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 *
다음 날 오전.
드디어 비무제 본선 경기의 막이 올랐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기다리고 기다리던 칼루스 아카데미 비무제, 그 본선 무대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와아아아아!
학생들과 외부에서 온 귀빈들의 함성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가뜩이나 크지 않은 칼루스 아카데미의 경기장은 이미 만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럼 본격적인 경기 진행에 앞서, 오늘 이곳에 와주신 위대한 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물질계 권좌이자 버밀리온 가문의 당주, 협회장 아이작 버밀리온 님입니다!!
진행자의 소개말 뒤에, 중앙의 모니터 화면에는 붉은 머리의 늙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경기장 북쪽에 위치한 귀빈석에 앉아 있었는데, 널찍한 의자 위에서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차가운 눈빛으로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 그리고 다음으로는 원소계 권좌, 마경청장 올리비아 페리윙클 님입니다!!
모니터가 잠깐 깜빡이더니 곧 아이작 버밀리온의 모습이 사라지고, 화면에는 마경의 제복을 입고 있는 곱게 나이를 먹은 듯한 중년 여성의 모습이 나타났다.
경기장의 남쪽에 앉아 있는 그녀, 올리비아 페리윙클은, 차가웠던 협회장의 이미지와는 대조되게 온화한 눈웃음을 지어 사람들을 반겼다. 그녀의 눈가에는 곱게 늙은 듯한 주름이 자글자글 맺혀 있었다.
- 이번 비무제 동안 무려 이 두 분이 함께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경기 내용도 기대되는데요. 그럼 16강, 그 첫 번째 경기를 시작― 하겠습니다!!
그렇게 본격적인 비무제 16강이 시작되었다.
* * *
이제 막 16강 본선 무대가 시작되고 있을 무렵.
케이든은 마경청장의 호출을 받고 경기장의 남쪽 구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복도를 또각또각 걸어가고 있던 그때, 멀리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선배! 오랜만이야?”
그곳에는 헐렁한 옷을 입고 있는 30대 초반의 남자가 손을 흔들며 달려오고 있었다. 케이든은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멈춰 서서 선글라스의 콧대를 추켜올렸다.
“오랜만이군, 실베르.”
케이든이 실베르라고 부른 남자, 실베르 라인하르트.
그는 마경의 최고위 간부였다.
“정말 오랜만이네. 이제 완전 교수님이 다 됐잖아? 잘 지내는 거 같아 보기 좋아.”
“너는 변함없이 소녀 같은데. 도대체 그 머리를 단정히 자를 생각은 없는 거냐?”
“하하… 역시 선배는 여전하네.”
실베르는 멋쩍은 듯 어깨 아래까지 내려온 은색 장발을 쓰다듬었다.
그 수줍은 모습에 케이든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소식은 들었다. 이번에 강화계 권좌가 되었다지?”
“어? 알고 있었어? 선배가 알아주니 되게 고마운데. 뭐, 운이 좋았지. 알다시피 세이피어 영감님이 돌아가신 이후에 마땅한 인재가 없었잖아.”
“그렇다기엔 최연소 권좌잖냐.”
‘권좌’라는 것은 직위라기보다는 일종의 명예였다.
마법부가 선정하는 것이기에 그 기준 자체는 애매모호했지만, ‘권좌’의 칭호를 부여받은 자가 그 계열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마법사라는 것에는 다들 이견이 없었다.
게다가 실베르는 ‘강화계’의 권좌였다.
‘원소계’와 ‘강화계’는 다른 계열 마법보다 인구수 자체가 훨씬 많은데, 그 수많은 강화계 마법사 중에서 ‘권좌’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에이, 선배도 저 협회장 영감탱이만 없으면 사실상 권좌나 다름없잖아? 저 영감은 언제 뒤지려나 몰라.”
“그런 소린 하는 거 아니다. 마경은 요새 어때?”
“선배 있었을 때나 똑같지, 뭐. 그래도 요즘은 좀 안티 매지션들이 줄어든 추세긴 한데… 뭐,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활동을 축소하고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다. 왜 지금껏 한 번도 안 놀러 왔어?”
“내가 거기 갈 일이 뭐가 있냐.”
“에이, 그래도 한 번쯤은 보러 올 수도 있었잖아? 교수 일이 그렇게 바쁜 것도 아니고 엄연히 방학이란 것도 있는데. 청장님도 되게 보고 싶어 하셨다고. 얼른 뵈러 가자.”
그렇게 케이든은 실베르 라인하르트와 함께 경기장의 남쪽 구역을 향해 걸어갔다.
이윽고 도착한 남쪽 구역에서, 마경청장 올리비아 페리윙클은 온화한 눈웃음으로 케이든을 맞이했다. 케이든은 그녀를 보자마자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왔군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예, 청장님.”
“그동안 왜 한 번도 오지 않으셨나요? 일이 많이 바쁘셨나요?”
“그건… 어쩌다 보니까…….”
“거봐, 내가 뭐랬어? 청장님도 선배 엄청나게 보고 싶어 하셨다니까.”
옆에서 거드는 실베르의 말에 케이든의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한때 이들과 함께 마경에서 안티 매지션을 단속하고 검거하던 그는, 이제 칼루스 아카데미의 평범한 교직원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협회장님과 청장님까지… 무슨 일로 직접 비무제를 참관하시게 된 겁니까?”
매년 열리는 칼루스 아카데미의 비무제에, 협회장과 마경청장이 직접 참관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올리비아는 케이든의 말에 다시금 온화한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우아한 손사래를 쳤다.
“글쎄, 저 늙은 협회장 노인네가 이번 비무제를 기어코 참관하겠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저도 오지 않을 수 없잖아요.”
“그렇게 된 거로군요.”
올리비아의 말을 들은 케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듣고 있던 실베르가 끼어들었다.
“어지간히 자식 사랑이 지나친 영감이네. 하긴 장남이 그렇게 됐으니, 하나뿐인 딸이 소중할 수밖에…….”
“…실베르.”
“앗… 미안 미안…….”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던 실베르는, 케이든이 주의를 주자 그제야 자신의 말실수를 깨달았다.
올리비아는 알아서 주의를 주는 케이든의 모습에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번 비무제에 눈여겨보고 있는 학생이 혹시 있나요?”
올리비아의 말에 케이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제 제자 중에 꽤나 재밌는 학생이 있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마경청장님.”
“케이든 교수가 그렇게 말할 정도라고요? 좀 흥미가 생기네요.”
그리고 케이든 교수가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인물은 역시나…….
…‘제로’였다.
* * *
“이제 곧 차례네. 물론 제로라면 걱정 없을 테지만.”
대기실에 나란히 앉아 있던 루비 버밀리온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지만, 그녀의 말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오늘의 본선 경기 자체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캐서린 골드버그 때문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마물을 생으로 뜯어 먹고 있던 캐서린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 그로테스크한 모습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아서 어젯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었다.
현재, 내 머릿속에는 갖가지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첫째, 그냥 신경 끄고 내버려 둔다.’
어차피 ‘아카마’에서도 캐서린의 광폭화는 그리 큰 피해를 입히진 않았었다. 단지 캐서린이 사살되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문제였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살되는 건 너무 심하잖아. 그렇다면 둘째, 아카데미에 신고한다……?’
아직 캐서린은 완벽히 광폭화의 변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지금 신고하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아카데미에는 비무제의 본선으로 인해 협회장과 마경청장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캐서린이 마기를 사용했다는 죄목으로 처벌받을 게 분명했다.
이 세계에서 마기를 다루는 것은 심각한 중범죄니까.
‘어찌해야 될까……. 셋째, 내가 해결한다?’
그런데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애초에 ‘아카마’에서도 광폭화된 캐서린을 죽여서 처리했었는데 지금이라고 다른 방법이 있을까?
‘아냐. 아직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 걸 거야. 이벤트가 발생한 것도 아니잖아?’
캐서린의 광폭화 이벤트는 분명 ‘아카마’에서는 거의 메인 이벤트 중 하나였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흐름상,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면 이벤트 창이 나타나야 마땅한 상황이었다.
나는 결국 아직은 괜찮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느 정도 머릿속을 정리하자 주변에서 나를 부르던 소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제…로…….”
“제…로……!!”
“으응?!”
옆을 살펴보니, 루비 버밀리온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살짝 화난 듯한 어투를 보아, 내가 생각에 빠져 있던 아까부터 나를 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야, 왜 이제야 대답해? 지금까지 무슨 생각 하고 있던 거야?”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다음 경기 생각하는 거야? 걱정 마. 오스카 큐리어스가 아무리 강해 봤자, 너한텐 안 될 테니까.”
“오스카… 큐리어스?”
“뭐야. 설마 본인 대진 상대도 모르고 있던 거야?!”
“그게 누군데?”
“예선전 때 골렘 조종하던 사람이잖아!”
“아…….”
그 녀석인가.
사실 어제부터 캐서린 생각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대진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있었다.
‘가만, 오스카 큐리어스라…….’
아네락샤 기숙사의 정신계 마법사.
특이점은 마력이 엄청나게 뛰어나서 어지간한 마물은 전부 조종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다지 큰 비중은 없었지만, 나름 ‘아카마’에서도 비무제 본선에 진출했던 실력자였다. 다만, ‘아카마’에서 제이드와 엮인 적은 적었기에 그에 대한 정보가 많진 않았다.
“절대 그 사람한테 지면 안 된다?”
“응? 뭐, 지진 않을 거지만… 왜?”
“예선전 때 우리 기숙사 상대로 공격해 왔던 사람이잖아. 파이널 예선전에서도 그랬었고. 지면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으응.”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루비의 살짝 뾰로통한 표정을 보아, 어지간히 예선전 때 일을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16강 진행 방식은 알고 있지?”
“응? 그건 또 뭔데?”
“뭐야! 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거야?! 경기 중인 달시 화면 지금까지 안 보고 있었어? 도대체 무슨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루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올려 모니터를 확인했다.
그 안에는 여러 마물에 뒤덮여 있는 달시 세이피어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 본선 16강의 종목은 ‘왕의 유적’이야.”
“왕의 유적?”
이것도 역시 ‘아카마’에서 해 본 적 없는, 처음 들어 보는 종목이었다.
“응. 왕의 유적은 랜덤한 종류의 마물 다섯 마리가 배치된 던전에서 진행돼. 승리 조건은 그 마물 다섯 마리를 전부 처리하거나, 상대를 강제 귀환시키는 것. 그런데 어지간해서는 마물은 무시하고 상대를 노리는 게 좋아.”
“왜?”
“그야 마물 한 마리, 한 마리가 어지간한 던전의 보스만큼 강하거든. 당연히 그 다섯 마리를 처리하는 것보단 상대를 직접 공격하는 게 낫지. 저기 달시 봐 봐.”
루비는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곳에는 마물에 둘러싸였던 달시가, 어느새 그 포위망을 뚫고 상대를 향해 돌격하는 모습이 잡히고 있었다.
“달시조차도 몬스터를 무시하고 상대를 공격할 정도잖아.”
“너도 달시 세이피어를 아무 생각 없는 무대포 녀석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였어?”
“어… 어? 그,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저게 바른 판단이라고!”
루비의 얼굴이 입고 있는 로브 색만큼 새빨개졌다.
역시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달시를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었다.
- 16강 그 첫 번째 경기! 승자는 달시 세이피어입니다!! 다음 두 번째 경기는 무려 이번 1학년생의 수석이자 본선 시드권을 부여받은 제로 학생이 출전한다고 하는데요? 그에 맞서는 상대는 예선전 때 활약했던 아네락샤 기숙사의 오스카 큐리어스! 정말 기대가 됩니다!!
화면에서는 달시의 승리를 알리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곧 대기실을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럼, 갈게.”
“응. 꼭 이기고 와.”
“먼저, 8강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따라오든가.”
“당연하지!”
나는 짐짓 허세를 부리며 대기실 문밖으로 나섰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캐서린에 대한 걱정이 사라지고, 눈앞의 경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