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이 세계에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같은 전자 기기가 없다.
그렇다고 문명이 뒤떨어지느냐?
그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것이 마법으로 가능하기에 오히려 기술이 퇴보한 케이스였다.
지금 나에게 배달된 이 수강 신청표도 마찬가지로 기술보다 뛰어난 마법의 결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던 빈 종이를 확인하자 놀랍게도 상단의 ‘수강 신청표’라는 매우 큰 글씨와 함께, 수강할 수 있는 내역들이 좌르륵 적히기 시작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저 종이 주제에 태블릿 PC처럼 클릭도 되고 드래그도 된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화면 캡처 기능도 있었다.
“이러니 이 세계의 공돌이들이 망할 수밖에.”
이 세계에서 기술을 배우고 거기에 목매는 건, 오직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평민들뿐. 우리 위대하신 마법사님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수강 신청을 해야 하는데…….”
매우 골치 아픈 순간이 찾아왔다.
고유 마법을 쓰지 못하는 나는 대부분의 전공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전공 선택: 물질계 심화]
[전공 선택: 정신계 심화]
……
[전공 선택: 원소계 심화]
보통의 학생들이 각자의 고유 마법 강의를 선택하여 청강하는 이 꿀 강의를 나는 아예 손도 대지 못한다.
문제는 이 전공 선택 과목이 무려 5학점이라는 거다.
이런 강의 하나를 놓치게 되면 어쩔 수 없이, 별 이상한 2학점짜리의 교양 과목으로 메꿀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전공 필수 과목은 고유 마법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나는 일단 전공 필수 과목부터 장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전공 필수: 대마물전 실전 전투]
* 담당 교수: 스티브 로이드
* 5학점
[전공 필수: 대마법사전 실전 전투]
* 담당 교수: 케이든
* 5학점
강의명을 보고 있자니 벌써부터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야 원작의 게임에서도 이 두 과목은 여러 가지 메인 이벤트가 일어나는 그야말로 이벤트 노다지판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마물전 강의는 기대가 되네.”
쉽게 마정석을 파밍할 수 있는 대마물전 강의.
앞으로 벌어질 이벤트에 조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나저나 무슨 교양을 들어야 할까.”
한 학기에 채워야 하는 학점은 총 36점.
전공 필수는 5학점, 전공 선택도 5학점, 교양 과목은 2학점이다.
일반 학생들은 전공 선택 과목을 심화 한 개, 기초 세 개, 총 네 개까지 들을 수 있다.
그래서 교양 세 개를 채워 넣고, 총 일주일에 아홉 강의를 듣는 것이 보통이다.
금요일은 강의가 없고 기숙 사감의 지도하에 재량 수업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홉 과목이면 하루에 두 강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남은 26학점을 교양 과목으로만 채워 넣어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열다섯 과목, 하루에 무려 네 과목씩 강의를 들어야 한다.
이 정도면 거의 아카데미 공무원 수준이다.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지금의 제로는 나이기에, ‘아카마’에서처럼 괜히 전공 선택을 수강하여 고유 마법을 사용 못 한다는 사실을 들키고, 퇴학당하는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라는 게 다행이었다.
그냥 고유 마법 관련 강의는 깔끔히 포기하는 게 맞았다.
결국 나는 장바구니에 보이는 교양 과목을 있는 족족 때려 박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마법의 역사]
[검술의 기초와 숙련]
[주문의 언어적 구조론]
[기초 마법 개론]
등등의 평범한 마법 아카데미 강의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언어]
[수학]
[과학]
[철학]
등의 일반 고등학교에서 배울 법한 강의까지, 총 열세 개의 교양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수학을 공부해야 한다니…….”
아마도 마법 아카데미에서 국영수를 배우는 놈은 아마 나밖에 없을 거다.
“어쩌겠어, 스타팅 포인트부터 잘못됐는데.”
하필이면 마법 아카데미에서 기초 마법밖에 사용 못 하는 케이스라니.
참 운수도 지지리도 없다.
“그나저나, 월요일 1교시부터 ‘마법의 역사’ 강의네…….”
‘마법의 역사’ 강의의 담당 교수는 다름 아닌 교감, 실라이 샌드윅스.
아마도 끔찍한 한 주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싶다.
* * *
월요일 아침 9시.
교감 실라이 샌드윅스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미 게임에서 한 차례 경험한 일이었지만, 여전히 실라이의 강의는 불쾌했다.
“자리는 부디, 제가 배정하는 대로 앉아 주세요.”
강의를 시작하자마자 실라이 교감은 자리 배정부터 시작했다.
애초에 아카데미의 강의는 보통 자율석이다.
그렇기에 이 교감의 저의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캐서린 골드버그 학생?”
“네.”
“이쪽으로 앉아 주세요.”
자연스레 캐서린을 강의실의 앞 좌석에 배정하는 실라이 샌드윅스. 그리고.
“토마스? 맨 뒷자리로.”
평민 출신은 가차 없이 맨 뒷자리로 보냈다.
게다가 평민 출신 몇몇에게는 항상 쓰고 있는 경어조차 사용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눈에 보이는 노골적인 차별이었다.
그리고 그건 수석과 차석인 나와 제이드도 마찬가지였다.
“제로와 제이드 학생도 뒤쪽에 아무렇게나 앉으세요.”
어떻게 보면 수석과 차석 또한 똑같이 차별한다는 점에서 지조 있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나와 제이드는 강의실의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제이드는 자리에 앉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 같은 강의네?”
녀석의 사람 좋은 미소에 나는 슬쩍 시선을 돌린 채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나저나 얘가 이 수업을 듣는다고?’
실라이 샌드윅스의 평판은 졸업생들과 재학생, 심지어는 학부모들까지 소문이 돌 정도로 유명했다.
따라서 평민 출신이라면 이 ‘마법의 역사’ 수업을 꺼리기 마련이다.
심지어 이 수업은 학점조차 귀족 출신 우대였기에, 더더욱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신청하지 않을 강의였다.
그런데 저 녀석은 방출계뿐만 아니라 모든 마법에 능한 천재 마법사.
굳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 역사 수업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단 하나의 이유만 빼고는 말이지.’
사실, 원작의 게임에서는 이 수업을 듣는 편이 좋았다.
그야 주인공이 저 실라이 샌드윅스의 콧대를 꺾는 이벤트가 존재하니까.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저 녀석, 항상 최선의 루트만 타고 있는 느낌이야.’
어쩌면 이번 회차의 제이드는 내가 히든 엔딩을 봤을 때의 제이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교감 실라이 샌드윅스입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 실라이 샌드윅스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일단 강의에 앞서 학생 여러분들의 역사에 대한 지식수준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그럼 간단한 질문을 먼저 해 볼게요. 마법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앞자리의 귀족 출신 남학생이 손을 들었고, 실라이는 그 학생을 지목했다.
“마법의 근원은 마물과 동일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태초의 혼돈에서 사악한 악마의 힘을 인간의 지혜로 바꾼 것이 마법. 그리고 그 사악한 악마의 힘에 의해 타락한 것이 마물인 것이죠.”
“좋습니다. 아주 완벽했어요.”
실라이는 칭찬의 말과 함께 살짝 박수를 치며 호응했다.
그리고 그다음 타깃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렇다면 우리 잘나신 수석이 한번 이어서 설명해 보실까요? 그 증거와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나는 지목을 받자 순간 당황했다.
그야 이 강의에서 지목을 받아야 하는 건 제이드였으니까.
‘여기선 내가 수석이니까 나를 공격하는 건가?’
다만, 상대가 나빴다. 이미 게임에서 정답을 수없이 골랐던 나였다.
나름대로 어려운 질문이라고 망신 주기 위해 질문한 거겠지만, 그 기대에 부응할 생각은 없었다.
“그야 마물에서도 종종 유색 마나가 관측되어서입니다. 물론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고유 마법과는 다르지만, 동일한 유색 마나가 관측되는 것은 그 뿌리가 같아서라고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내 똑 부러진 대답에 순간 강의실에 정적이 흘렀고, 실라이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이 눈에 띄게 보였다.
그리고 이내 실라이는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다음 공격으로 넘어갔다.
“흠흠… 맞습니다. 이제는 거의 상식과도 같은 얘기라 볼 수 있죠. 그러면 그것을 주장한 학자와 그 이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나는 아까보다도 더 당혹스러웠다.
분명 ‘아카마’에서는 이다음 질문이 ‘그렇다면 게이트와 던전이 생성되는 이유는 무엇이지?’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실라이의 질문은 원작과는 달랐다.
게다가 학자와 이론의 이름이라니, 게임에서조차 나오지 않는 내용을 내가 알 리가 없었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 하고 있을 그때.
[실라이 샌드윅스가 당신을 망신시키기 위해 수준 높은 문제로 지식 수준을 테스트하고 있습니다. 대답하시겠습니까?]
[▶ 유식하게 대답한다.]
[▶ 모르는 것을 인정한다.]
또 한 번 선택지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선택지의 내용에 조금 갈등이 되었다.
‘선택지를 골라 버리면 또다시 이상한 대사를 내뱉는 거 아니야?’
물론 몇몇은 결과가 좋게 풀렸긴 했지만, 그래도 어긋날 때는 대차게 어긋나는 게 이 선택지였다.
더 이상은 이 선택지에 속지 않을 심산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1번 선택지의 결과물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래서 속는 셈 치고 ‘유식하게 대답한다.’라는 선택지를 눌러 보았다.
그러자 어김없이 내 입에서는 자동으로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셰이크홈즈 드 칼리에스테르의 유색 마나 동일성의 고전적 뿌리 이론입니다. 반대 이론으로는 줄리에르미오 폰 아우렐리온의 개별 성질 이론이 있습니다.”
순식간에 강의실은 도서실처럼 고요해졌다.
나도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미 저 실라이 샌드윅스가 평정심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 그럼 처음으로 발생한 게이트와 그것을 발견한 년도, 발견한 학자는 누구지?”
실라이는 반은 흥분 상태, 반은 ‘설마 이것도 알겠어?’ 하는 식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내 눈앞에 뜨는 선택지.
[실라이 샌드윅스가 당신을 망신시키기 위해, 역사학자 레벨의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답하시겠습니까?]
[▶ 유식하게 대답한다.]
[▶ 모르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고민 없이 1번의 선택지를 골랐다.
“처음 게이트가 발생한 년도는 기록에 의하면 xxx년 xx월 xx일입니다. 당시 타르파스앤 르도냐소가 작은 도시 뱅크부시아의 코쿤더스트 마을의 이장 올리버리크스와 함께 게이트를 발견했다고 알려져 있고, 그리하여 최초의 게이트 이름은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타르파스투스라고 명명했습니다.”
아까보다 더 어마어마한 내용의 말이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듣는 사람들도 놀랐겠지만, 정작 당사자인 나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이내 나는 장난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럼, 100년 전 발발한 마계 대전의 경위도 설명할까요?”
“아, 아니요. 됐어요. 앉아 주세요.”
그제야 실라이는 이겨 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마지못해 질문을 끝마쳤다.
이미 교감의 능구렁이 같은 얼굴은 터질 듯한 화산처럼 붉으락푸르락했고,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나는 그 모습에, 속으로 꼴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실라이의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제로 학생은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 주세요.”
“네? 왜요?”
“이렇게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유능한 학생에게 맡기고 싶은 업무가 있어서요.”
그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