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 * *
“그럼 오늘의 강의를 마칠게요. 그리고 제로 학생은 가지 말고 기다리세요.”
지루했던 ‘마법의 역사’ 수업이 끝나자마자 강의실을 뛰쳐나가려 했던 나는, 실라이 교감의 저지에 발목이 잡혔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강의 시간에 교무실로 따라오라고 했었지. 근데, 저 능구렁이가 대체 무슨 일이야?’
강의가 끝나고 따로 부른다는 내용은 ‘아카마’에서도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장단에 맞춰 주기로 한 나는, 실라이가 교단을 정리할 동안 기다려 주었다.
“그럼, 따라오세요.”
뚱뚱한 몸을 좌우로 흔들며 뒤뚱뒤뚱 앞장서는 실라이.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며, 지금 상황의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제로 학생에게 시킬 게 있어서요.”
“네? 뭘 시켜요?”
“아까 강의 시간에 제로 학생의 역사적 지식을 보고 너무 감동했거든요.”
“감동했다고요?”
그럴 리가 없다.
실라이 샌드윅스는 지독한 귀족 우월주의.
아무리 수석일지라도 평민인 나를 좋게 볼 리가 없었다.
그리고 말하는 그녀의 어투에서는 이미 비열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래서 제로 학생에게 적합한 업무를 줘 볼까 해요.”
“적합한 업무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의 정체는 교무실에 도착한 뒤 확인할 수 있었다.
“자, 여기 받으세요.”
실라이 교감의 자리에 도착한 후, 그녀가 내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자료였다.
아마도 얼핏 봐서는 역사에 관련된 자료로 보였다.
“그것들은 수업에 쓰일 자료들이에요.”
“이건 왜 주셨어요?”
“여기 앉아서, 이 자료들을 요약해 주시면 돼요. 제로 학생의 우수한 역사적 지식이라면 문제없겠죠?”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맡기냐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실라이 교감을 쳐다보았다.
“꼭 좀 부탁할게요. 아무래도 일반 학생들보다는 ‘역사적 지식이 우수한’ 제로 학생이 담당하는 게 맞지 않겠어요? 당장 오후 강의부터 사용할 자료들이니까, 지금부터 시작해 주세요.”
“도대체 이걸 왜 저한테 맡겨요?”
“물론, 아무런 보수가 없진 않을 거예요. 당연히 제 강의에서 추가 점수를 드릴 거랍니다. 그리고 설마 우리 아카데미의 자랑스러운 수석 입학생이자, 남들보다 우수한 제로 학생이 이 정도의 부탁도 안 들어주시는 건 아니겠죠?”
그렇게 말하는 실라이의 눈은 웃고 있었다.
나는 교감의 눈가에 맺힌 징그러운 주름을 보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럼 그렇지.’
역시나 아까 전 강의 때 당한 것이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런 걸 계획해?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 낸 게 고작 이런 거야?
게다가 보수로 내건 추가 점수도 순순히 줄 리 없었다.
아마도 성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미미한 점수이거나, 아예 안 줄 가능성도 다분히 있었다.
실라이 교감의 복수는 정말이지 비열하고 치졸했다.
다만, 순순히 당해 줄 내가 아니었다.
“죄송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설마 다음 강의를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을 저버리시는 건가요? 그 학생들은 이 자료의 요약본이 꼭 필요한데도요?”
“그건 담당 교수인 실라이 샌드윅스 교감님이 미리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뭐, 뭐라고?!”
순간 실실 눈웃음치며 말하고 있던 실라이의 표정이 싹 변했다. 방금 내 발언으로 상당히 열을 받으신 모양이다.
나는 실라이 교감의 부들부들 떨리는 표정을 보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런데, 그녀의 다음 말은 내 예상 밖이었다.
“당장 앉아서 요약하세요. 아니면 방금 발언으로 벌점을 부여하겠어요.”
“……벌점이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칼루스 아카데미의 벌점은 상당히 강하다.
벌점 3점이면 정학, 5점이면 퇴학 조치다.
내게 주어진 메인 이벤트의 실패 조건은 다름 아닌 퇴학.
벌점이 갖는 의미는 매우 컸다.
‘아니, 이 늙다리가 노망이 났나. 자기가 말도 안 되는 걸 시켜 놓고 벌점을 주겠다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실라이 샌드윅스는 엄연히 이 칼루스 아카데미의 교감직을 맡고 있기에, 벌점을 부여하려면 얼마든지 부여할 수 있는 입장이니까.
‘젠장.’
그렇다고 순순히 따를 수도 없는 마당이다.
나는 일단 최대한 반항해 보기로 했다.
“저, 저도 물론 실라이 샌드윅스 교감님을 돕고 싶지만, 바로 강의가 있어서 가 봐야 할 거 같은데요……?”
“그까짓 강의 조금 늦으면 어떻다고. 당장 앉아서 시작하세요. 끝마치기 전까진 한 발짝도 못 나갈 거니까.”
말을 마친 실라이는 갑자기 내 어깨를 잡더니 강제로 의자에 밀치기 시작했다.
나는 최대한 몸에 힘을 주며 그녀의 손길에 저항했다.
다만 이 늙어빠진 여자의 손아귀 힘이 나이에 맞지 않게 정정했기에, 쉽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저 이러다 진짜 강의에 늦는다니까요?!”
“냉큼 앉아요!”
그렇게 나와 실라이의 언성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고, 교무실에 있는 교수들이 무슨 영문인지 우리 쪽을 확인하고 있었다.
“다들 뭘 쳐다봐요? 일이나 보세요!”
역시 실라이는 그러한 교수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를 자리에 앉히려 했다. 그런데, 그때.
“실라이 교감님!”
교무실의 끝자리에 위치한 실라이의 자리로, 내 또래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젊은 여자 교수 한 명이 다가왔다.
실라이는 감히 자신을 부르는 여교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무슨 일이시죠?”
“죄송한데, 그 학생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안 돼요. 이 학생과는 해야 할 일이 남았어요.”
“그 학생이 제 강의를 들어서요.”
그리고 여교수는 내 어깨를 누르고 있던 실라이 교감의 손목을 탁 하고 잡았다.
“그만 놔주시죠?”
여교수의 당당한 태도에 실라이는 내 어깨를 누르던 손아귀 힘을 슬며시 풀었다. 아무리 저 안하무인의 교감이라 할지라도, 곧 강의가 시작한다는데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여교수를 째려보던 실라이 교감은 이내 포기한 듯 손을 내둘렀다.
“흐, 흠흠, 알겠어요. 가 보세요.”
나는 갑자기 점잖은 척하는 실라이의 태도에 코웃음 치며, 여교수를 따라 교무실 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 * *
교무실 문밖으로 나오자마자 여교수는 나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을 걸었다.
“제로, 맞지?”
“네, 맞아요.”
“아무리 교감이라지만 참 너무하네. 학생이 무슨 자기 장난감인 줄 아나?”
그녀는 털털하게 실라이 교감을 까 댔다.
물론 교수들 사이에서도 실라이 교감의 평판이 안 좋은 건 맞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깔 줄은 몰랐다.
“하하…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검술의 기초와 숙련’ 교수님이신 건가요?”
“응. 맞아. 아카데미의 검술 담당 교수, 아텔라 가스트로디아야.”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옷 스타일은 교수답지 않게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고, 허리춤에 검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제가 아텔라 교수님 학생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강의 첫 주라 당연히 이 교수와의 일면식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본인 강의의 학생이라는 걸 안 거지?
수석 학생이라서 미리 체크해 둔 건가?
“그건…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아텔라는 의미심장하게 말을 흐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의미를 도착하고 나서 깨달았다.
아텔라가 날 데려온 곳은 아카데미의 도장.
그런데 분명 강의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도장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요?”
내 질문에 아텔라는 조금 창피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학생은 너뿐이거든.”
“…네?!”
그랬다.
애초에 본인 강의에 학생이 나뿐이라 내 얼굴을 외우고 있었던 거였다.
“어떻게 학생이 저밖에 없을 수 있는 거죠……?”
“나도 올해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온 생 신입 교수거든. 그래서 다들 내 강의를 수강하지 않았나 싶은데… 뭐, 요즘 학생들이 검술을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도 있고…….”
변명하는 게 부끄러운지 눈을 못 맞추는 아텔라였다.
그러고 보니, 애초에 검술에 관련된 강의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이 아텔라 교수가 하는 ‘검술의 기초와 숙련’ 강의였고 다른 건 ‘무술과 무기 사용’이었다.
아무래도 ‘무술과 무기 사용’의 교수가 연식이 있고 잘 알려진 교수다 보니, 무기를 다루는 웬만한 학생들은 전부 거기로 몰린 모양이다.
게임에서는 주인공이 딱히 무기를 사용하지 않아 듣지 않는 강의였던 터라,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그래도 그렇지, 학생이 한 명뿐인 강의는 너무했다.
‘이래서야 거의 1:1 개인 교습이잖아?’
물론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둘뿐이니까 강의는 눈높이에 맞춰 편하게 하자. 물론 그렇다고 말은 놓으면 안 된다? 아무리 신입이라도 교수는 교수니까. 대우는 해 주라.”
나는 그런 그녀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자 아텔라도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검술은 어느 정도 할 줄 알아?”
“저… 아예 할 줄 몰라요.”
“아예 할 줄 모른다고?”
평생을 방구석에서 게임만 해 왔던 나였다.
검술은커녕 운동조차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보통 게임에 빙의한다 치면 적어도 날렵한 몸에 들어가기 마련인데, 내 몸의 주인인 ‘제로’도 나처럼 어지간히 몸치였던 모양이다.
나의 대답에 아텔라는 갸우뚱하며 내 허리춤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럼, 그건 뭔데. 장식이야, 아님 사용하는 검이야?”
“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부터 언노운을 허리에 차고 다녔었다.
언노운의 특성상 매우 가볍다 보니 존재 자체를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아직 계약을 하지 않았음에도 언노운을 가지고 다녔던 건 제페토 사건 때처럼 만약을 위해서였다.
“이건 마검이에요. 아마 검으로서의 기능으로는 사용 못 할걸요?”
“마검? 한번 봐도 될까?”
“네.”
나는 언노운을 아텔라에게 건넸고, 아텔라는 조심스레 검신을 살폈다.
언노운을 쓰다듬으며 살짝 흥분한 아텔라의 모습은 영락없는 검 덕후로 보였다.
“이거 평범한 검이 아니잖아? 최소 에픽급은 되겠는데?”
역시 그녀는 단번에 언노운의 가치를 꿰뚫었다.
다만, 언노운은 에픽급보다 한 단계 위인 전설급 무기긴 했지만 말이다.
“이거 효과는 뭐야? 한번 보여 줄 수 있어?”
“아직은 계약이 안 돼서 못 써요.”
“그래? 보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나저나, 계약한다 해도 이걸로 검술은 못 할 거 같네.”
“네.”
언노운은 길이가 1m도 채 되지 않고, 무엇보다 검날이 뭉뚝해서 검으로서의 기능은 수행하지 못한다. 굳이 타격 무기로 사용하려면 둔기처럼 휘두르는 수밖에 없었다.
아텔라는 그렇게 한참 동안 언노운을 요리조리 살피고는 나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자, 그러면 검 자랑은 여기까지 하고. 한번 실력을 볼까?”
말을 마친 아텔라는 도장의 구석에 있는 창고에 들어가더니, 나무로 된 죽도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