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강의 기적 (4)
“로젠바움 대통령 만세!!”
“로젠바움! 결사옹위!”
“우리 손으로 뽑은 대통령 우리가 지키자!”
“조국을 지키자!! 적들을 찢어 죽이자!!”
“우리는 베르사유의 멍에를 거부한다!! 우린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독일 전역은 분노로 넘실거렸다.
이탈리아의 내전 개입이 겨우 1년 전인데, 또다시 강대국에 의한 공갈협박을 당하고 말았다.
전쟁 전만 하더라도 영국과 세계 패권의 주인 자리를 놓고 다투던 나라가 어째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로젠바움 대통령은 그 협박을 했다는 국가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세상에 독일을 상대로 그딴 저열한 공갈을 칠 만한 싸가지와 실력을 겸비한 나라가 프랑스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물론 떠오르는 다크호스 이탈리아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나라였지만, 이탈리아는 군축 회담에 참석해 놓고 정작 ‘군축 같은 거 왜 함?’이라는 트롤링을 일삼고 있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일절 맞다 아니다를 논하지 않았지만, 로젠바움 그룹의 영향을 짙게 받는 언론사들 중 상당수는 ‘그 나라’의 정체가 프랑스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해외 언론들조차도.
[프랑스는 군축 의지가 있는가?]
[달라디에 정부의 비상식적인 외교 정책 어디로 가는가]
[협박외교가 자행되는 유럽 대륙!]
이러한 선정적 보도는 다시 독일로 역수입되어 ‘역시 프랑스가 범인 맞네’라는 결론을 도출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나는.
- 조작했지?
아니라니까.
- 투표율 99%에 득표율 98%가 조작이 아니라고? 네 밑의 부하들이 알아서 장난질 친 게 아니라고 확신해?
글쎄. 사실 조작을 하는 게 더 멍청한 일 아닐까. 적어도 내 생각으로, 당연히 내가 압도적으로 승리할 선거를 만들어놨는데 여기서 또 조작을 하는 것만큼 등신 같은 짓거리는 없다.
일단 국민투표의 문항부터가 대놓고 1번을 찍으라고 하고 있다.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전국민의 증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연이은 개입.
그것들이 폭로된 와중의 국민투표.
여전히 독일의 매운맛에 익숙하지 않은 조스비를 위해 알기 쉽게 풀이하자면, <베르사유 조약을 준수한다>라는 기호 2번은 <을사조약을 준수한다>와 거의 비슷한 느낌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정부는 잘하고 있다!!”
“정부는 즉시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라!!”
“정부는 즉시 영국과 프랑스가 조종하는 국제연맹을 탈퇴하라!!”
압도적 지지.
전국민적인 열기.
십수 년을 참아 왔던 분노가 애국의 깃발과 함께 일제히 폭발했다.
그리고 나는 은근슬쩍 저 국민투표에 내 신임투표를 끼워넣었지만, 아무튼 독일 국민들은 압도적인 지지로 내게 전권을 위임해주었다.
그래.
이게 핵심이다.
다음 대통령 선거 때까지 나는 압도적인 권력을 허가받았다.
‘다음 대통령 선거’라는 문구를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조용히 슬쩍 없애면 영구적인 집권 완성.
모든 게 착착 맞아떨어졌다.
여기까지 왔으면 이제 틀림없이 더 이상 참지 못할 놈들이 튀어나올 차례인데.
과연 이 압도적인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해 칼을 뽑아 들 놈들이 얼마나 있을까?
***
군축을 둘러싼 1932~3년 외교전은 이미 시작부터 그 싹수가 노랗다 못해 썩어 문드러졌다.
대공황의 심마를 이기지 못하고 주화입마에 걸리고 만 일본은 흑화해버려 만주를 침공해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국제연맹은 경악해서 즉시 만주국을 해체하고 너희 땅으로 돌아가라고 했지만,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는 것으로 응수했다. 당연히 군축이고 뭐고 조까라였다.
일본이 대공황에 미친 이오리 모드가 되자 당연히 미국이 경악했고, “우리 깔끔하게 모든 전함, 탱크, 항공기, 잠수함, 독가스 전부 1/3 날려버리죠”라고 제안했던 후버 대통령도 퇴임하자 미국도 군축 같은 한가로운 소리를 집어치웠다.
유럽의 트롤러 두체 무솔리니는 군축 회담에 참가하긴 했지만, 시종일관 ‘너희는 군축해야 하지만 영프에 의한 피해자인 이탈리아는 군을 증강해야만 한다’라는 기적의 논리로 회담에 임했다. 무솔리니의 군사 증강은 회담 중에도 계속되었다.
여기에 더불어 소련 또한 ‘혁명 직후에 너희가 우리 침략해놓고 무슨 군축임? 지랄 자제 좀’을 외치며 군축 조까를 선언하니, 자연스럽게 그 소련과 국경을 맞댄 폴란드가 발작하고, 폴란드가 발작하니 체코를 비롯한 국가가 연쇄작용으로···.
이 와중에 독일이 최후의 막타를 날렸다.
[독일, 국민투표 결과 찬성 98%!]
[독일 정부 “민심 수용해 새로운 외교 정책에 나설 것”]
[독일의 새로운 3불(不) 정책. 비무장 거부, 군축 거부, 베르사유 조약 거부!]
[독일 국가방위군, 명칭 독일 국방군(Wehrmacht)으로 변경. 전 국민 대상으로 한 징병제 시행 방침.]
이제 독일은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그리고 예고했던 대로, 독일 대표단이 제네바에서 철수하면서 그들은 군축 회담 포기를 공식화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자 프랑스 정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누구 마음대로 전쟁을 거론한단 말입니까, 총리!”
“나는 전혀 들은 바도 없고, 지시한 적도 없습니다.”
“그럼 외교부 장관이 해명하십시오! 어찌 된 영문입니까!”
외교 대참사.
프랑스의 이번 외교 플랜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영국을 끌어들이고 동유럽 국가들을 다독여 독일을 압박한다’였다.
‘우리는 지금 도저히 군비를 증강할 여력이 없다.’
‘그러니 다른 나라도 군비를 증강하게 둬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
그리고 비슷한 처지의 영국과 손을 잡는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실제로 영국은 ‘독일에게 일정 수준의 군비는 허락해줘야 하지 않을까?’라고 마지막까지 갈등했지만, 마침내 프랑스는 그 영국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결국 돈이 없다는 현실이 영국의 결정을 떠민 셈이다.
그렇지만 결과만 놓고 봤을 때, 독일은 프랑스의 압박에 대해 세 번째 손가락을 치켜드는 것으로 응수했다.
이제 프랑스에게 남은 선택지는 순식간에 좁혀지고 말았다.
조약 위반을 빌미로 군대를 일으킬 것이냐.
아니면 입을 다물 것이냐.
“총리! 해명하세요! 지금 독일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자, 이게 정말 총리의 발상입니까? 당신네들의 당론입니까!”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 저는 전혀 들은 게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 독일이 우리를 음해하고 있단 뜻입니까?”
“현재 독일 정부는 자신들에게 압력을 행사한 국가를 명시하지는 않았기에-”
“말장난에 불과하잖소!”
이미 대규모 뇌물 수수 스캔들로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던 프랑스 내각은 독일발 쇼크로 인해 마침내 붕괴하고 말았다.
프랑스 내각이 무너지거나 말거나, 독일의 파천황적인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독일 로젠바움 대통령, “평화를 위한 최소한만 재무장할 것.”]
[“국제연맹 탈퇴가 세계 평화를 해치겠다는 의사 표명은 아니다. 국제연맹이 세계 평화를 해치고 있기 때문에 탈퇴하는 것.”]
98% 지지율을 마검처럼 휘두르는 로젠바움 정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노련한 외교관들이 <프랑스군이 독일 국경을 넘는 것 외의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독일의 군비 확장 시도를 저지할 것>이라는 특명을 받고 분주히 움직일 때.
독일은 그들보다 한 수 더 빨리 움직였다.
[독일-폴란드, 전격적인 정상회담!]
[로젠바움 독일 대통령 바르샤바 극비 방문!]
[중부 유럽의 판도, 어떻게 변화하는가?]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어떻게 독일에게 외교적으로 휘둘릴 수가 있냐고!!”
“폴란드가 이탈하면 대체 독일을 어떻게 포위하겠단 거지? 외교부는 뭐 하고 있습니까!”
프랑스는 이번에도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
신생 폴란드 제2공화국의 정치는 독일과 비슷하게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독일보다 나은 것인지 더 개판인지 모를 점은, 소련-폴란드 전쟁의 영웅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실상의 독재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
독일에서 내가 사실상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폴란드는 오래전부터 피우수트스키를 정점으로 하는 독재 체제를 구축해 놓았고, 이런 점에서 보자면 폴란드는 독일의 선배나 다름없었다.
아, 물론.
나는 군부 쿠데타 같은 멍청하고 우악스러운 짓 같은 건 안 한다. 훨씬 세련되고 민주적이지.
- 못 한 거지. 군인 출신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칩시다.
“명성 드높은 로젠바움 대통령을 이리 만나게 되는구려.”
“저 또한 반공의 영웅 피우수트스키 원수를 만나게 되어 대단히 반갑습니다.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폴란드인에게 가르침이라?”
“국가를 통치한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습니까.”
피우수트스키는 바지 대통령을 세워놓은 채 총사령관직을 꽉 잡고 국가를 뒤에서 다스렸다. 정말 루덴도르프가 연상되는 무식한 통치 기술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그런 사적 감정보다는 일이 훨씬 중요한 법.
이미 독일과 폴란드 외교 관계자들은 거의 조율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저는 당선 직후부터 폴란드와의 관계 개선을 도모했고, 실제로 통상 조약을 체결해 그 결실을 보았습니다. 유럽의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서는 과거는 가슴에 묻은 채 자유무역에 근간한 경제적 번영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독일의 전향적인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소. 하지만, 입으로는 평화를 부르짖으면서 정작 독일이 그토록 군비를 확장한다면 이웃한 우리로서는 당연히 불안해지지 않겠소?”
이미 다 이야기 끝난 것 아니었나? 외무부 장관을 불러 빠따라도 쳐야 하나? 와서 웃으면서 사진 한 장 찍고 도장 쾅 찍고 ‘친해지길 바래’ 한 번 과시해주고 가면 되는 줄 알았는데.
나는 고민하는 대신 늙은 군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원수께서는 총부리를 맞대고 서로 죽고 죽이던 소련과도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셨습니다. 전쟁터에 나가본 사람만이 평화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지요. 저 또한 전쟁의 끔찍함을 몸으로 체감했던 만큼, 국가를 지키기 위한 적절한 수준의 무장 이외엔 결코 군비를 과도하게 증강시켜 전쟁 위험을 부풀리지는 않을 겁니다.”
“말로는 무슨 이야기든 거창하게 떠들 수 있지.”
“그런 의미에서, 독일과 폴란드 또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 유럽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웃기지도 않는 군축 회담보다 훨씬.”
이게 본론이자 핵심.
폴란드는 프랑스가 전혀 전쟁을 할 마음이 없다는 걸 깨달아버렸고, 이 새끼들이 마지노선이나 신나게 공구리질 치면서 존버할 작정이라는 걸 알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폴란드가 기대하던 그림은 <독일이 프랑스를 패던 사이 백도어를 감행하는 폴란드>였지, <폴란드가 독일에게 개처럼 처맞는 사이 백도어를 때리는 프랑스>가 아니었다. 그래서야 전쟁에서 이긴다 쳐도 폴란드는 잿더미만 남잖은가.
그 고민의 결과물이 바로 이번 회담이었다.
더 이상 프랑스 코인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2중 3중의 안전망을 만들어 두겠다는 것. 아주 올바른 발상이다.
“우리 독일은 폴란드에 더 많은 투자를 해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우리 농산물이 귀국에 더 많이 팔릴수록 우리의 관계도 돈독해질 것이오.”
“또한, 최근 각국에 팽배해지는 반유대주의에 대항해서-”
아 물론.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상대로 한 공수동맹을 협상 중이라는 건 당연히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