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2화 (2/175)

2화

이 세계의 ‘마나’라는 것은 몸속에 흐르는 기운과도 같다. 그리고 그 마나의 순환은 호흡을 멈춤으로써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다.

자세한 맥락은 기억나지 않는, 게임 속에서 스쳐 지나간 정보의 일부였다. 그러나 적어도 효과는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아까부터 몸속에 느껴지던 알 수 없는 기운이, 숨을 참는 것과 동시에 확연히 옅어졌다.

게임에서의 ‘제로’는 여기서 차석을 받게 된 뒤 그대로 베드 엔딩 루트를 밟아 버린다. 지금의 나는 적어도 원작의 흐름을 비틀 심산이었다.

“흐으음…….”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주둥이를 놀리던 저 빌어먹을 나무 영감이 무언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이미 얼굴이 붉게 상기되고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있는 나로서는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왜 안 통과시켜 주는 거야, 이 자식!’

벌써 1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노멜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젠 한계다.

더 이상 숨을 참을 수 없었다.

푸하아―!

나는 황급히 구멍에서 손을 빼낸 뒤 숨을 내쉬었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는 대기자들과 학부모들의 놀란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된 영문인지 궁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저 통과했나요?”

빠르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 얼른 통과 여부를 물어보았다.

‘제로’의 마나 보유량은 일반인들보다 월등히 높아서, 몸속에 남은 잔류 마나량만으로 통과하고도 남는다. 합격을 못 받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노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녀석의 수다쟁이라는 별명이 무색하게도 아까부터 말이 없는 노멜이었다.

“저기요?”

“수석.”

“네?”

“수석 합격이다.”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노멜의 입에서 나온 것은 생각지도 못한 수석 합격이라는 말이었다.

분명 호흡을 멈춰서 잔류 마나만으로 테스트에 임했다. 그런데 돌아온 합격 결과는 본래 게임보다 월등한 게 어이가 없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노멜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노멜이야.”

“예?”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에서 합격생을 선별하고 있다고.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마나의 흐름을 중지해 테스트에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겠다는 내 계획은, 노멜을 속이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자존심을 쓸데없이 건든 모양이었다.

이내 노멜은 테스트를 보러 온 모든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 녀석의 마나 보유량은 현역 마법사와 견줄 만하다! 이 녀석보다 우수한 학생은 앞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것이야. 따라서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이번 입학생의 수석은 이 녀석으로 정하겠다!”

노멜의 입에서 나온 함성은 대기하는 모든 이에게 들릴 정도로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뒤통수가 아려 올 정도로 수군대는 주변의 분위기.

이상했다. 뭔가 단단히 오해한 게 틀림없었다. 애초에 원작에서의 ‘제로’는 차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수석이라니? 이미 마나를 숨기는 것은 물 건너갔고 이렇게 된 이상 차석으로라도 돌려놔야 했다.

“…저기요? 뭔가 오해가 생긴 거 같은데 다시 테스트하는 게 어떠신지…….”

“네 녀석 몸에 잔류하고 있는 마나량만으로 충분히 측정은 끝났다. 난 내 말을 번복하지 않아.”

“무, 물론 제 마나 보유량이 높긴 해도 저보다 높은 사람이 뒤에 나타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리는 없다.”

딱 잡아떼는 노멜의 단호함에 나는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캐릭터 설정상 ‘제로’가, 아니 지금의 내가 마나 보유량이 높은 것은 맞다. 그리고 그걸 숨기지 못하고 들킨 것도 내 잘못이다.

그런데 이 뒤에는 나보다 더 괴물 같은, 수석에 어울리는 녀석이 남아 있었다.

노멜은 아직 절반도 채 보지 않은 테스트에 벌써부터 수석 자리를 골라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 특유의 자존심 때문에 아무래도 그 괴물 녀석의 테스트를 본다고 하더라도 번복하진 않을 테지.

“이런…….”

플래그가 서 버렸다.

그것도 사망 플래그가.

마법에는 재능이 하나도 없는 마나 보유량 원툴.

제작사가 지은 이름의 의미가 납득이 가는 캐릭터.

그리고 결국 마법에 재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퇴학당하는 불운의 엑스트라.

그것이 바로 ‘제로’다.

그런데 더더욱 수석이라니? 일이 꼬여도 완전히 꼬여 버렸다.

“저 녀석, 처음 보는 녀석 주제에 수석이라고? 어디 가문 소속이지?”

“저런 녀석은 본 적 없어. 평민 아니야?”

“흥, 얼마나 대단한 녀석인진 들어가 봐야 알겠지.”

뒤에서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벌써부터 일주일 뒤의 미래가 상상이 간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나.”

나는 뒤에서 수군대는 학생들에게 씨익 미소를 보였다. 게임이란 자고로 하드코어 할수록 흥미진진한 법이다. 시작부터 꼬여 버렸지만 이건 이거 나름의 재미가 있을 것 같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이내 수군대는 학생들을 지나치며 아카데미의 입구로 유유히 걸어갔다.

* * *

아카데미의 강당에는 입학 테스트를 보고 나서 들어오는 학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흐르자, 어느덧 200명가량의 신입생이 모두 도착한 듯 보였다.

치지직―

마이크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강당의 단상으로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150cm도 안 돼 보이는 작은 키에 앳되고 천진난만한 얼굴의 소년은, 입 안에 넣은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입을 열었다.

“아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칼루스 아카데미의 교장 히로빈 그린월드입니다!”

히로빈 그린월드, 외형은 저래 보여도 200살은 훌쩍 넘은 늙은 영감탱이다.

게다가 200년 전 마계 대전 당시 활약했던 일곱 명의 영웅 중 하나. 그야말로 살아 있는 전설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저 교장의 얼굴이 매우 익숙했다. 노멜과 마찬가지로 저 교장의 연설은 다회차 동안 수없이 들어왔으니까.

“칼루스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여러분들,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그리고 저 교장은 신입생들을 향한 인사말 후에 자신의 손녀, 아니 고손녀에게 손을 흔드는 주책을 보일 것이다.

“어라? 손녀딸 안녕!”

느닷없이 단상에서 자신의 고손녀를 향해 손을 흔드는 히로빈. 그의 모습에 학생들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아무래도 마계 대전의 영웅이라고 알려져 있는 히로빈 그린월드다. 그런 그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애 같은 행동을 하니 충분히 이상하게 느껴지겠지.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고 시선을 피하는 사람은 그의 고손녀 ‘에메릴 그린월드’. 바로 이 게임의 히로인 3인방 중 한 명이다.

나는 슬쩍 에메릴을 향해 고개를 돌려 그녀를 확인했다. 루비 버밀리온을 봤을 때와 똑같이, 게임에서만 보던 그녀를 실물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아아,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수준 높은 여러분들이 칼루스 아카데미에 지원해 주신 것에 감사드리며, 남은 기간 동안 여러분들을 마물에 맞설 수 있는 하나의 훌륭한 마법사로 성장시켜 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이상입니다. 길게 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거든요.”

히로빈은 이내 연설을 마무리하고는 입에 물고 있는 사탕을 마저 빨았다.

스킵이 없는 ‘아카마’에서 교장의 이런 시원시원하고 짧은 연설이 아니었더라면 진작에 관뒀을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다음이 문제인데…….

“자, 그러면 이번 신입생 중 수석과 차석을 발표하겠습니다. 제로 학생, 그리고 제이드 학생은 단상으로 올라와 주세요.”

역시 차석은 원작의 주인공인 제이드였다.

어쩌면 저 녀석 입장에선 억울할 수도 있겠다. 내가 수석이 된 건 순전히 노멜의 자존심 때문이었으니까. 물론, 저 녀석이 억울해할 성격도 아니지만.

나는 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호명과 동시에 단상 위로 몸을 향했다.

올라가는 와중, 노골적으로 수군거리는 주변의 소리가 들린다. 반은 의아한 목소리, 반은 야유에 가까운 비난.

그 이유야 뻔했다. 교장이 호명한 두 명의 이름에는 성이 포함되지 않았고, 성이 없다는 것은 둘 다 평민 출신이라는 소리니까.

“어떻게 평민 출신들이 수석, 차석 자리를 모두 차지할 수 있는 거지? 뭔가 잘못된 거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이번에 쟁쟁한 가문 녀석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나 저 수석 녀석 테스트하는 거 봤어. 아예 노멜이 호언장담하던데? 저 녀석보다 뛰어난 마나 보유량은 이번 입학생 중에 없다고.”

“그 나무 영감도 늙은 거지 뭐.”

급기야 노멜을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등장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애초에 제이드가 아닌 나에게 수석을 준 것은 노멜의 실수가 맞으니까.

강당의 단상 위에 도착한 뒤 아래를 내려다보자 불편한 공기가 느껴졌다.

그때, 내 옆에 나란히 선 남자, 제이드가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어깨를 살짝 치며 속삭였다.

“안녕?”

제이드의 인사에 나는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게 되니 조금 재수 없네.’

평민 출신임에도 꿀리는 거 하나 없이 당당한 기세와 자신감 넘치는 표정, 게다가 연예인을 뛰어넘는 빼어난 외모까지. 제작사 측에서 주인공이라고 좋은 건 다 몰아넣은 녀석이다.

게다가 따지고 보면 저 자식, 평민 출신도 아니다. 으레 소년 만화에 등장하는 ‘숨겨진 혈통’이라는 녀석이다.

“자, 그럼 자랑스러운 우리 수석 학생과 차석 학생의 입학 포부를 들어 볼까요?”

교장 히로빈은 먼저 내 쪽으로 마이크를 건넸다.

입학 포부라. 딱히 어그로를 끌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이 자리에 섰다는 것부터 너무 큰 부담이었다.

내가 뭐라 해야 되나 한참을 고민하고 있자, 또다시 제이드가 옆에서 옆구리를 찌르며 속삭였다.

“내가 먼저 할까?”

“그래.”

제이드는 넘겨준 마이크를 쥐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애초에 그에게는 마이크 같은 게 필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차석으로 입학하게 된 제이드입니다!”

강당을 쩌렁쩌렁 울리는 그의 패기 넘치는 목소리에 순간 술렁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저는 비록 평민 출신이지만 ‘권좌’의 자리를 목표로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조용했던 사람들은 ‘권좌’라는 말을 듣고는 다시금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의 말에 담긴 의미는 매우 무게감 있었다. 고작 신입생이, 게다가 평민 출신이 ‘권좌’의 자리를 차지하겠다니…….

그만큼 이 세계에서 ‘권좌’가 차지하는 의미는 매우 컸다. 그것은 일곱 가지 마법 계통 각각의 정점에 있는 마법사들을 뜻하는 호칭. 그의 말은 예컨대 ‘해적왕’이나 ‘호카게’가 되겠다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지금 대의 권좌는 대부분 귀족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방금 발언의 파급력은 더더욱 남달랐다.

물론 나는 이미 제이드의 대사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기에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제이드는 술렁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신경 안 쓴다는 듯, 씨익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그 순간.

[▶ 제이드의 방금 발언을 무시한다.]

[▶ 신입생들을 도발한다.]

[▶ 짧게 말하고 끝낸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선택지 창이었다. 역시 ‘아카마’에서처럼,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상황에서는 대사조차 선택지로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위에 두 선택지는 영 아닌데?’

나는 어쩔 수 없이 맨 아래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허공에 보이는 선택지를 터치하자, 내 입에서는 자동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권좌는 내가 된다. 이상이다.”

순간 강당은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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