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 * *
칼루스 아카데미의 주말.
보통의 학생들은 주말이 되면 평민, 귀족 할 거 없이 본가에 쉬러 내려간다. 심지어 교수들조차도 주말에는 아카데미 외부로 나간다.
아카데미에 남아 있는 경우는, 정말로 움직이길 귀찮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별로 없다.
이런 황금 같은 주말에 나는 달시 세이피어를 기숙사 뒤편으로 부른 것이다.
“안녕! 나 왔어!”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항상 입고 있는 교복이 아닌 헐렁한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있는 달시 세이피어가 있었다.
역시 운동하길 좋아하는 활동적인 성격이어서 그런지 사복도 간편한 느낌이다. 그런데 달시는 혼자가 아니었다.
“어, 루비도 왔네?”
“으, 응…….”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사복을 입고 있는 루비 버밀리온이 있었다. 그녀는 물방울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녀와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물론 지금부터 갈 장소랑은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었다.
나는 루비의 모습을 보자마자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야 오늘 이들과 할 데이트는 평범한 데이트가 아니었으니까.
“그럼, 다들 준비된 거지?”
내 말에 달시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아마도 몸이 근질근질한 모양이다. 다만, 루비 버밀리온은 조금 불안한 표정이었다.
“너, 너희들 꼭 해야겠어?”
애초에 루비는 같이 갈 생각보다는 말릴 생각으로 따라온 듯싶었다.
“그거… 교칙 위반이잖아. 아니야?”
“숲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은 있어도, 숲에 들어가면 교칙으로 처벌한다는 말은 없는걸? 게다가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안 그래, 달시?”
“응. 완전 재밌을 거 같은데?”
이른바 법과 규칙의 차이다.
사실 이들을 부른 이유는 다름 아닌 던전 토벌 때문이었다.
칼루스 아카데미는 엄청 넓은 숲에 둘러싸여 있다. 예를 들어 칼루스 아카데미가 서울 정도의 크기라면, 숲은 경기도 크기인 정도의 비율이다.
숲에는 수업에 이용하는 던전을 포함하여 여러 던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몇몇 난이도가 낮은 던전은 충분히 신입생 수준으로도 클리어할 수 있다. ‘아카마’의 게임 속에서도 숲의 던전은 초반부 필수 파밍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리 신입생 수준으로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이라 할지라도, 나에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달시 세이피어였다. 던전 토벌 얘기를 들으면 제일 먼저 하겠다 할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루비 버밀리온까지 딸려 올 줄은 몰랐다. 아마도 달시가 간다고 해서 못 미더운 척 따라온 거겠지. 나로서는 원 플러스 원 느낌이다.
나는 벌써부터 편하게 버스 탈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무리 교칙 위반이 아니라도,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나름대로 이 숲의 지리는 잘 알고 있어서 깊숙이만 안 들어가면 괜찮아. 그리고 우리 정도면 당연히 별문제 없을 거야.”
달시 세이피어와 루비 버밀리온, 이 둘만 하더라도 전력은 충분하다. 그럼에도 나는 자연스레 ‘우리’라고 했다. 너네라고 하기에는 뭔가 폼이 살지 않으니까.
그리고 물론 이 숲에 깊숙이 들어가면 위험한 것은 맞다. 숲에 깊숙이 들어가면 깊숙이 들어갈수록 엄청난 마물들이 나오기 때문에, ‘아카마’를 플레이할 때도 이 숲의 끝까지 가 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아카데미 내부에서 나오는 마력 때문에, 숲의 마물들은 아카데미 근처로는 접근하지 못한다.
그래서 숲의 외곽은 단지 아카데미 외부의 침입자들을 막아 주는 역할을 수행할 뿐, 깊숙이 들어가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그럼, 가 볼까?”
그렇게 나는 루비와 달시를 숲속으로 안내했다.
역시 루비도 걱정된다는 명목으로 못 이기는 척 따라온다. 솔직히 달시만으로도 충분한데, 루비까지 따라오다니 든든하기 그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숙사 뒤편의 풀숲을 쭉 걷자 어느덧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무가 울창한 숲이 보였다. 물론 이곳의 지리와 파밍 루트는 게임에서 수십 번 경험했기 때문에 아무리 미로 같은 지형이라도 문제없었다.
생각해 보니 원작 게임이 좀 독특하긴 하다. 미연시 장르 주제에 파밍을 할 수 있는 게임이라니…….
원래였으면 파밍을 통해 얻은 돈과 아이템은 캐릭터의 매력도를 높이는 데 쓰이지만, 지금의 내 경우에는 다 성장을 위해 사용할 피 같은 재화였다.
“도착했어.”
한참을 걷자, 어느덧 거대한 던전의 입구가 보였다. 얼핏 봐서는 그냥 동굴처럼 생겼지만, 대개 던전이란 것이 이렇게 생겼다.
“재밌겠다!”
“이게… 던전이야?”
마냥 신이 난 꼬마 같은 달시와는 달리, 루비는 어쩐지 조심스러워 보였다.
하긴 던전 경험은 둘 다 처음일 것이다. 고유 마법 정도야 보통 집에서 조기 교육으로 배운다지만 던전까지 데려가서 견학시키는 부모는 없으니까.
“걱정 마, 우리 수준으로도 충분해. 여기 나오는 마물들은 그리 강한 편도 아니라서, 아마 달시 혼자서도 클리어할 수 있을 정도야.”
“어떤 종류의 마물인데?”
“그건 몰라, 인스턴트 던전이거든.”
“인스턴트 던전?”
칼루스 아카데미의 숲에 있는 던전들 대부분은 자연적으로 형성된 던전이 아니다. 보통은 설립자가 마력을 사용해 인위적으로 만든 것들이다.
인스턴트 던전의 가장 큰 특징은 입장할 때마다 안에 있는 마물들이 랜덤하게 생성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클리어하고 나서도 던전이 닫히는 게 아니라, 입장할 때마다 새롭게 초기화된다.
마치 처음부터 파밍을 위해 설립자가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이 경우엔 설립자가 게임 제작자니까 애초부터 그런 용도일 테지.
“그럼, 들어가자.”
루비를 안심시킨 나는 던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던전의 테마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번 던전의 마물은 스켈레톤이네.”
“어떻게 알았어?”
“저기 바닥에 해골 보이지?”
루비는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곳에는 해골과 뼈다귀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저거 보고 안 거야?”
“응. 원래 인스턴트 던전은 입구 쪽에 있는 요소를 보면 대충 뭐가 튀어나올지 알 수 있거든.”
예컨대, 던전의 입구 바닥이 진흙으로 질척거리면 머드맨들이 나오는 던전이고, 물컹물컹한 액체가 동굴 벽면에서 흐르면 슬라임들이 나오는 던전이다.
보통의 플레이어라면 쉽게 놓칠 수 있는 정보지만, 게임에서 수없이 인스턴트 던전 파밍을 해 왔던 나로서는 익숙했다.
“그렇구나, 처음 알았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어… 어? 그냥 입학하기 전에 이래저래 공부했어.”
“그러고 보니 여기 숲 지리도 잘 아는 거 같고. 혹시 가족이나 지인 중에 아카데미 교직원이 있는 거 아니야?”
“음… 그런 셈이지. 여기 아카데미 다녔던 사람 중에 친한 사람이 있긴 해. 그 사람한테 많이 듣고 배웠어.”
물론 그 사람은 바로 동급생인 제이드다. 이 모든 게 게임에서 제이드를 플레이하면서 얻은 정보기 때문에 딱히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도대체 마물은 언제 나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앞장서서 걷고 있던 달시가 뭔가 실망한 어투로 말했다. 아마도 달시는 엄청나게 많은 몹이 튀어나올 것을 기대한 모양이다.
“슬슬 나올 때가 됐는데…….”
벌써 던전에 입장한 지 5분이 넘게 지났다. 이젠 안 튀어나오는 게 이상할 지경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앞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던전의 바닥에 깔려 있던 뼈다귀들이 서로 착착 붙어 감기는 소리. 그것들은 허공으로 붕 뜨더니 하나둘씩 조립되어, 인간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런데.
콰앙!
그 뼈다귀들은 채 사람의 형상을 하기도 전에 달시가 내지른 주먹을 맞고 잿가루로 분해되었다.
달시는 생긋 웃으며 손에 묻은 뼛가루를 털어 냈다.
“…적어도, 변신하고 나서 싸우는 게 매너 아니야?”
“싸움에 매너가 어디 있어?”
“그렇긴 하지.”
나는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달시의 학살이 시작되었다.
스켈레톤도 약한 마물은 아니다. 다만, 상대가 너무 강했다.
처음의 뼈 무덤에서 튀어나온 스켈레톤들은 물론이고, 뒤늦게 달려오는 스켈레톤 무리도 달시의 날렵한 몸놀림에 제대로 공격조차 하지 못했다.
나와 루비를 내버려 둔 채 앞으로 우다다 뛰어가는 달시.
그녀는 던전 내부의 스켈레톤들을 모조리 처리해 가며 길을 트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쉬엄쉬엄해!”
나는 그런 달시를 멀리서 지켜보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물론, 달시는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지만.
‘그나저나, 역시 저 녀석 강하네.’
달시는 원작에서 그저 루비 버밀리온의 친구 1 정도의 엑스트라다. 그렇기에 직접적인 전투 신 묘사는 없고, 단순히 ‘강하다. 세이피어 가문의 당주다.’라는 지문으로 설명될 뿐이었다.
보통 아무리 강화계라 하더라도 마법의 발동 주문은 외우기 마련이다. 주문을 외우지 않고 마법을 사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마법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도 있고, 상시 발동 주문이라는 경우도 있다.
달시의 마법은 후자다.
그래서 달시는 딱히 마법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저 정도의 신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푸른 기운을 확인할 수 있다. 저게 상시 발동으로 흘러나오는 강화계의 고유 마나다.
나는 옆에 있는 루비를 흘깃 쳐다보았다. 역시 그녀도 스켈레톤을 지점토처럼 부수고 다니는 달시를 보니 근심이 없어진 모양이다.
“어때, 괜찮지? 내가 뭐랬어. 쉽다고 했잖아.”
“그렇긴 하네.”
루비는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루비까지는 필요 없을 정도의 난이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어려운 던전을 갈 걸 그랬다.
“벌써 보스 방이야?”
“그러게.”
어느덧 달시가 터놓은 길을 뒤쫓다 보니 던전의 보스 방이었다.
보스 방의 중앙에는 거대한 마법진과 함께 사람의 것은 아닌 걸로 보이는 커다란 뼈다귀들이 놓여 있었다.
“조심해. 그거 딱 봐도 보스인 거 같은데?”
딱 봐도 밑에 깔려 있는 것들이 한데 뭉쳐 스켈레톤 킹이 될 듯싶었다.
내 말에 달시는 히죽 웃으며 문제없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나 다를까 거대한 뼈다귀의 조각들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법으로 한데 뭉쳐지기 시작했다.
퍼어억!
그러나 이내 달시가 내지른 주먹에, 하나씩 조립되어 가던 스켈레톤 킹은 다시금 뼛조각들로 분해되었다.
“던전이 이렇게 쉬운 거였어? 다음엔 좀 더 어려운 데 가자!”
“네가 너무 강한 거야.”
달시는 분해된 뼈들이 놓인 마법진 위에서 시시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보스를 처치하면 드롭템을 알리는 빛이 나오는데……?
이상함을 느낀 순간, 나는 황급히 달시에게 위험을 알렸다.
“조심해!!”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어느새 몸을 회복한 스켈레톤 킹이 휘두른 거대한 몽둥이에, 달시의 몸이 그대로 던전의 벽면에 패대기쳐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그 모습에 나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