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도착한 곳은 경기장 외곽의 숲속.
그곳에서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캐서린 골드버그와 제페토 골드버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발견하자마자 숨을 장소를 찾고는, 널찍한 바위 밑에 쪼그려 앉아 동태를 살폈다. 힐끔 상황을 훑어보니, 캐서린 쪽에서 뚜렷한 검은 마나가 일렁이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벌써 광폭화가 시작된 건가?!’
시기가 너무 일렀다.
아무리 ‘아카마’보다 현재의 스토리 진행이 빠르다곤 하더라도, 캐서린의 폭주는 학기 말에나 일어나는 이벤트였다. 만약 감지 마법이 없었더라면 그녀의 광폭화를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엇, 그러고 보니 난 어떻게 검은 마나를 감지할 수 있는 거지……?’
원작의 ‘아카마’에서도, 아카데미는 이러한 징조를 그녀가 완전히 광폭화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었다. 아카데미의 감지 시스템이 나 따위의 감지 마법보다 월등한 게 당연한데 말이다.
‘이것도 마법 주문서의 영향인 건가……? 어찌 됐든, 일단은 상황을 지켜봐야겠네.’
나는 조용히 캐서린과 제페토의 대화를 엿들으며 상황을 살폈다.
제페토는 캐서린을 향해 언성을 높이며 무언가를 따지는 중이었다.
“아까 예선전에서 안 보이던데, 너 설마 비무제에 참가 안 한 거냐?!”
“네.”
“도대체 왜?! 왜 참석을 안 한 건데!!”
“그게 무슨 상관이시죠?”
“뭐, 뭐라고?! 자랑스러운 골드버그 가문의 위세를 드높이기 위해선 당연히 참가하는 것이 마땅하지! 너 뭘 좀 잘못 먹은 거 아니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같은데?!”
아무래도 제페토가 캐서린에 대해 따지고 있는 내용은, 비무제의 참가 여부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았다.
하긴, 아카데미조차 눈치채지 못한 그녀의 광폭화인데, 고작 쌍둥이 오빠일 뿐인 제페토가 그것을 눈치챘을 리 없었다.
다만, 그녀의 반항하는 듯한 행동에는 광폭화의 영향이 없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비무제를 안 나왔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캐서린의 모습이 모니터에 잡히지 않긴 했었다.
단순히 골드버그 가문의 입장을 떠나, 외부인인 내가 봐도 캐서린이 비무제에 불참할 이유는 딱히 없는데 말이다.
‘저번 주만 해도 문제없었잖아?’
대인전 수업에서 승리했을 때 마치 소녀처럼 기뻐했던 캐서린이었다. 게다가 그 승리 자체도 나한테 업혀 간 것이 아니고, 본인 스스로 쟁취한 것이었다.
라이벌이자 앙숙인 샬롯을 이겨 낸 캐서린이, 현재 마기에 침식되어 있는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페토를 노려보고 있던 캐서린은 피식 실소를 내뱉었다.
“오라버니야말로 언제까지 그렇게 사실 건가요?”
“뭐……?!”
“가문? 명예? 그런 하찮은 가치를 언제까지 좇을 거예요?”
“너 지금… 뭐라 했냐?”
“두고 보세요. 곧 제가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줄 테니까. 그저 허울뿐인 오라버니와 저는 분명히 다르…….”
짝!!
가만히 듣고 있던 제페토가 캐서린의 볼에 따귀를 날렸다.
그리고 잠깐 동안 둘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잠시 고요해진 숲속.
그 둘의 침묵을 깬 건 캐서린 쪽이었다.
“푸흡…….”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빨개진 볼을 어루만지면서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푸흐흐흡… 푸흐흡… 푸하하하핫!”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페토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너 정말 미친 거냐?!”
“크하하하하하핫!!”
캐서린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당황한 건 그 모습을 멀리서 훔쳐보고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뭐야. 저건…….’
아무래도 지금 캐서린의 상태는, 게임 속 폭주 이벤트가 시작하고 난 이후의 모습과 흡사해 보였다.
‘벌써 꽤 광폭화가 진행된 건가…….’
여전히 말버릇인 존댓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완전히 마인이 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상당 부분 검은 마나에 잠식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미, 미친년……. 이런 광녀를 동생으로 둔 나 자신이 부끄럽고 한탄스럽다. 너는 골드버그 가문의 크나큰 치욕이야.”
제페토는 계속해서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캐서린을 내버려 둔 채 숲을 떠났다.
제페토가 사라질 때까지 여전히 큰 소리로 웃고 있는 캐서린.
이내 그녀는 제페토가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난 걸 확인하자 입을 열었다.
- 훼방…꾼은… 사라…졌군.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본래의 목소리가 아닌, 차갑고 가라앉는 듯한 기괴한 목소리였다.
왠지 기분 나쁘고 또 악마 같은 으스스한 목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았다.
- 그러엄… 슬슬… 시작해 볼까……?
그 말을 끝으로 캐서린도 숲을 떠나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서 숲에 남은 것은 나 혼자뿐이었다.
* * *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려나…….”
예정보다 빨리 시작된 비무제.
그리고 더더욱 이른 시기에 진행되고 있는 캐서린의 광폭화.
그것은 1학년 말쯤에야 시작될 침공 이벤트도 충분히 앞당겨질 수 있다는 소리였기에 조금 걱정이 들었다.
침공 이벤트는 풀세팅한 ‘아카마’의 제이드조차도 막기 힘들었던 매우 높은 난이도였다. 만약 지금 당장 침공 이벤트가 발생한다면 현재의 내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미연시 게임에서 침공 이벤트라니… 애초에 말도 안 되는 거였긴 하네.”
사실 원래의 ‘아카데미의 마법사’ 게임에서 침공 이벤트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저 여주인공 샬롯 아메드, 루비 버밀리온, 에메릴 그린월드 중 한 명을 선택하여 연애하는 평범한 미연시 게임이었을 뿐이다.
‘아카마’를 플레이하던 많은 플레이어는 미연시 게임에 왜 아이템이 있고 파밍할 수 있는 던전이 있는지 종종 의문을 품곤 했었다.
그리고 히든 엔딩에 도달한 나는 비로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주인공을 선택하지 않는 히든 엔딩에서만, 안티 매지션에 의한 침공 이벤트가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나는, 새 회차를 할 때마다 시작부터 파밍을 하면서 침공을 막기 위해 캐릭터를 성장시켰었다.
그리고 결국 침공 이벤트를 클리어하고 히든 엔딩에 도달하여, 지금 이곳에서 새로운 진엔딩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히든 엔딩이, 침공 이벤트의 수비에는 성공하지만, 주변 인물들이 전부 안티 매지션에 의해 희생되는 결말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주인공을 제외한 엑스트라의 몰살 엔딩.
게임으로서도, 그리고 지금의 현실로서도 끔찍한 결과다.
“아마도 나는 몰살 엔딩을 막기 위해 이곳으로 보내진 거겠지……? 그게 이 게임의 진엔딩일 테고…….”
한참 동안 그러한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이내 스스로가 너무 심각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잡생각을 떨쳐 냈다.
“나도 참, 어울리지 않게 진지해지고 있었네. 어차피 뭐, 지금 당장 시작되겠어? 그래도 제작사 측이 밸런스를 맞춰 준 듯한 노력은 느껴지잖아?”
지금까지 이곳에서 불만은 있었어도, 큰 불합리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이벤트든 선택지든 간에 어쨌든 나에게 엄청난 손해를 입히진 않았었다. 오히려 이득이라면 이득이었지.
그러고 보니 이렇게 이벤트가 앞당겨지는 것도 어쩌면 플레이어를 배려해서 빠르게 귀가시키려는 듯한 제작사의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곳이 썩 나쁘진 않은데.”
나름 이곳에서 수석이라는 것도 해 보고, 사람들의 존경이 담겨 있는 시선도 받아 보고, 미모의 동급생들과 친구도 해 보고, 나쁘지 않은 생활이라 볼 수 있었다.
“그나저나 캐서린은 조금 불쌍하네.”
저번 주만 해도 캐서린은 그저 조금 질투심이 있고 공주병에 걸렸을 뿐인 평범한 여학생이었다. 그런 캐서린이 어쩌면 이 시스템의 피해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갑자기 광폭화가 진행된 거지…….”
멀쩡하던 캐서린이 하루아침에 저렇게 변했을 리가 없다.
분명 ‘아카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캐서린이 광폭화되기 전까지 아카데미 측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그녀는 광폭화 이후 처리되어 사망했기 때문에, 원인을 끝끝내 알 수 없었다.
“일단 내일은 캐서린의 상태를 살펴봐야겠네.”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아카데미의 밤이 지나갔다.
* * *
다음 날도 어김없이 아텔라 교수와 함께하는 특훈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 막 3일 차일 뿐인데, 어느덧 운동장 열 바퀴가 조금 편해진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원래였으면 느꼈을 근육통 같은 게 마법으로 해결되다 보니 좀 더 빠르게 근육이 붙은 것 같았다.
아텔라 교수는 이런 내 컨디션이 좋아 보였는지, 어제보다 더 훈련 강도를 올렸다. 그리하여, 다섯 바퀴를 더 돌고 나서야 훈련은 종료되었다.
“헥… 헥…….”
“오늘도 고생했다.”
“네에…….”
“그럼 의무실에 갔다 오고, 이따 경기장에서 보자?”
나는 바닥에 털썩 누워 있는 채로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오늘 예선전은 안 볼 거 같아요.”
“응? 왜?”
“…할 일이 있거든요.”
아무래도 나는 캐서린 골드버그를 이대로 지켜만 볼 수 없었다.
* * *
의무실에 들르고 나서, 나는 바로 감지 마법을 사용해 캐서린의 위치를 찾았다.
학생들 대부분이 경기장에서 파이널 예선전을 관람하고 있는 와중이었기에, 비교적 그녀의 위치를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캐서린의 검은 마나는 숲의 깊숙한 곳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숲에는 왜 들어가 있는 거지?’
나는 숲으로 들어가 그녀의 발자취를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저건?!’
육안으로도 보이는 캐서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나.
그리고, 캐서린은 마물로 보이는 무언가의 사체를 생으로 뜯어 먹고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팔뚝에서 마물의 검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마물을 생으로 먹는다고……? 그래서 그렇게 순식간에 마기가 불어난 건가?’
일반적인 마법사가 마물을 먹는다고 해서 마기가 옮을 리는 없다.
다만, 지금의 캐서린은 애초에 검은 마나에 잠식된 몸이었기에 마물을 생으로 섭취함으로써 마기를 증폭시키고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아카데미의 숲에는 마물이 가득하기에, 캐서린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뷔페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가냘픈 손으로 괴물의 팔뚝과 다리 살을 뜯어서 우걱우걱 씹고 있는 캐서린의 모습. 그것이 너무나 그로테스크하여 충격과 공포감을 주었다.
캐서린과 대화할 생각으로 그녀를 쫓아 온 나는, 충격에 빠져 그녀의 섭취가 끝날 때까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우적우적.
잘근잘근.
기이한 그녀의 저작 소리는 어느덧 꽤 시간이 흐르자 들리지 않고 있었다.
조용히 나무 뒤에 숨어 있던 나는, 소리가 멈추자 캐서린 쪽을 흘끔 확인했다.
그런데,
“여기서 뭐 하고 계시는 거죠?”
갑자기 내 눈앞에 서 있는 캐서린.
나는 난데없이 튀어나온 그녀의 모습에 침을 꼴깍 삼킨 채 말없이 허리춤의 언노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녀의 입가와 팔뚝에 뚝뚝 흐르던 검붉은 피는 거짓말같이 사라져 있었다.
“대답하세요.”
“그게… 길을 잃어서…….”
나는 변명하는 와중, 캐서린의 눈치를 조심스레 살폈다.
아직 완전히 광폭화가 진행된 것은 아닌 듯 보였으나 긴장을 늦출 순 없었다.
“…길을 잃으셨다고요? 푸흡…….”
내 말에 캐서린은 고개를 푹 숙이더니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푸핫하하핫! 길을 잃었다라?!”
그 모습에 나는 언노운을 잡은 손을 더욱더 거세게 쥐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녀는 공격할 의사가 없어 보였다.
“오늘은 그냥 넘어가 드릴게요. 내일 있을 의식 전에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으니까.”
내일 있을 의식?
나는 그녀의 말에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끔벅끔벅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부디 오늘 본 일을 발설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지금은 한때 파트너로서의 정으로 넘어가 주는 거니까.”
말을 마친 캐서린의 발밑에는 검은 웅덩이가 생겨났다.
그리고 그녀는 그 웅덩이로 빨려들어 가더니 이내 자취를 감췄다.
혼자 남겨진 나는 그제야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