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 * *
‘저 자식들은 뭐지?’
브레스에 통구이가 되어 강제 귀환되는 제페토와 에이체스를 지나치면서, 나는 의문이 생겼다.
‘분명, 할 말이 있었던 거 같기는 한데…….’
뭐 어쨌든 간에, 끝까지 말을 듣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었다.
뒤를 힐끔 돌아보니 여전히 드래곤은 브레스를 내뿜으며 쫓아 오고 있었고, 브레스에 담겨 있는 산성 물질 때문에 던전의 벽면들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자식은 언제까지 쫓아 오는 거야?’
녀석은 도저히 포기할 줄을 몰랐다.
벌써 도망친 지 10분이 넘은 것 같은데도 아직까지 미친 듯이 쫓아 온다.
‘싸울까?’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매직 미사일은 저 녀석에게 흠집도 내지 못할뿐더러, 소중한 언노운을 이런 곳에서 쓸 수 없었다.
지금은 어떻게든 도망치는 게 맞았다.
‘생각해 보니 저 녀석, 파트너도 없네.’
내 생각엔, 에메릴의 파트너도 저 브레스에 휩쓸려 통구이가 된 듯싶다. 그 정도로 드래곤 폼일 때는 앞뒤 안 가리는 스타일이니까.
그나저나 이게 대마물전 수업인지, 대마법사전 수업인지 슬슬 헷갈리기 시작한다. 도대체 왜 나를 저렇게까지 쫓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생각해 보니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강한 마나를 탐하기 마련이다.
‘아카마’에서 에메릴 그린월드가 제이드를 좋아하는 게 그런 이유였다.
지금의 내 경우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저 드래곤은 본능적으로 내 많은 마나 보유량에 이끌리는 듯싶다.
다만, 저 녀석의 태도가 나한테는 왜 공격적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럼, 그걸 다시 해 볼까.’
마침 주변을 둘러보니, 무너진 벽면 사이로 숨기 좋은 공간이 보였다.
나는 달리던 와중, 방향을 꺾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호흡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 계속해서 달린 영향으로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버프의 영향인지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그린 드래곤은 갑자기 내가 사라지자 잠깐 어리둥절해하더니, 잠시 후 찾는 것을 포기하고 가던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나이스! 성공이다.’
숨을 참아 마나를 숨긴다는 입학식 때 한번 써먹었던 트릭.
입학식 때 노멜은 직접적으로 마나량을 확인하는 거라 먹히지 않았지만, 저 멍청한 드래곤은 미세한 마나는 판별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드래곤의 쿵쿵거리는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숨을 참았고, 더 이상 진동이 느껴지지 않자 숨을 내쉬었다.
“푸하아!”
다행히도 그린 드래곤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 안심이 된 나는 그제야 루비가 생각났다.
“이건 변순데…….”
이번 던전의 보스는 게임에서도 결코 만만한 녀석이 아니었다. ‘아카마’의 제이드조차 버프 시스템이 없으면 고전하는 상대다.
“뭐, 괜찮으려나.”
이 던전에 있는 핵심 버프들은 독식한 상태고, 언노운도 단발성이지만 사용할 수 있었다. 적어도 클리어가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괜히 에메릴을 잘못 만나서 단번에 간 루비가 불쌍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루비에게 버프를 나눠 주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이제 보스 녀석을 잡아 보실까.”
이번 던전의 보스는 바로 ‘그리핀’.
위는 독수리고 아래는 사자인 환상종 마물이다.
녀석이 까다로운 가장 큰 이유는 마법, 그것도 바람 마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점이었다. 일반적인 원소계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마법과는 흐름이 다르지만, 그 위력만큼은 현역 마법사들의 수준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애초에 일반적인 학생의 수준으로는 녀석의 바람 마법이면 바로 게임 오버다. 그래서 대미지 감소 버프가 클리어를 위한 필수 요소인 것이다.
“게임에서도 애 좀 먹었는데 말이지.”
아무리 주인공 제이드라 할지라도 버프 시스템이 없으면 그리핀을 이기기 힘들었다. 까딱 잘못하다가 그리핀의 휘몰이에 당하면 그대로 게임 오버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제이드로는 풀 버프 상태면 쉽게 깰 수 있었지만.”
그건 제이드였고.
아마도 나로서는 언노운의 힘을 빌려야 간신히 깰 수 있을 것이다.
슬슬 보스 방에 가기 위해 달릴 준비를 하던 그때.
띠링―
눈앞에 예의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서브 이벤트〉
[그리핀의 둥지]
* 달성 조건: 그리핀의 둥지에서 그리핀의 알을 수집한다.
* 제한 시간: 던전 종료 전까지
* 실패 조건: 사망
* 보상: 당신에게 필요한 마법 주문서(???)
시스템 창을 보자마자 든 생각은 ‘왔구나.’였다.
그야 보상 내역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법 주문서’가 있었으니까.
“그럼, 그렇지. 역시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네.”
저번의 서브 이벤트 때 받은 마법 주문서(더블 캐스팅)로, 이미 내 매직 미사일은 두 방씩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그때 당시만 해도 얼떨떨했었다.
아무리 치트 같은 마법 주문서를 얻으면 뭐 해. 결국 그 주문서를 최하급 마법인 매직 미사일에 발라야 하는데.
그러나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더블 캐스팅 옵션이 뜨기라도 하면, 무려 네 배잖아?”
사실 원작의 ‘아카마’에서는 마법 주문서 자체가 게임에서 한 번이라도 뜰까 말까 한 초레어 아이템이기에, 이런 경우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의 시스템은 왠지 모르겠지만 마법 주문서를 퍼 주고 있었기에,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었다. 그리고 그게 고유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마땅히 주어져야 할 밸런스인 듯싶기도 했다.
“이번에 얻으면 네 배, 그리고 다음은 여덟 배… 여섯 번만 더 얻어도 128배라니…….”
스킬 시전 한 방에 매직 미사일 128개.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렇게 나는 기대감과 설렘을 안고 보스 방을 향해 뛰어나갔다.
* * *
한편, 던전의 어느 구역.
“조, 조금 천천히 가 주실래요……?”
“왜 이렇게 느려? 빨리 와!”
캐서린 골드버그는 저 신난 듯이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달시 세이피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달시가 세이피어 가문의 당주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욕을 한 바가지 박았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저런 사람이랑 팀이 되어 가지고…….’
캐서린에게 달시는 정말 최악의 파트너였다.
시작하자마자 던전의 광장에서 혼자 뛰쳐나가지를 않나, 여기저기 던전을 뛰어다니며 트랩을 발동시키지를 않나, 계속해서 개인행동을 하는 바람에 뒤쫓는 캐서린은 정신 차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더더욱 문제인 점은, 지금 당장은 저 경망스러운 여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물론 캐서린도 당장 달시와 떨어져서 개인행동을 하고 싶었다. 저런 여자와 팀플레이를 할 바에 혼자 하는 게 나으니까.
다만, 조금 전에 중간 보스를 잡고 나서 나온 버프 시스템이 하필 ‘마나량 70% 감소 디버프’였다.
더욱이 캐서린은 많은 마나량을 사용하는 소환계 마법사이기에, 그 효과는 치명적이었다.
결국 디버프를 받은 그녀로서는, 지금 당장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왜 하필 디버프 시스템이 있는 건데요…….’
사실 중간 보스는 저 달시 세이피어가 혼자 잡은 거였지만, 캐서린이 먼저 버프를 사용하고 싶다고 고집해서 받은 거였다. 달시는 쿨하게 버프를 양보한 거였고.
어찌 보면 자업자득이긴 했다.
“저기… 여기로 가는 게 맞나요?”
“응? 글쎄. 맞지 않을까?”
캐서린은 달시의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역시 저 여자는 머리에 근육밖에 없는 것 같네요.’
그녀는 달시와 대화하기를 포기했다.
더 이상 말을 섞으면 스트레스만 가득할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뒤를 따라 걸었을까.
“발견했다!”
“네? 뭐를요?”
캐서린은 달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눈에 봐도 보스 방으로 보이는 엄청나게 거대한 입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때? 쭉 가다 보니까 나오잖아.”
“그, 그러네요. 바보도 쓸모가 있긴 하네요.”
“응? 뭐라고?”
“아, 아니에요. 어서 보스를 잡고 이 지긋지긋한 던전에서 나가요.”
“그럼… 간다!”
달시는 캐서린은 내버려 둔 채, 곧장 보스 방 문으로 돌격했다.
콰아아아앙!
그녀의 몸통 박치기에, 기숙사 크기만 한 보스 방의 문은 마치 과자처럼 와르르 부서져 내렸다. 캐서린은 그 모습에 또다시 혀를 내둘렀다.
먼저 보스 방 안으로 들어간 달시는 무언가 발견한 모양이었다.
“그리핀이잖아?”
보스 방 안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몸길이가 10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그리핀이었다. 그리핀은 자신의 둥지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침입자를 발견하고는 날개를 활짝 펴서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달시는 그리핀의 크기에 전혀 쫄지 않았다.
“으랴아아앗!!”
기합과 함께 달시는 바닥을 차고 달렸다.
순식간에 그리핀의 머리 밑으로 접근한 달시.
그리핀은 당황한 듯, 쭉 펴진 날개로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달시가 한발 빨랐다.
달시는 그리핀의 발밑에서 자세를 움츠리더니 순식간에 거의 5m가 넘는 높이를 도약하였다.
그리고 그리핀의 머리에 주먹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앙!
달시의 주먹을 맞고는 그대로 지면에 처박히는 그리핀의 머리.
달시는 그리핀의 머리를 바닥에 내리꽂는 동시에, 백 텀블링을 한 뒤 바닥에 사뿐히 착지했다.
“어떻게 주먹만으로 저런 소리가 나는 거죠? 게다가 저 파괴력은 도대체가…….”
그 모습에 캐서린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달시의 무력을 봐 왔지만, 보스까지도 이리 쉽게 상대할 줄은 몰랐었다.
다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키에에에에엑!
다시 머리를 드는 그리핀.
화가 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포효하고 있었다.
“와우, 크긴 크네.”
달시는 그 거대한 몸체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어차피 아무리 커 봤자, 달시 앞에서는 그저 독수리 한 마리로 보일 뿐이었다.
“조심해요!”
캐서린은 자신만만한 달시를 괜스레 걱정했지만, 달시는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걱정 마!”
달시는 또다시 그리핀에게 달려들어 거리를 좁혔다.
그에 반응하여, 그리핀은 이번엔 안 당한다는 듯이 날개를 퍼덕였다. 그러자 그리핀의 앞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소용돌이 안에 정면으로 뛰어 들어가는 달시 세이피어.
그런데 소용돌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어라라?”
점차 거세게 회전하기 시작하는 소용돌이.
그리고 그 소용돌이는 내부로 들어온 달시를 감싸고는, 중심부터 폭발하기 시작했다.
퍼퍼퍼퍼펑!!
달시의 몸은 눈앞에서 터진 소용돌이에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그러나 던전의 귀환 시스템으로 인해, 다행히도 그전에 몸이 먼저 사라지게 되었다.
문제는 혼자 남겨진 캐서린이었다.
“잠깐만요?!”
캐서린은 지금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키에에엑!
갑자기 목표물이 사라지자 그리핀은 성난 포효를 내지르며 앞발로 바닥을 쿵쿵 찍어 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왔던 길로 달려 나가기 시작한 캐서린.
그리핀은 도망치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소용돌이를 날렸다.
콰과광!
“꺄아아악!!”
다행히도 소용돌이는 이미 멀리 도망가고 있는 캐서린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캐서린을 놓친 그리핀은 곧 날개를 펄럭이더니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러고는 천장으로 날아올라, 도망치는 캐서린을 쫓기 시작했다.
“나, 나는 건 반칙이잖아요!”
사람은 아무리 빨라 봤자 그리핀의 속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핀은 순식간에 캐서린에게 발이 닿을 정도로 거리를 좁혔고, 캐서린의 머리를 움켜쥐기 위해 발톱을 내밀었다.
“꺄아아아아!”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풍압과 공포감에 캐서린은 이미 정신을 놓기 직전이었다. 그러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순간.
넘어지는 캐서린을 받아서 안는 남자가 있었다.
‘누, 누구…….’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품 안이 너무나도 포근했고, 몸에 닿는 온기가 참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캐서린은 누군지도 모를 이의 품 안에 몸을 맡긴 채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