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 * *
화창한 오후.
아우레인 기숙사의 학생들이 아카데미의 숲으로 집합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이곳에서 시작할 ‘대마물전 실전 전투’ 강의는 전공 필수 과목이기에, 한 기숙사의 인원 전체가 동시에 모인 것이다.
숲으로 모인 학생들 앞에는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사내가 서 있었다.
남자는 민소매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두꺼운 팔 근육이 더욱 부각되었다.
곧 남자는 학생들의 인원수를 전부 확인하자 입을 열었다.
“반갑다! 나는 ‘대마물전 실전 전투’의 담당 교수, 스티브 로이드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호탕하고 또 우렁찼다.
그 기세에 눌려 학생들의 소란스러움이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
반면에 앞에서 뭐라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던 얘기를 계속해서 지껄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제페토의 따까리들, 에이체스와 벅스였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 주제는 당연히 나였다.
“저 자식, 어제 하루 종일 강의 듣고 있었대.”
“수석이라고 열심히 하는 거 티 내는 거야, 뭐야?”
“심지어 ‘수학’이랑 ‘철학’ 과목도 수강했다던데.”
“미쳤네, 그걸 수강한다고? 마법은 어차피 잘한다 이거지?”
다 들린다, 다 들려.
뒤쪽에서 들리는 그들의 대화 주제에 나는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살짝 가슴이 아팠다.
‘그래, 알아. 나도 이런 내 처지가 슬프다고.’
나라고 좋아서 하루에 네 개씩 강의를 듣는 것이 아니다. 아침에 기숙사를 나가고 저녁에서야 복귀하는 내 처지가 너무 불쌍했다.
그런데 그걸 열심히 공부하는 우등생의 모습으로 보다니…….
‘게다가 내가 수학 강의를 수강한 것도 알잖아?’
녀석들의 얘기를 듣다 보니, 어제 비가 내리던 내 수학 쪽지 시험이 떠올라서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데, 저 녀석은 말이 없네.’
정작 제페토는 에이체스와 벅스 사이에서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저번에 호되게 당했던 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같다.
다만, 뒤에서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운 걸로 봐서는, 오늘 강의 때 다시금 복수하기 위해서 벼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의 어수선한 분위기에도 스티브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은 알다시피 너희들에게 던전 토벌 임무가 주어질 것이다! 너희들이 앞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나서 현역 마법사가 된다면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이다.”
이 세계에서 마물은 총 두 가지의 형태로 생성된다.
하나는 자연적인 발생.
자연에 있는 생물이나 몬스터들이 마기를 품어 마물이 되어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던전 발생.
갑자기 임의적인 지형에 던전이 발생하여 그 안에서 마물들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엔 당연히 발견 즉시 처리하고, 후자의 경우에도 던전을 토벌하지 않으면 마물들이 계속해서 뛰쳐나오기 때문에 빠른 처리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 세계의 마법사들 대부분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 마물을 토벌하고 있다.
“오늘 내가 준비한 던전은 너희들, 신입생 입장에서는 조금 버거울 수 있다. 그래도 나는 너희들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스티브 교수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미 이 던전 토벌 강의를 게임에서 수강했던 나로서는, 그것이 신입생 입장에서 조금 버거운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던전은 일반적인 던전이 아니다! 난이도가 높은 만큼, 너희들을 보조해 줄 기믹들이 존재한다. 그게 바로 ‘버프 시스템’이다!”
버프 시스템.
게임에서 나오는 버프와 같다.
던전 내부의 특정한 장치를 작동시키면, 일시적으로 마나, 체력, 스피드 등등의 버프를 얻게 되는 훌륭한 시스템이다.
그리고 오늘 내가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진행은 2인 1조로 한다! 아직까지는 미숙한 너희들이니 기본적으로는 생존 능력 부분만 테스트할 예정이다. 그러나 던전의 보스를 잡고 마정석을 가져오는 사람에게는 제일 큰 점수를 지급하겠다!”
그렇게 해서 스티브 교수가 정해 주는 팀 매칭이 시작되었다. 파트너의 기준은 아마도 스티브가 전날에 랜덤으로 뽑아 놓은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내 파트너가 된 사람은…….
“잘 부탁해.”
다름 아닌 루비 버밀리온이었다.
그녀는 팀 호명이 끝나자마자 나한테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나는 루비를 확인하고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현재 아우레인의 학생들 중에 루비만 한 파트너는 별로 없었으니까.
원작에서 루비의 파트너는 에메릴이었는데 아마도 전개가 달라진 듯싶다. 나는 속으로 내심 좋아하면서도, 루비에게 농담을 던졌다.
“저번처럼 아무것도 못 하고 주저앉아 있는 거 아니겠지?”
“뭐, 뭐라고?!”
내 말에 루비는 살짝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권좌의 가문, 버밀리온의 장녀가 아무것도 못 하는 짐짝 취급을 받게 되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두고 봐, 보여 줄 테니까. 저번엔 상황이 어쩔 수 없었잖아!”
“그래, 그래. 믿고 있을게.”
그때 던전 이후로, 루비 버밀리온과 조금 친해진 느낌이다.
애초에 루비는 조금 낯가리는 성격이라 낯선 사람에게는 감정 표현이 서툰데, 지금은 잘도 내 농담에 반응해 준다. 나는 그 모습이 살짝 귀엽게 느껴졌다.
팀 선정이 끝나자 스티브 교수는 학생들을 던전 입구에 줄 세웠다.
“아, 그리고 던전의 시스템상 너희들이 치명적인 대미지를 받게 되면 자동으로 던전 밖으로 귀환되니 너무 걱정은 하지 마라.”
최소한의 안전장치.
만약 저게 없었으면 아마도 던전 안에서 죽을 사상자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럼, 건투를 빈다!”
그렇게 아우레인의 학생들로 구성된 스물다섯 팀은 던전 안으로 입장했다.
* * *
던전의 내부는 50명의 인원이 들어가도 널찍할 정도로 매우 넓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그리고 모든 학생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 같이 뭉쳐서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앞에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것도 있었고, 서로의 움직임을 견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을까, 던전의 동굴 안에 거대한 광장이 나오고 벽면에 여러 개의 입구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수많은 입구를 보며 루비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네.”
“응? 뭐가?”
루비는 내 말의 의미를 궁금해했다.
나는 대답 대신 루비에게 오더를 내렸다.
“혹시 중력 감소 마법 사용할 수 있어?”
“중력 감소 마법은 왜? 가능하긴 한데.”
“그럼, 지금 당장 사용해 줘.”
“알았어.”
「그라비타스 디미누티오(grávĭtas dīmĭnútĭo)」
슈우우웅!
루비가 주문을 외우자, 나와 루비의 몸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동시에 온몸이 가벼워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다리를 휘휘 움직여 보자, 확실히 움직임이 가벼워져 있었다.
“준비됐지?”
“무슨 준비?”
“그럼…….”
나는 말하는 동시에 루비의 손을 잡았다.
“…뛰어!!”
그리고 냉큼 달리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손이 잡힌 채 뛰기 시작한 루비는 어리둥절한 모양이다.
“뭐, 뭐야? 왜 뛰는 거야?!”
그리고 루비뿐만 아니라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저, 저 자식들 갑자기 뛰기 시작하는데?”
“설마 먼저 버프 시스템을 차지하려고?”
“우리도, 우리도 빨리 가자!”
“뛰어!”
그러곤 많은 학생이 뒤늦게 따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그 모습이 노예를 뒤쫓는 추노꾼들 같았다.
그러나 이미 우리 둘은 중력 감소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빠른 속도로 입구와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뒤를 바짝 쫓아 오는 사람은 있었다.
“어디 가아! 거기가 정답이야? 나도 데려가!”
달시 세이피어였다.
역시 강화계의 달시는 우리에게 중력 감소 버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맹추격해 왔다.
나는 달시가 입구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루비에게 또 한 번 오더를 내렸다.
“루비! 입구를 무너뜨려!”
“으, 응? 알았어. 「라베스(lābes)!!」”
콰과광!
우리가 입구에 발을 들이밀자마자, 루비의 마법에 의해 입구의 돌벽이 무너져 내렸다. 뒤를 힐끔 돌아보니, 아무리 달시라도 저 정도의 붕괴를 뚫고 들어오기에는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추격자를 따돌렸음에도, 나는 계속해서 거리를 벌리기 위해 달려 나갔다.
루비는 한참을 따라 달리다가, 궁금했는지 뛰는 이유를 물어보았다.
“그런데 왜 달리는 거야?!”
“여기가 가장 좋은 루트거든.”
이 던전 토벌 수업도 게임 속에서 수없이 플레이했었다.
이번 던전의 핵심은 바로 ‘버프 시스템’의 차지.
이 던전의 난이도는 애초에 1학년 수준으로는 못 깨도록 설계되어 있다.
따라서 아무리 게임 속 주인공 ‘제이드’라 할지라도 버프 시스템을 독식하는 게 중요했다. 그렇기에 이곳의 루트 최적화는 진작에 끝낸 지 오래였다.
“최적의 루트? 그걸 어떻게 아는데?”
“어… 어? 다 아는 수가 있으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하여 어물쩍 넘어갔으나, 루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다만, 나를 더욱 당황시킨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손은 놔줄래?”
앗.
루비의 말을 듣고서, 지금껏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황급히 잡은 손을 빼냈다.
“……미안.”
“그래서 이쪽으로 가면 버프 시스템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지?”
“응.”
루비는 그 뒤로 별 의심 없이 내 뒤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첫 번째 버프 시스템의 위치에 도착하게 되었다.
다른 입구로 들어간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쯤 던전의 함정이나 마물을 맞닥뜨려 깨나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번 수업은 무조건 내가 1등이다.’
이번 던전 토벌의 보상 마정석은 무려 500다트의 가치가 있었다.
현실 돈으로 따지자면 500만 원.
역시 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아카데미답게 수업의 보상으로 통 큰 금액을 투자해 놨다. 그리고 그 돈이면 성장을 위한 마도구들을 충분히 구매할 수 있는 돈이었다.
따라서 여기서는 질 수 없었다.
버프 시스템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두 발로 서 있는 도마뱀, 던전의 중간 보스 리자드맨이었다.
“저걸 잡으면 버프를 얻는 거야?”
“응. 장치는 각 구역의 중간 보스를 처리해야 나와.”
말을 마친 나는 곧바로 매직 미사일 주문을 외웠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그런데 루비가 나를 말렸다.
“잠깐.”
“왜?”
“내가 할게.”
아무래도 저번에 아무것도 못 한 게 분한 모양이었다.
루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주문을 취소했다.
그리고 그녀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라베스(lābes)」
그녀의 외침과 함께, 갑자기 던전 위쪽의 종유석들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푸수욱!
푸슈슉!
푸슈슈슉!
“끼에에에엑!”
천장에서 떨어져 그대로 리자드맨의 목 부위를 관통했다.
리자드맨은 보나 마나 즉사인 것 같았다.
그녀는 단번에 비명횡사한 리자드맨을 확인하고는 우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뭐, 그럭저럭 쓸 만한 거 같네.”
“뭐, 뭐라고?!”
내 말에 루비는 흥분하여 얼굴이 붉어졌다.
사실 루비의 마법을 과소평가하는 건 실례였다.
저것은 절대로 단순한 마법이 아니다.
소형 물체의 강도를 높이고, 그것이 받는 중력을 100배까지 증폭시키는 것. 저거에 맞게 된다면 강철 골렘의 피부도 뚫릴 정도다.
게다가, 애초에 이 던전의 중간 보스를 원 턴 킬 내는 거 자체가 평범한 학생이 아니라는 증명이었다.
다만, 나는 그녀를 놀리는 게 재미있었다.
“그 말 취소해!”
루비는 살짝 토라져 볼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나는 히죽 웃으면서 그녀를 지나치고는, 리자드맨 뒤편에 있는 장치로 다가갔다.
버프 시스템의 장치는 벽에 있는 마법진이었고, 마나를 주입하면 발동되는 형식이었다.
루비도 내가 발견한 장치를 보고는, 이내 그곳에 관심이 쏠린 듯 보였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버프 소유의 허락을 구했다.
“저기, 이 버프 내가 가져도 되지?”
“응? 이거 한 명만 사용하는 거야?”
“어. 그래서, 내가 쓰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너는 어차피 강하잖아?”
“그, 그렇긴 하지?”
역시 루비가 저렇게 나올 줄 알았다.
루비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럼, 쓴다?”
그리고 나는 마법진을 발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