 수 있는 독일을 만들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성과 또한 훌륭하다고 자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강력한 힘을 기울여 만든 일시적인 성과에 불과하며, 범죄는 언제나 으슥한 곳에 피는 독버섯처럼 자연스럽게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특히, 나치당과 공산당이라는 양대 반정부세력은 여전히 그 뿌리가 남아 있어 우리 사회를 파괴하기 위해 암약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나 스페인, 이탈리아 등과 마찬가지로, 우리 독일 또한 국가헌병대 조직을 신설해 각 지방자치단체가 개별적으로 맞서기 힘든 거대한 범죄, 그리고 반역자들을 상대로 체계적인 대응조치를 만들고자 합니다.”

국가헌병대 조직 창설.

그동안 형제단을 치안 유지 목적으로 싼맛에 저렴하게 막 굴려 왔지만, 그 형제단을 해산시킨 지금 이를 대체할 만한 조직을 갖춰야 한다는 논리는 매우 현실적이었다.

게다가 암살과 테러, 방화와 국가 전복 시도가 여전히 잔존하고 있는 지금, 단순한 경찰력 강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 또한 대중들의 동의를 구할 만한 이야기였다.

아니, 사실 대중들은 그 국가헌병대가 창설되네 마네보단 그게 창설되면 나랏밥 먹는 일자리가 더 생긴다는 게 훨씬 중요한 문제였다.

의회에서는 갑론을박이 이어졌지만, 저항은 미미했다.

“로젠바움의 행정독재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국가헌병대가 왜 필요합니까? 그냥 경찰력을 증원하면 되지 않습니까?”

“의원님. 무슨 헛소리십니까. 대통령 각하께서 무력을 원하셨다면 그냥 수백만 형제단을 그대로 거느리셨겠지요.”

“비정상을 정상화하려는 절차에도 독재니 뭐니 트집을 잡다니! 이러니까 의회가 싸움만 하려 한다는 비아냥을 듣는 겁니다!”

로젠바움을 향해 무어라 공격을 던져봤자 ‘그래서 애국형제단 포기한 사람에게 무슨 망언이지?’라는 무적의 방패가 있는 지금.

국가헌병대 설립안은 당연히 통과되었다.

그다음은 실무적 절차였다.

“젝트 장관. 국가헌병대 창설에 협조해주셔야겠소.”

“대통령 각하. 한 가지 여쭤봐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입니까.”

“이 국가헌병대라는 조직은··· 군을 견제하기 위함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로젠바움은 젝트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

“군부에서 형제단을 불편하게 여겨서 해체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식구였어요. 내겐 내 식구들의 밥그릇을 챙겨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

“그리고 하나 더. 젝트 장관님 당신도 심심하면 쿠데타 때 문민정권을 상대로 공갈을 쳤잖습니까?”

“그, 그건. 빨갱이들이라-”

“내 별명이 빨갱이 자본가인 건 기억하시죠? 내가 어떻게 믿습니까?”

“군부는 로젠바움 각하를 모시기 위해 존재합니다. 부디 두려운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로젠바움은 납작 엎드리는 젝트를 보고 피식 웃었다.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장관님이나 참모총장을 비롯해 믿음직스러운 사람들이 떠난 이후의 군부는 솔직히 믿지 못하겠습니다.”

“······.”

“군부는 원죄가 있습니다. 시시때때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그 쿠데타를 진압 못 하겠다며 정부를 협박하던 원죄 말입니다. 문민정부의 수호를 위해,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국가헌병대 설립은 필수적입니다.”

그 원죄를 저지른 피고인 젝트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준비를 하겠습니다.”

“뼈대는 형제단의 핵심 멤버들을 그대로 쓰되, 유사시에는 전선에도 투입이 가능하도록 육군의 인재들을 보내주시면 되겠습니다.”

“예. 명칭은 그대로 국가헌병대··· 입니까?”

“그러면 너무 프랑스 베낀 티가 나서 기분 나쁜데.”

로젠바움은 깍지를 낀 채 말했다.

“그 목적에 충실하게, <공화국 수비대>로 이름 붙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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