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
1화
“뭐야, 끝난 건가.”
손에 쥔 게임기의 화면 속에, 히든 엔딩의 클리어를 알리는 문구가 나타났다.
[아카데미의 마법사]
통칭 ‘아카마’.
마법사 아카데미를 배경으로, 세 명의 여주인공 중 한 명을 선택하는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미연시에 성장이라는 요소를 넣어 독특한 설정으로 흥미를 끌었으나, 이내 프로모션의 한계로 판매 성적도 인기도 오래가지 못한 불운의 게임이었다.
그런데 이 ‘아카마’는, 어느 날 한 유저가 커뮤니티에 올린 게시글 덕분에 역주행 바람이 불게 된다.
‘어느 미연시의 절대 클리어할 수 없는 루트’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커뮤니티의 게시글.
작성자가 게임의 소스 코드를 뜯어본 결과, 제작자가 숨겨 놓은 히든 엔딩의 존재를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히든 엔딩의 조건은 바로 어떠한 히로인도 선택하지 않은 채 게임을 진행하는 것.
미연시 장르의 게임은 필연적으로 히로인과 엮일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애초에 그러라고 만들어진 게임이다. 그런데 히로인을 선택하지 않는 루트가 존재한다니?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은 순식간에 화제가 되며 게이머들 사이에서 일종의 도시 괴담이 되었고, 많은 유저가 너나 할 것 없이 히든 엔딩을 보기 위해 ‘아카마’에 매달렸다.
그러나 결국 ‘아카마’의 히든 엔딩에 도달한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애초부터 한 명의 히로인과 이어지게 되는 게임 구조상,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 명의 히로인에게 벗어날 방법이 없던 것이다.
항간에는 처음 올라온 게시글이 낚시였고 애초에 히든 엔딩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아카마’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한참 뒤, 그러한 내용을 우연찮게 뿌리위키에서 보게 된 나는 ‘아카마’에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미연시 장르 자체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지만, 내 이목을 끌었던 건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한 게임’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게임을 시작한 지 단 일주일 만에 결국, 나는 아무도 도달하지 못한 히든 엔딩의 결말을 보게 되었다.
“고작 이걸 아무도 못 깨고 있었다니.”
말은 고작이라 하지만, 그런 거 치고 일주일이나 걸리긴 했다. 그래도 아무도 깨지 못한 엔딩을 달성했다는 사실에 으쓱해졌다.
“그나저나, 엔딩이…….”
엔딩 크레딧에서 나 홀로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주인공 ‘제이드’. 결국 그를 제외한 모든 아카데미의 사람은 안티 매지션의 침공에 의해 전부 죽어 버렸다.
“미연시에서 몰살 엔딩이라니…….”
여주인공들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는 너무 끔찍했다. 이러한 찝찝한 엔딩에서 제작사의 악취미가 느껴졌다.
“뭐, 그래도 깬 건 깬 거니까.”
나는 이내 신경을 끄고 손에 쥔 게임기를 침대 위에 내려놓은 채,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곤 새롭게 도전할 다른 게임을 찾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띠링―
띠링―
아무렇게나 침대 위에 던져 놓은 게임기에서 호출음이 들려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전원 버튼을 눌렀을텐데? 기이한 현상에 나는 황급히 침대 위로 달려가 게임기의 화면을 확인했다.
[‘아카데미의 마법사’ 히든 엔딩 달성에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진 엔딩에 도전할 자격이 충족되었습니다.]
[진 엔딩에 도전하시겠습니까?]
[▶ 예.]
[▶ 아니요.]
* 주의 사항: 진 엔딩에서는 새로운 캐릭터를 플레이하게 됩니다. 클리어에 소요되는 시간은 몇 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진 엔딩?”
그럼 그렇지. 역시 제작사가 숨겨 둔 히든 엔딩이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가만, 클리어에 몇 년이 걸릴 수 있다고?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는 뜻인가? 게다가 새로운 캐릭터?
상당히 흥미가 생기는 내용이다.
그렇게 나는 선택지의 수락 버튼을 의심 없이 눌러 버렸다. 그와 동시에 게임기에서는 백색 빛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감쌌다.
* * *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다 해진 이불과 낡은 침대, 목재로 이루어진 비좁은 단칸방. 어딜 봐도 조금 전까지 있었던 내 방, 내 집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장소에 있었던 것처럼 눈앞의 풍경이 확 뒤바뀌고 공간이 뒤틀리더니, 이렇게 돼 버린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게 현실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는 방구석에 있던 깨진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었다. 거울 속에 있는 것은 분명 ‘나’지만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딘가 낯설지 않은, 익숙함이 느껴졌다.
“가만, 이 얼굴은 분명…….”
익숙했다. 아니 틀림없었다. 지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영락없이 ‘아카마’의 등장인물 중 하나인 ‘제로’였다.
제로. 평민 출신이라 성도 없이 이름만 가진 아카데미의 학생.
‘아카마’를 다회차 플레이하면서 잊을 수 없는 캐릭터였다.
그야 극초반에 임팩트를 주며 최종 보스 내지는 흑막 같은 느낌을 풍기지만, 일주일 만에 공기화되어 버리는 맥거핀 같은 엑스트라였으니까.
“게임 속으로… 들어온 건가?”
당황했으나, 현실을 부정하진 않았다. 아무래도 이러한 전개는 소설이나 만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개였으니까. 게다가.
띠링―
〈메인 이벤트〉
[멸망의 구원자]
[히든 엔딩을 클리어한 당신은, 이제 아카데미에 다가올 멸망으로부터 모두를 구원해야 합니다.]
* 달성 조건: 아카데미를 침공 이벤트로부터 지켜 낸다.
* 실패 조건: 퇴학, 사망
* 주의 사항: 아카데미 침공 이벤트 전까지 최대한의 성장이 요구됩니다.
눈앞에 갑자기 생긴 시스템 창이,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내 생각에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범상치 않다.
“멸망……? 구원자?”
게임 속으로 들어온 것도 벅찬데, 난데없이 나보고 구원자란다.
“멸망이라 함은, 마지막 몰살 엔딩을 얘기하는 건가……? 그걸 나보고 막으라고?”
나는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내가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띠링―
[마법사 아카데미에 입학하시겠습니까?]
[▶ 수락]
[▶ 거절(사망)]
으레 미연시 게임에서 흔히 볼 법한 선택지 창. 그런데.
“거부하면 사망이라.”
선택지에 ‘선택’이 존재하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이곳에 오게 된 나는 게임 속 마법사 아카데미에 입학해야 하는 운명인가 보다.
거절 시 사망이라는 어이없는 선택지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금 이 상황은 지금까지의 지루하던 일상과는 명백히 달랐다. 아니, 이러한 비일상은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어느새 흥분으로 떨리는 가슴과 함께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수락의 선택지를 터치했다. 그러자 선택지 창은 홀연히 시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거 더 이상 미연시가 아니잖아?”
무엇이어도 좋았다. 어쨌든 지금의 나는 이 상황에 흥미가 생겨 버렸다.
* * *
아카데미 등록 날.
입구가 입학 테스트를 보러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간만에 많은 인원이 북적이는 곳에 오게 되어서인지 이런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았다.
“이번에 자제분이 입학하시나 봐요?”
“어머나, 이게 누구야? 이번에 입학하는 가문들은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네요?”
“그러게요. 이번 입학 테스트는 쉽지 않겠어요. 그래도 자제분이시라면 차석은 노려볼 만하지 않겠어요?”
“아휴,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바로 옆, 학부모로 보이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꿈도 크셔라.’
그런 그들의 대화를 나는 속으로 비웃어 주었다.
이곳 ‘칼루스 아카데미’는 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마법 아카데미다.
게다가 이번 대에 입학하는 녀석들은, 특히나 게임의 주인공 ‘제이드’를 포함해서 하나같이 사기적인 녀석들투성이다.
그런 쟁쟁한 녀석들 사이에서 차석을 노리시겠다? 꿈도 못 꿔 볼 소리지.
“응? 잠깐만…….”
난데없이 게임 속에 들어오게 되다 보니, 정작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저들이 말하는 차석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사람은… 다름 아닌 지금의 나 ‘제로’였다.
입학 테스트는 아카데미의 입구에 있는 말하는 나무 ‘수다쟁이 노멜’을 통해 진행된다.
노멜의 몸통, 나무의 중앙 부분에 뚫려 있는 구멍 안으로 손을 넣어 마나를 흘려보내면, 그 마나 보유량에 따라 입학 여부가 갈리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바로 ‘제로’가 차석이 된다는 점이었다. 수석이 아니라서 걱정되는 거냐고? 천만에.
제로는 ‘아카마’에서 주인공 제이드 다음으로 뛰어난 마나 보유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고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불운의 캐릭터이기도 했다.
게임으로 따지자면 마나 보유량은 단순히 스킬에 소모되는 MP다. 아무리 MP가 많아 봤자 스킬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이 세계의 마법사는 ‘고유 마법’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하기에, 단지 초반에 마나 보유량만으로 줄 세우는 이 입학 테스트의 차석 자리는 아무 의미 없었다.
‘그래도 고유 마법에 대한 해결 방안은 어느 정도 있을 텐데…….’
문제는 지금.
내가 차석으로 입학하게 되는 것만은 어떻게서든 막아야 한다.
원래의 ‘제로’는 이곳에서 잔뜩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나, 슬슬 학생들이 고유 마법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일주일 뒤부터 소리소문없이 공기화되어 버리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결국 마법에 적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 되어 퇴학 조치를 당한다.
‘퇴학이면… 메인 이벤트의 실패니까.’
이대로 ‘아카마’의 수순을 따라 차석이 된다면, 고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쉽게 밝혀지고 퇴학 될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퇴학 조치를 당할 시, 이곳의 나는 어떻게 될 운명인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 미래는 바꿔야겠네.”
나는 머리를 굴리며 이미 테스트를 보기 시작한 앞 순번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통과. 꽤나 괜찮은 마나를 가지고 있구나?”
“탈락. 너는 마법사 말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좋겠다.”
“탈락. 이렇게 하찮은 녀석이 어떻게 우리 아카데미에 지원하게 된 거지?”
수다쟁이 노멜은 다소 싸가지 없어 보이는 말투와 함께 입학생을 선별하고 있었다. 칼루스 아카데미의 1학년 정원은 총 200명. 이 수많은 사람 중에 고작 200명이 입학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입구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뭐, 뭐야 너? 너 버밀리온 가문의 자제구나? 역시 아버지를 닮아 훌륭한 마나 보유량이야. 당연히 통과다.”
“감사합니다.”
노멜이 극찬을 하는 상대도 존재했다.
우아하게 묵례를 하며 아카데미의 입구 쪽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붉은 로브를 뒤집어쓴 여자. 로브 밖으로 삐져나온 그녀의 분홍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루비 버밀리온이잖아?”
나는 조용히 그 이름을 되뇌었다. 주인공 ‘제이드’를 연모하는 세 명의 히로인 중 한 명이자, 7대 가문 중 하나인 버밀리온의 장녀.
게임 속에서 2D로 보던 캐릭터를 눈앞에서 실제로 보게 되니,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마냥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456번.”
마침내 내 차례가 다가온 것이다.
나는 호명과 동시에 노멜의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나무의 크기는 대략 3m 정도. 줄기 중앙 부분에는 마치 사람 같은 얼굴 모양이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게임에서 수없이 봐 와서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카마’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반복한 다회차에서, 이 녀석의 존재는 태초 마을과도 같았으니까.
그의 얼굴을 감상하며 생각에 잠겨 있자, 노멜이 퉁명스러운 어투로 나를 재촉했다.
“456번, 뭐 해? 시간 없어, 빨리 해.”
“예 예.”
노멜은 지극히 나를 깔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듣도 보도 못한 내 얼굴과 행색을 보아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나는 그런 노멜의 선입견을 무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차석이라도 된다면 오히려 곤란한 건 나였으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노멜의 얼굴 밑에 달려 있는 구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스으읍!”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호흡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