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98화 (98/103)

공화국 멸망 (3)

베를린.

공화국 수비대 청사.

공화국 수비대 사령관 오스발트 뵐케는 의자 목받침에 대가리를 기댄 채 입가에서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를 빤히 응시했다.

정치는 너무 머리 아팠다.

그리고 권력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나치와 공산당을 때려잡는 임무는 차라리 즐거웠다. 그들은 명백한 국가와 민족의 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새롭게 떠오르는 내부의 적은···.

“사령관 각하.”

“아, 오셨습니까.”

헤르만 호트(Hermann Hoth) 참모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그의 상념은 순식간에 조각조각났다.

“명령하신 대로 전 병력의 휴가와 출타를 제한했습니다.”

“참, 어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는 국가와 민족을 지키는 최후의 방패입니다. 사령관. 마음을 단단히 먹으십시오.”

아르민 로젠바움과의 인연은 당연히 뵐케가 압도적으로 길다. 언제 고꾸라질지 모르는 엔진 얹은 날틀을 타고 함께 날아다니며 프랑스의 하늘을 누비던 사이 아닌가.

하지만, 로젠바움주의(Rosenbaumismus)에 대한 신념과 믿음으로 따지면 호트는 A+ 우등생이었고 뵐케는 낙제를 간신히 면한 C-쯤에 속했다. 도저히 그 사람 좋던 로젠바움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기엔 그에게 남아 있는 내적 친밀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공화국 수비대는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그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다.

2개 사단이라는 대군이 이번에 라인란트에 주둔하게 되었고, 수도 베를린에 항시 주둔하고 있는 1개 사단급 병력까지 합하면 벌써 1개 군단에 육박한다. 여기에 각지에 수사를 위해 암약하고 있는 이들까지 합하면 재무장 선언 이전 육군 규모에 달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 가파른 증강 속도는 당연히 원판인 형제단이 워낙 거대한 조직인 탓도 있었지만, 그 외의 이유 또한 숨겨져 있었다. 아니, 모두가 다 알았다.

“대통령 각하의 경호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각하께서 완강히 거부하셨습니다.”

유사시.

정말정말 유사시.

쿠데타를 일으키는 변란 세력을 상대로 정부를 지킬 이들은 오직 공화국 수비대뿐이다. 베를린 근위연대는 의장대니까 제외하고, 무장경찰들 또한 결국은 비전투원인 경찰에 불과하니··· 정말로 군을 막을 전투 조직은 오직 그들뿐인 셈.

“참모장님.”

“예.”

“저는 대전쟁 이후로 바로 전역했지만, 참모장님께선 훨씬 오랫동안 군에 몸을 두지 않으셨습니까?”

호트는 뵐케가 무엇을 묻고자 저렇게 긴 서두를 끄는 건지 더 듣지 않고도 알았다.

“제가 군에 조금 더 마음이 가지 않을까 싶으십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품을 수 있는··· 의문이라고 봅니다.”

‘의심’이라는 단어를 꺼내려던 호트는 꺼림칙함을 삼키고 보다 둥근 표현을 사용했다.

“저는 오래도록 이 나라의 운명, 그리고 군의 역할에 대해 고민해 왔습니다. 물론 군인은 엄정 중립을 지키는 것이 마땅하나, 한 명의 독일 사내로서 고민을 안 할 수도 없었던 노릇이니까요.”

“누가 고민조차 금하겠습니까. 하하.”

“처음 저는 로젠바움 각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대놓고 말하자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거나 아니면 위선자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런 사람 아닙니다.”

“압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간증을 해나가는 호트의 눈엔 어느새 신앙심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분께서는 참된 애국자셨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나라가 끝없는 다툼을 끝내고 다시 부강해질 수 있는지 수십 년간 탐구하셨겠지요. 저 야만스럽다 못해 흉폭하고 잔인한 야수 러시아인의 볼셰비즘도, 영국과 프랑스 같은 놈들이 멋대로 이 나라에 심어버린 저주받을 민주주의도 아닌. 바로 우리에게는 제3의 길, 로젠바움주의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고심이 크셨겠습니까?”

“그, 그런가···.”

“하나의 국가엔 하나의 민족이 있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가족인 국가엔 당연히 가장이 필요합니다. 로젠바움 각하야말로 수천만 독일인의 어버이가 될 자격이 있는 이 시대의 초인이십니다.”

어차피 각하를 음해하는 무리들이라 해봤자 태반이 기득권 놓기 싫어 발악하는 융커들 아닌가.

윗대가리들이 죄다 정치놀음과 권력싸움에 미쳐 헛짓거리나 일삼는 육군보다 아예 최첨단 기갑 부대의 첨병이 될 공화국 수비대로 갈아탄 그의 입장에선, 이번 기회에 아예 육군의 코가 한번 으스러지면 차라리 속이 싹 개운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슈타지, 그 음침한 놈들에게 공적이 밀릴 순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남 뒷조사나 하고 다니는 놈들보단 그들이 낫지 않겠나.

결국 대통령은 친위부대인 그들을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으리라.

뵐케와 호트 모두 그 점에선 의견이 일치했다.

그들은 조국과 정부를 해치려 드는 그 모든 적을 물리치리.

***

간혹 존재 자체를 망각하는 경우가 잦지만, 독일 공화국에도 엄연히 해군이라는 군종이 존재하긴 했다.

“우리는 버려진 신세군.”

그리고 해군의 수장 에리히 레더(Erich Räder)의 탄식처럼, 그들의 처지는 로젠바움 정부 들어서도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더 악화되었을지도 모른다.

레더는 극도로 보수적이었으며, 카프 폭동 당시 가장 빨리 쿠데타군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가 좌천당할 만큼 군국주의적인 인물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 직후 열린 만찬에서 ‘빌헬름 2세를 위해 건배’를 제안해 한바탕 난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로젠바움 정권에 대해서는 굉장히 애매모호한 반응을 보였다.

분명 빨갱이들처럼 대중에 호소하는 전략을 써서 당선됐지만, 그는 전쟁영웅이자 항공기의 발명가였다. 육군과는 쉴 새 없이 으르렁댔지만 해군과는 제법 괜찮은 관계였지 않은가?

군을 반동 반란 소굴쯤으로 취급하던 에베르트 전 대통령이나, 뼛속까지 육군 그 자체였던 힌덴부르크에 비하면 해군의 처지가 훨씬 나아질지도 모른다. 레더는 그렇게 믿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완벽하리만치 배신당했다.

“죄송하지만 해군에 과다한 투자를 할 수는 없습니다.”

“각하. 부디 저희의 설명을 들어주십시오. 강한 해군의 육성 없이는 독일의 미래도 없습니다!”

“저는 티르피츠 제독님과도 호흡을 맞추어 오래도록 일했었습니다. 해군의 중요성을 결코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솔직하게 터놓고 말씀드리지요. 나라에 돈이 없습니다.”

어설프게 아는 놈이 더 무섭다더니, 로젠바움이 딱 그 짝에 해당되었다.

어뢰를 탑재한 뇌격기니 육상 발진 항공기를 통한 적 함선 공습이니, 전부 항공 쪽 이야기만 떠들 뿐 제대로 된 해군력 강화에 대해선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면 항공모함이라도 뽑아주려나 싶었지만 그것조차 아닌 듯했다.

전함 진수에 관해선 “우리가 전함을 만들 설계 역량이 남아 있습니까? 차라리 영국에서 사오는 건 어때요?” 같은 소리나 해 그가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면 차라리 좋다. 어차피 해군은 늘상 이런 취급이었으니.

하지만 그는 한술 더 떴다.

“해군에 별도 예산을 할당하겠습니다. 아주 비밀한 곳에 써야 하는 예산인데··· 이걸 해군에 투자한다는 명목으로 잡을 수 있겠습니까? 내 언젠간 해군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코드네임 <맨해튼>이라는 정체불명의 프로젝트에 예산을 보내는데 해군 명의를 써먹겠다니. 지금 누구 염장 지르는가? 딱 봐도 뒷주머니를 차기 위한 허접쓰레기 같은 가라 프로젝트가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받아들였다.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는가. 지지율 98%면 반신, 파라오, 차르, 카이저인데.

그런 의미에서.

레더는 몇몇 장교들이 나치즘에 심취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로젠바움주의에 심취하든 나치즘에 심취하든, 공산당 빨갱이만 아니라면 무슨 헛짓거리를 하든 그의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그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지 알았다면, 아마 레더도 말렸을 것이다.

***

1933년 말.

“지금 당장 독일을 공격해야 합니다.”

“재무장 전인 지금이야말로 독일을 응징할 천금 같은 시간입니다!”

프랑스 군부는 게거품을 물고 지금 당장 국경을 건너 독일 놈들의 머리통을 다 날려버리자고 외쳤다.

언제는 평화의 사도인 척 온갖 좋은 말은 다 떠들고 다니던 로젠바움도 결국 훈족에 불과했다.

정권을 잡자마자 순식간에 그럴듯한 독재 체제를 구축해서는 제멋대로 미쳐 날뛰고 외교까지 마구 폭주하고 있잖은가?

재무장 선언에 베르사유 조약 파기, 거기에 라인란트 재주둔까지 해버린 그 배짱은 높게 산다만, 저 정도로 노골적으로 배 째라고 덤벼들면 째줘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나는 총리 그만뒀소.”

“···얼마 전에 총리 되시지 않으셨습니까?”

“한 한 달쯤 했나?”

프랑스는 완전히 마비되었다.

33년부터 34년 1월까지 내각이 3번 바뀌는 대혼돈이 찾아왔고, 공화국 체제를 뒤흔드는 거대한 부패 스캔들이 폭발했으며, 심지어 공화국을 뒤엎으려는 극우 인사들도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이탈리아도, 독일도 해냈다.

- 레닌이, 무솔리니가, 로젠바움이 보여주지 않았나. 이제 프랑스도 이 지긋지긋한 혼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 프랑스를 살리려면 이 하수구 오물통보다 역겨운 의회부터 싹 불질러야 한다!

군부가 아무리 목청 드높여서 전쟁을 하자고 떠들어봤자 당연히 소 귀에 경 읽기.

오히려 강경하게 군사적 옵션을 외치던 몇몇 장군들은 ‘너 혹시 군대로 독일 가고 싶은 게 아니라 파리 가고 싶은 거 아냐?’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기 파리는 정말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와 혼돈이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이렇게 맛이 간 꼴을 지켜보는 곳이 있었으니.

“저 병신들! 모지리들! 지금 독일은 툭 건드리기만 하면 와르르 무너질 게 뻔한데!”

당연히 두체 무솔리니였다.

그는 열불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내부 분란으로 정신이 없는 프랑스는 백날 떠들어봐야 무응답 상태.

결국 무솔리니는 유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번에야말로 로마의 후예 이탈리아가 나서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미 이탈리아는 단단히 찍혀 있었고, 섬나라 해적 놈들 같은 멍청한 것들은 ‘이탈리아가 괜히 독일을 찔러서 재무장의 빌미를 줬다’라고 그릇된 오해나 하고 있었다.

“각하. 참으셔야 합니다.”

“영국인들이 독일을 싸돌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자극하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각하. 부디!”

여기서 또 한 건 저질렀다간 정말 영국이 무슨 개짓거리를 할지 모른다.

프랑스 침공 계획도, 유고슬라비아에 선전포고하려는 계획도, 알프스를 건너 오스트리아에 침을 바를 계획도 모조리 반대에 부딪힌 무솔리니는 대노했다.

“그러면 도대체 그대들은 어쩌란 말인가!!”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어떻습니까?”

“조국의 명예를 드높이고 옛 굴욕을 갚는 겸해서 에티오피아의 흑인들을 정복하면 딱일 것 같습니다!”

두체의 관심은 급속도로 에티오피아 침공 계획으로 급선회했다.

패전국인 독일도 재무장하는 마당에 승전국인 이탈리아가 번듯한 식민지 하나 못 가진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결국 무솔리니는 독일에 개입하려던 계획을 최종적으로 접었다.

대신 그의 계획을 자신의 후계자에게 전달했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두체가 주된 물주가 되고.

프랑스 군부의 일각이 슬며시 후원하고.

군부의 소장파와 골수 나치 지지자가 내부에서 협조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사민당 일부 인사들이 ‘로젠바움의 헌정 무력화를 막기 위한 비상한 조치’에 관한 언질을 들었을 때.

“우리는 베를린으로 갈 것이오. 독일을 거머쥐기 위해!”

<로마 진군>의 열화판 짝퉁 버전이 준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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