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 *
던전 밖으로 귀환하자, 동급생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우와아아아!”
“미쳤다. 수석과 차석의 싸움 수준… 완전히 어나더 레벨이잖아!”
“방출계 마법사가 그런 식으로 마나를 방출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어. 저 정도면 이미 권좌급 마법사인 거 아니야? 도대체가 1학년 수준이 맞는 거야?”
“아니지. 그걸 막아 낸 수석이 훨씬 대단한 거지! 누가 감히 그걸 막을 생각이나 했겠어? 실제로 단번에 막아 냈잖아.”
“맞아. 수석은 괜히 수석이 아닌 것 같아. 정말 미쳤어!”
환호성과 함께 그들의 속닥거림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다만 입학식 때의 속닥거림은 듣도 보도 못한 평민에 대한 경멸과 멸시였다면, 지금은 온전히 존경과 인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슬쩍 옆에 있는 캐서린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내 옆에서 등을 쫙 펴고 가슴을 내민 채, 그러나 어딘가 수줍은 표정으로 당당하게 서 있었다.
본인의 싸가지 없는 태도로 알게 모르게 주변인들에게 따돌림받던 녀석이, 처음 받아 보는 관심과 환호를 받게 되니 나름대로 뿌듯한 모양이다.
물론, 그 관심과 환호의 대상은 대부분 나겠지만.
‘은근히 얘도 귀엽네.’
그 모습에 나는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리 ‘아카마’에서 캐서린이 밥맛 떨어지는 악녀로 나올지라도, 여기서 보면 영락없이 조금 삐뚤어졌을 뿐인 사춘기 소녀다.
게다가 지금 내 기분이 완전히 최고조이기에, 함께 승리한 캐서린이 더욱 긍정적으로 보이는 것도 있었다.
어느 정도 학생들의 호응이 끝이 보이자, 케이든 교수가 입을 열었다.
“잘했다. 역시 대단하군.”
여전히 무미건조한 어투와 목소리.
그러나 나는 저 선글라스 뒤에 경탄스러워하는 눈빛이 숨어 있음을 느꼈다.
학생들의 선망 어린 시선과 존경, 그리고 교수의 기대감. 그 모든 것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아카마’의 엑스트라 제로가 아니었다.
칼루스 아카데미의 아니, 이 세계의 또 다른 주인공 제로가 된 것이다.
* * *
케이든 교수의 칭찬이 끝나고 나서 수업은 종료되었다.
캐서린은 방금 전 전투 승리로 인한 뿌듯함과, 처음 받아 보는 사람들의 환호에, 가슴이 벅차올라 있었다.
그런 그녀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바로 제이드였다.
캐서린은 방금 전 전투의 얘기를 제이드와 나누고 싶었다.
‘좋은 승부였어.’라는 스포츠맨십.
혹은 ‘잘했어.’라는 격려.
무슨 말을 어떤 표정으로 그에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그녀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이 승리하고 이겼음을 자랑하고 뽐내고 싶었다. 이만한 실력이 있는 여자라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먼저 기숙사로 복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제이드의 위치를 찾았다.
둘러싸인 학생들 뒤편에서 보이는 제이드.
캐서린은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제이드……!”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곧 쥐구멍으로 기어들어 가기라도 할 듯이 작아졌다. 그것은 제이드와 함께 있는 샬롯 아메드를 발견해서였다.
캐서린은 뒤에서 그들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정말 죄송해요. 제가 이겼어야 했는데…….”
“어어? 아냐, 아냐! 나도 마찬가지로 졌는걸. 다음엔 더 잘해 보자고, 우리.”
“네. 다음엔 꼭 이겨 볼게요!”
패배한 그들은 멀어지기보다 오히려 사이가 돈독해진 것으로 보였다. 실실 웃으며 가는 그들의 뒤에서,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매우 좋았던 캐서린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잘한 거잖아……. 이긴 건 나인데…….”
왜인지 제이드는 샬롯을 챙긴다.
“나도 아팠단 말이야…….”
그녀도 제이드에게 아팠다고 말하고 싶었고, 괜찮냐는 말을 듣고 싶었다.
또르르―
캐서린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샬롯을 보는 제이드의 표정은 너무나도 다정하다.
캐서린에게는 지금껏 살면서 저런 표정을 지어 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었다.
캐서린은 한순간 제이드가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눈물을 살짝 훔쳤다.
“아니, 나쁜 건 다 저 여우 같은 년 때문이에요.”
나의 ‘제이드’는 나쁘지 않다.
모든 건 샬롯 아메드 때문이다.
그리고 캐서린은 지옥 불이 들끓는 눈빛으로 샬롯을 노려보았다.
* * *
드디어 주말이 찾아왔다.
나는 오랜만에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고, 좀 더 침대에 뒹굴거릴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힘든 일주일이었지…….”
고작 일주일 만에 수많은 일이 벌어지고, 또 일어났다.
“무엇보다 이젠 완벽히 배드 엔딩 플래그는 벗어난 거 같네.”
‘아카마’의 제로는 지금쯤 완벽히 게임에서 퇴장 조치당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다르다. 나는 이제 어엿한 칼루스 아카데미의 1학년 수석인 것이다.
기분이 좋은 나머지 나는 실실 쪼개며 침대 위를 뒹굴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주말의 단잠을 즐기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은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매일같이 1교시의 아침 수업을 듣다 보니 생활 패턴이 정착한 듯싶다.
“잠도 안 오고, 돈도 많은데, 어디 한번 플렉스나 해 볼까?”
그렇게 나는 아카데미 밖의 마을로 향했다.
일단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마정석 상점이었다.
나는 상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거의 사람 머리통만 한 마정석을 꺼내 카운터에 올렸다.
털보 점장은 저번의 무미건조한 반응과는 다르게 확실히 놀랍다는 리액션을 취하고 있었다.
물론, 그래 봤자 여전히 감정 변화가 뚜렷하진 않았지만, 어쨌든 저번보다는 확실히 친절해져 있었다.
“3, 3백 다트.”
“확실해요?”
“확실히 3백 다트다.”
300다트면 현실 돈으로 300만 원.
이만한 마정석을 내가 어떻게 갖고 있느냐, 하면 결론적으로 나는 던전 수업의 마정석을 제이드에게 양도받았었다.
어차피 모두가 모니터로 보고 있었기에, 그리핀을 내가 잡았다는 사실을 다들 부정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제이드 녀석의 성격이 워낙 좋기 때문에 그는 쿨하게 마정석을 나에게 양보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서브 이벤트의 보상과 함께 던전 클리어의 보상까지 얻게 된 것이다.
“자, 그럼 300만 원도 생겼겠다, 제대로 플렉스 해 볼까?”
그리하여 내가 찾은 곳은 의류 상점.
자고로 마법사라면 로브를 입기 마련이다. 나 또한 교복 위에 걸칠 로브를 찾기 위해 이곳에 들르게 되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대부분이 귀족이다 보니, 의류 상점에 있는 로브들의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그 비싼 로브들에는 저마다 효과가 적혀 있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예를 들면 ‘물리 피해 감소’ 효과가 있습니다! 라든지 ‘마나 회복 증가’ 효과가 있습니다! 라든지.
그러나 이 세계의 사람들은 스탯 같은 개념이 없었다.
효과도 대략적으로 알 뿐이지 정확하고 정밀하게 아는 것은 아니다. 시금치가 혈액 순환에 좋다고 대략 아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나는 이 아이템들의 정보를 세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아이템 정보〉
* 아이템: 마법사의 로브(F급)
* 설명: 겉만 번지르르하게 치장한 아무 효과 없는 로브이다.
이런 식으로 아이템에 손을 가져다 대면 그 마법 아이템의 정보가 눈앞에 시스템 창으로 나타난다.
“그나저나 이거 순 사기네? 분명히 물리 피해 감소라고 적혀 있는데, 실제로 아무 효과도 없어?”
나는 수많은 허위 매물 사이에서 쓸 만한 것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발견한 것은.
〈아이템 정보〉
* 아이템: 마법사의 로브(A급)]
* 설명: 착용 시 받는 피해를 감소시킬 수 있는 마법사의 로브이다.
* 효과: 모든 종류의 피해 흡수 10%
매우 쓸 만한 로브였다.
“모든 종류의 피해 흡수라니…….”
받는 피해 흡수 10%가 작아 보일 수 있지만, 이 정도면 매우 사기적인 수치다. 던전에서야 거의 게임과 같은 가상 공간이기에 버프 효과가 매우 컸던 거고, 현실에서 적용되는 수치로서는 높아 봐야 20% 정도다.
나는 좋은 매물을 발견한 거에 흡족해하며 쿨하게 300다트를 질렀다.
물론 적은 가격은 아니었다.
300다트면 내가 가진 돈의 전부긴 했다.
“뭐, 어차피 돈은 계속해서 벌 거니까.”
이번 주야 일이 너무 많아서 잠시 쉬지만, 다음 주부터는 다시 던전을 돌 거니까 돈은 앞으로 계속 벌 수 있다.
그리고 가끔은 이렇게 소비를 해 주어야 한다.
이른바 나를 위한 선물이란 거다.
이미 여러 번의 이벤트를 완벽히 수행해 냄으로써 들뜬 나는, 이 행복함을 계속해서 만끽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창 플렉스를 하고 기숙사에 복귀하던 와중 골목길에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캐서린 골드버그의 모습을 발견했다.
‘응? 캐서린이네?’
말을 걸까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학교 밖에서까지 인사를 나눌 정도로 나와 캐서린이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그냥 수업에서 짝꿍 한 번 됐을 뿐이잖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가던 길을 계속해서 갔다.
* * *
캐서린이 마을에 들른 이유는 자신을 좀 더 예쁘게 꾸며 줄 액세서리를 사기 위해서였다. 아카데미 내부에서는 교복을 입고 입기에 외모를 가꾸고, 치장할 거라면 역시 액세서리밖에 없었다.
이곳 마을은 아카데미의 근처에 있다 보니 많은 귀족이 방문하는 곳이었고, 그렇기에 나름대로 귀족들을 위한 사치품들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녀가 요즘 들어 부쩍 외모에 신경 쓰게 된 이유는 역시나 제이드. 여자의 마음으로 좀 더 예뻐 보이고 싶고, 그의 눈에 들고 싶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캐서린은 열심히 액세서리 숍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액세서리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녀의 마음에 드는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허탕만 치고 아카데미에 복귀하려는 그때.
어떤 노파가 그녀를 불렀다.
“학생!”
캐서린은 그런 그녀의 목소리를 한 번 무시했다.
“학생! 잠깐만, 멈춰 보게나.”
그제야 캐서린은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커다란 로브를 온몸 전체에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노파가 있었다.
“더러운 평민이 어찌 저에게 말을 거는 것이죠?”
“하하… 나는 일단 평민이 아니라네.”
“그런가요? 아무튼 무슨 용건인데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얘기하세요.”
“학생, 칼루스 아카데미의 사람이지?”
“그런데요?”
“뭐 찾는 물건이 있는가? 아까부터 상점을 돌아다니던데.”
“뭐예요. 지금까지 저를 지켜보신 건가요? 기분 나쁘네요.”
캐서린은 살짝 어이없다는 듯 노파를 째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이 노파는 이상한 물건을 파는 귀찮은 잡상인으로 보였다.
게다가 저번에 교육받은 내용이 떠올랐다.
불안정한 마도구를 파는 상인들이 아카데미 주변을 돌아다니니 주의하라는 교장 히로빈 그린월드의 연설. 그 내용이 떠오른 캐서린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상한 걸 팔 생각이면 당장 꺼지세요. 감히 저에게 말을 건 무례를 한 번은 용서해 드리도록 하겠어요.”
그러나 노파는 오히려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 모습에 캐서린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뭐, 뭔가요?”
“학생, 이건 어떤가?”
노파는 갑자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매우 아름다운 귀걸이였다.
캐서린은 그 귀걸이의 아름다움에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피, 필요 없거든요? 당장 썩 물러나세요!”
“학생, 좋아하는 남자가 있지?”
“네? 그, 그게 무슨 소리…….”
“이 바닥에 몇십 년 동안 있으면 자연스레 얼굴만 봐도 알 수 있거든. 학생, 잘 들어 봐. 이 귀걸이는 단순한 귀걸이가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 주는 마법이 담겨 있는 귀걸이지.”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 준다고요?!”
“그러엄. 효과는 확실하다네. 이미 수많은 졸업생이 이 귀걸이의 효과를 봤었지. 이 귀걸이는 좋아하는 사람이 착용자만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게야.”
캐서린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능력이 있는 마도구라니, 들어 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솔깃했다.
그만큼 제이드를 향한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었으니까.
“어, 얼만데요?”
“하하… 난 돈으로 장사하지 않아. 사람을 보고 장사하지. 학생이 이 귀걸이에 어울리는 사람이라서 특별히 주는 거라네.”
그리고 노파는 캐서린의 손에 귀걸이를 쥐여 주었다.
캐서린은 손에 들어온 탐스럽고 이쁜 귀걸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혹시라도 효과가 없으면 찾아오게나.”
노파는 또다시 킬킬대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반드시 효과는 나타날 것이니까.”
캐서린은 노파의 말에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귀걸이를 착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