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 *
입학식이 끝난 뒤, 칼루스 아카데미의 교수 케이든은 교직원실에 들어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자리는 교직원실의 구석진 창가. 아카데미에 부임했을 때부터 고집한 바람의 결과였다.
느긋하게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리고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잠시 여유를 즐기려는 그때, 시끌벅적한 교수 무리가 교직원실로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교수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떠들고 있는 이야기의 화젯거리는 아까의 입학식. 케이든은 눈을 지그시 감고 그 소음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이번 신입생들은 유별난 거 같죠?”
“그러게요. 그 제이드라는 친구, 패기가 장난이 아니던데요?”
“그것도 그런데, 수석이 더 대단하지 않나요? 막 입학한 신입생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다니……. 아무튼 이번 신입생들은 기대할 만하겠어요.”
조용히 듣고 있던 케이든도 마음속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동안의 교직 생활 중에 이렇게까지 패기 넘치는 수석과 차석은 처음이었으니까.
게다가 수년 동안 칼루스 아카데미의 수석과 차석 자리는 귀족 출신들이 차지해 왔었는데, 이번 대에 오랜만에 평민 출신의 실력자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도 둘씩이나.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케이든은 다시금 커피를 홀짝였다. 문득 입학식 얘기를 듣고 있자니, 오전에 입학 테스트를 지켜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제로라고 했었나…….’
사실 케이든은 입학 테스트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그에게 입학하는 새내기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1년에 한 번뿐인 교직 생활의 유희였다.
그리고 입학 테스트를 지켜보던 케이든은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노멜이 모든 입학생의 테스트가 끝나기도 전에 수석을 발표했던 적은 지금까지 딱 한 번뿐이었으니까.
그리고 제로는 그 노멜이 인정한 두 번째 수석인 것이다.
쾅―!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요?”
그때 교직원실 문을 큰 소리가 나게끔 닫고 들어오는 늙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말에 한창 수다 중이던 교수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바로 칼루스 아카데미의 교감, 실라이 샌드윅스였다.
“평민 나부랭이 녀석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해 가지곤… 쯧쯧. 말세야, 말세. 뭣들 해요? 다들 떠들지 말고 어서 일 보세요.”
그녀의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교직원실의 중앙에 모여 있던 교수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교수 중에도 평민 출신과 귀족 출신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평민을 비하하는 심보가 대단했다.
케이든은 그런 교감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평민 나부랭이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그때 창가에서 독수리 한 마리가 날아오더니 책상 위에 서신을 툭 올려 두고는 사라졌다.
봉투를 찢고 그 내용을 확인하자, 그곳에는 케이든에게 이번 연도 기숙사 사감을 맡아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케이든이 맡게 된 기숙사는 ‘아우레인’. 그리고 그 아우레인에 배정된 신입생 목록을 본 케이든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 * *
[아우레인]
건물 앞 입구에 쓰여 있는 커다란 명패.
이곳은 내가 배정받은 기숙사이자, 원작의 주·조연 무리가 죄다 소속되어 있는 기숙사였다.
일이 조금 꼬여 버려서 원작의 흐름과는 다소 달라진 전개지만, 이러한 큰 틀은 변하지 않는 듯싶었다.
칼루스 아카데미는 네 개의 기숙사로 나뉘고, 기숙사마다 약 50명 정도의 인원들이 배정된다.
딱히 학교의 ‘반’이라는 개념이 없기에 같은 기숙사는 곧 같은 반이라고 볼 수 있고, 그 기숙사의 사감인 교수는 학교의 담임 선생님 같은 역할을 맡는다.
“기숙사 사감이 케이든이었지.”
원작이 어떻든 간에, 케이든 교수가 사감인 아우레인에 배정되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특히나 악명 높은 교감 ‘실라이’가 담당하는 아네락샤로 배정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곧바로 건물의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향했다.
1학년 중 가장 빠르게 도착했기에 동급생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건물 안에는 꽤 많은 수의 2학년이 내 얼굴을 흘깃거리며 수군거렸다.
“저 녀석이 그 권좌가 되겠다는 패기로운 새내기 수석이지?”
“그게 진짜야? 진짜 신입생이 그런 말을 했다고?”
“개멋있네.”
아무래도 아까 입학식 때 있었던 일이 벌써 학교에 퍼진 모양이었다.
살짝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디며 방 안에 도착한 뒤,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털썩 몸을 뻗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방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까의 부끄러운 기억이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이야.’
원작의 제로와는 다르게 최대한 조용히 입학하려 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결과는 수석 입학이었다. 게다가…….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도발해 버렸단 말이지…….’
물론,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선택지 중에서 가장 나은 선택지를 골랐을 뿐.
그런데 선택지를 고른 순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래도 한 번 선택지를 고르게 되면, 거기에 저항할 수 없는 모양이다.
‘다음부턴 신중히 골라야겠네. 그런데 신중히 한다고 될 일인가, 이게? 아무리 봐도 고를 만한 선택지는 그거밖에 없었잖아.’
나는 그저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정도를 기대했을 뿐인데,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권좌는 내가 된다.’라는 건방지기 짝이 없는 개소리였다.
‘뭐가 짧게 말하고 끝낸다야? 아무리 봐도 두 선택지를 섞은 결과잖아, 이거…….’
게다가 밝고 정중하게 말한 제이드와 다르게, 조금 음침하고 차갑게 말한 나는 이미 싸가지 없는 놈으로 찍혔을 게 분명했다.
“하하…….”
이미 각오는 되어 있었지만,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루트를 밟아 버렸다. 뭔가, 생각한 것과는 계속 반대로 흘러가는 듯한 기분도 든다. 아마 이것도 제작사 측의 악취미 중 하나겠지.
‘그나저나 큰일 났네. 어떻게든 퇴학은 막아야 하는데.’
수석으로 입학한 이상, 고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들킬 리스크가 원래보다도 높아졌다. 그리고 그것은 곧 퇴학으로 이어지겠지.
이곳에서의 퇴학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살아서 이 게임에서 빠져나갈 수는 있는 거겠지……?’
조금 불안해졌다.
다만 확실한 건, 당분간은 이 아카데미의 생활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떻게든 아카데미의 침공 이벤트 전에 성장이 필요했다.
‘가만, 생각해 보니 마법은 쓸 수 있는 건가?’
‘아카마’의 제로는 결국 퇴장할 때까지 제대로 된 마법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다. 마나는 충분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사용할 재능과 적성이 없는 것이다.
‘고유 마법은 사용하지 못해도, 기초 마법 정도는 사용할 수 있겠지……?’
이곳 칼루스 아카데미에서 버틸 수 있으려면 적어도 기초 마법은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일단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알아보기 위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기숙사 건물의 아래층으로 향했다.
* * *
도착한 곳은 기숙사의 지하에 있는 훈련실.
3학년생들은 보통 현장에 투입되기 때문에 기숙사에 없고, 2학년생들은 이런 시시한 걸로 훈련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훈련실은 사실상 1학년 전용인데, 입학 첫날부터 이곳에 오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기에 당연히 훈련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훈련실 중앙에는 빛을 발광하는 구슬이 하나 보였는데, 아마도 저기에 마나를 주입하면 가상으로 된 마물들이 튀어나오는 전투 시뮬레이션이 시작하는 듯싶다.
원작에서는 전투 튜토리얼을 진행하지 않는 이상, 절대 오지 않는 곳이기에, 튜토리얼을 계속 스킵하던 나로서는 이곳이 낯설었다.
“그나저나 마법은 어떻게 쓰는 거야…….”
분명 몸속에 존재하는 마나는 느껴졌다.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마치 피처럼 흐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내 몸은 일반 마법사보다도 월등한 마나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 느낌이 선명했다.
“그냥 한번 해 볼까?”
마침, 지금의 몸으로 쓸 수 있는 유일한 마법이 하나 생각나긴 했다.
나는 앞으로 손을 쭉 뻗은 뒤, 내가 할 수 있을 법한 그 유일한 마법의 주문을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펑!
‘매직 미사일’이라고 외치려는 순간, 내 입에서 주문 같은 음성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그러자 내 손에서 백색 구체 하나가 튀어나와 힘없이 날아가더니 중간에 희미하게 사라졌다. 역시 아무리 마법의 재능이 없다 하더라도, 마법의 기초라고 불리는 ‘매직 미사일’은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되긴 하잖아?”
물론 그 수준 자체는 볼품없었다.
그래도 난생처음 마법이란 걸 사용했기에, 그 감각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마법이란 게 의외로 쉽네. 그냥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되니까.”
마법의 작동 방식은 게임과 같았다.
그저 버튼을 누르는 것이 입으로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날아가는 궤적과 목표물의 설정은 머릿속에서 상상한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그 뒤로도 몇 번을 시도해 본 결과 어느 정도 감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매직 미사일을 손발과도 같이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되었다.
슬슬 익숙해졌다 싶을 때, 나는 중앙의 구슬에 마나를 주입해 시뮬레이터를 작동시켰다.
마나를 주입하는 감각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머릿속으로 마나를 주입하는 이미지를 형상화하면 되었다.
슈우우웅―
마나를 주입하자 구슬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곧 주위를 둘러싼 고블린 무리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100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아무래도 HP인 거겠지.
나는 곧바로 매직 미사일을 시전한 뒤 고블린을 향해 조준했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펑!
손으로부터 뻗어 나온 구체는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며 날아가더니 고블린에게 직격했다. 그리고 그 순간 고블린의 머리 위에 있는 숫자가 100에서 90으로 바뀌었다.
‘뭐야, 고작 대미지 10이라고?’
게다가 일반적인 마물의 체력이 고작 100일 리가 없었다.
이 정도 수준으로는 몰살 엔딩 루트를 탈출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딱히 다른 방법은 없었다. 제로는 마법 적성이 ‘제로’니까.
‘가만, 그래도 마나량은 주인공과 비슷할 정도로 많잖아?’
대미지가 낮으면 그만큼 많은 수의 매직 미사일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연이어 매직 미사일을 시전해 보았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차례대로 생성된 열 개의 매직 미사일은 동시에 고블린에게 날아갔고, 고블린은 한 방에 모든 HP를 소실하여 소멸했다.
“역시, 이러면 되는 거네.”
매직 미사일을 사용한다는 가정하에, 내 마나는 무한과도 같았다.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타개책이라고는 이것뿐이다. 다만, 다수의 매직 미사일을 사용해야 되는 만큼, 시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나는 이왕 연습하는 김에 한계를 알아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
그 뒤로 수없이 매직 미사일의 주문을 외워 보았다.
개수가 열 개가 넘어가자, 매직 미사일은 손은 물론이고 등 뒤에서도 생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개수가 100개가 넘을 무렵, 몇몇 사람이 훈련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바로 원작의 히로인 ‘루비 버밀리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