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 *
끝이 없는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캐서린.
그녀는 두 눈을 감은 채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주위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칠흑의 공간.
계속해서 아래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만이 현재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제가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거죠……?’
그녀는 현재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왜 이러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점차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그 무기력한 느낌 속에서, 캐서린은 어떻게든 정신을 유지하려고 손을 허우적대며 발버둥 쳤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지 망각하지 않기 위해 지난 기억을 떠올려 보려 애썼다.
제일 처음 떠오른 기억은 가장 최근의 기억이었다.
‘그렇죠, 참. 저는 샬롯 아메드를 죽이려 했었죠.’
죽이다.
말 그대로 그녀는 샬롯 아메드를 살해하려 했었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누군가의 명령인지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는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게 잘못된 행위인지 아니면 당연한 행위인지조차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당시의 마음속에는 오직 샬롯을 죽이고자 하는 욕구와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남자는 누구였죠…….’
그런 그녀를 막아섰던 한 남자.
캐서린은 남자의 얼굴을 떠올려 보려 애썼지만, 도무지 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곧 캐서린은 남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스스로의 기억에 집중했다.
‘저는 누구였죠…….’
그녀의 기억은 점점 역행하기 시작했다.
수업 시간의 일과.
입학식 날의 기억.
계속되는 기억의 파노라마 속에서, 마침내 캐서린의 의식은 그녀의 어린 시절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물밀듯이 흘러들어 오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래요. 전 골드버그 가문의 딸이었어요.’
캐서린은 소환계 영웅의 가문, 골드버그의 쌍둥이 남매 중 동생으로 태어났었다. 아버지는 지독한 권위주의자였고, 그들을 어렸을 때부터 혹독히 가르쳤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아버지만의 영향이 아니었다.
‘우월함’
골드버그의 가풍은 바로 그 우월주의였다.
골드버그 가문의 사람은 항상 남들보다 뛰어나야 했고, 앞서 나가야 했으며, 남을 깔볼 줄 알아야 했다.
어렸을 적 캐서린은 그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더더욱 불행하게도, 그녀는 골드버그 가문 출신치고는 재능이 없는 편이었다.
반면, 그의 쌍둥이 오빠 제페토 골드버그는 달랐다.
그는 7세 때부터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고 13세엔 이미 고유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골드버그 가문 내의 사람들은 두 쌍둥이 남매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 제페토 가문의 두 남매 중 동생 쪽은 아직 고유 마법도 사용 못 한다면서?
- 아무리 제페토가 오빠라지만 둘이 쌍둥이 아니에요? 어쩜 저렇게 차이가 날 수 있을까…….
- 쯧쯧…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계집 같으니라고…….
다행히도 캐서린은 주변의 시선에 상처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감정과 진심을 꼭꼭 숨겨 마음속 한구석에 가둬 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마음에 가면을 쓴 채, 골드버그 가문의 영애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가문의 다른 사람들처럼 남을 깔보고, 비난하고, 짓밟고.
그럴수록 가문의 사람들은 서서히 그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캐서린 골드버그는 한평생을 살아왔다.
그러던 그녀가 이 칼루스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 처음으로 그 새장 속에 갇혀 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렇군요. 이 또한 제 죄겠죠.’
그제야 캐서린은 모든 것이 기억났다.
평민에게 사랑을 느낀 것.
샬롯을 질투한 것.
질투에 눈이 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도구를 사용한 것.
그리고 점차 그 마도구 속 마기에 잠식되던 것까지.
캐서린은 누군가를 탓하지 않았다.
잘못한 것은 다 자신의 못난 감정과 마음 때문.
처음으로 가문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뜻으로 무언가를 쟁취하고자 했을 때의 벌.
지금 그녀는 그 벌을 달게 받고 있는 것이다.
‘…이젠 지긋지긋해요.’
캐서린은 모든 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락으로 빨려들어 가는 몸을 그 흐름에 맡겼다.
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있을 그때,
- 캐서린! 캐서린!!
어둠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가 있었다.
‘누구…죠?’
캐서린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선 새로운 감정이 불어나고 있었다.
그 감정의 이름은 바로 ‘희망’.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녀가 의지할 곳은 이제 그 목소리밖에 없었다.
반복되는 목소리의 메아리에서, 그녀는 이윽고 진심을 내뱉었다.
‘구해… 주세요…….’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
그리고 간절히 원해 왔던 것.
새장 속에 마음을 가둔 그녀는, 지금껏 자신을 구원해 줄 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 *
“젠장!!”
캐서린 골드버그, 아니 이제는 캐서린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눈앞의 5m가 넘는 나무 괴물은 계속해서 촉수를 날려 대고 있었다.
캐서린은 눈을 감고 있는 머리만이 빼꼼 내밀어져 있을 뿐, 이미 거대한 칠흑의 나무 속에 벗어날 수 없이 갇혀 버린 것이다.
게다가 언노운의 검기는 저 거목에게 통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날아오는 촉수를 피해 도망치기 급급할 뿐이었다.
“어째서 언노운의 공격이 먹히지 않는 거지?!”
분명 언노운은 보스급 마물을 단 두 방에 잡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언노운의 검기는 저 괴물에게 타격조차 입히지 못하는 것이다.
내 말에 언노운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 아마도 지금 네놈의 마나로는 무리인 상대인 거겠지.
역시 그런 건가.
애초부터 무모한 생각이었다.
시스템의 도움도 아카데미의 도움도 없이, 오직 내 힘만으로 캐서린을 마인화에서 구해 내겠다니. 너무나도 큰 욕심이었다.
다만, 나는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내 다급한 절규에 언노운은 넌지시 조언을 해 주었다.
- 마나를 발산하지 말고 검신에 집중시켜라. 검기를 날려 마나를 기폭시키는 것보단, 검날에 밀집시켜 사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게야.
“알겠습니다…….”
나는 곧바로 언노운의 어드바이스에 따라 마나를 검 끝에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 이 오러 블레이드의 형식은 아까 전, 그림자 괴물을 베어 낼 때도 사용했었다.
다만 그 차이는, 아까는 그저 마나를 발산시키기 전 몸풀기로 사용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검기를 발산할 때의 거대한 마나를 온전히 검날에 집중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쉽지 않네.”
온 신경을 검신에 집중시켜 봤지만, 마나는 계속해서 검 끝으로 빠져나갔다. 발산할 수 있는 최대량의 마나를 온전히 검신에 담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괴물은 가만히 기다려 주지 않았다.
콰과과과과광!
곧 거목의 몸체에서부터 뻗어진 뿌리가 대지를 가르며 맹렬히 돌진하고 있었다.
“칫… 젠장!!”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러고는 맹렬히 돌진하고 있는 뿌리의 소리를 무시한 채, 온전히 검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극한의 상황에 내몰아서인지, 아까보다 오히려 신경이 예리해진 느낌이었다.
이윽고 나는 뿌리가 내 몸을 관통하려 하는 일촉즉발의 순간, 검신에 마나를 투영하는 것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그것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촤아아악!
놀랍게도 검기에는 전혀 대미지를 입지 않던 뿌리가, 지금의 오러 블레이드에는 단 한 번에 베어졌다.
“역시 오러 블레이드라는 건가. 그런데 나, 아직 검술은 배우지 못했는데…….”
애초에 언노운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검술 수업 진도 좀 빼놓을 걸…….”
아쉽지만 지금은 후회할 입장이 아니었다.
콰과과과광!
또다시 거목에게서 뻗어 나오는 뿌리가 대지를 긁으며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주저 없이 지면을 박차며 앞으로 진격하는 두 발.
나는 뿌리를 향해 정면으로 돌진했다.
그러고는,
사아아아악!
단숨에 눈앞의 뿌리를 베어 냈다.
그리고 캐서린을 가둔 나무를 향해 더욱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눈앞의 괴물은 단순히 뿌리를 날리는 것만이 아니었다.
녀석이 방금 뿌리를 보내면서 심어 놓은 또 하나의 뿌리.
그 두 번째 뿌리가 내가 밟는 영역에 고개를 내밀었다.
촤르르륵!
순식간에 지면 위로 튀어나온 뿌리는 그대로 내 옆구리를 스쳤다.
“으으윽!!”
촤아아악!
나는 황급히 옆구리로 뻗어 나가는 뿌리를 베어 내고는 잠시 물러섰다.
상태를 확인하니 이미 교복은 상당한 양의 피로 젖어 있었다.
나는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상처를 확인하고는, 지혈을 위해 교복 상의의 밑부분을 모아 잡고 거칠게 묶어 버렸다.
잠시 멈춰 서서 거칠게 호흡을 내쉬고 있자, 눈을 감고 있는 캐서린의 입가가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냐고……?”
괴물의 질문에 나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이젠 과연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 미…쳤…군.
“미치광이 괴물이 미쳤다 하는 거면 그거 칭찬인가?”
녀석의 ‘미쳤군’이라는 말을 들으니, 비로소 나는 내 행동의 이유를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내 뒤에 의식을 잃고 있는 샬롯 아메드와 저 괴물 속에 갇힌 캐서린 골드버그를 구해 낼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이들을 이 지경까지 끌고 온 것은 결국 나였으니까.
그들을 구해 내지 못한다면, 결국 이 모든 일은 내 오만과 아집의 결과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캐서린에게 구해 준다고 선언한 내 자존심도 달려 있었다.
‘지키지 못할 말은 안 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지…….’
다시 달려 나갈 준비를 갖춘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진짜 미친 게 뭔지 제대로 보여 줄게.”
그러고는 죽을힘을 다해 괴물에게 뛰기 시작했다.
괴물은 그 기세에 당황한 듯 황급히 있는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다.
지면을 가르는 뿌리들.
뻗어져 나오는 촉수들.
그중 몇몇을 쳐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미숙한 검술 탓인지 미처 베어 내지 못한 작은 촉수들이 내 몸을 관통했다.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방법은 이거밖에 없어.’
원거리에서 날리는 검기는 저 괴물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결국 괴물에게 근접해야 하는 것인데, 상처 하나 없이 온전히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차피 입을 상처 화끈하게 맞아 주자는 마인드.
결국 그것이 내 최후의 선택이었다.
- 정…말 미쳤…어.
괴물의 어투에서 진심으로 당황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무시한 채 달릴 뿐이었다.
촉수가 어깨를 관통했다.
그리고 또 뿌리가 허벅지를 베어 냈다.
이제 온몸은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박혀 있어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달렸다.
이미 내 머릿속에 잡념은 없었다.
오로지 ‘캐서린을 구하겠다.’ 그것만이 내 피투성이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린 나는, 이윽고 거대한 나무 앞에 도달했다.
“하아… 하… 하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입가에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언노운을 맞잡은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나무의 밑동에 깊게 찔러 박았다.
쑤우우우욱!
- 크아아아아아악!!
고통 가득한 비명을 내지르는 괴물.
언노운에서 흘러나오는 흰색 기운은 순식간에 괴물의 검은 몸체를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몸체에서 튀어나오던 뿌리와 촉수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캐서린의 몸으로 말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캐서린.
그녀는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던 나무가 전부 사라지자,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캐서린은 하늘에서부터 지면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투욱!
나는 떨어지는 캐서린을 온 힘을 다해 받아 내고는 땅에 눕혔다.
그러고는 언노운을 지팡이 삼아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해, 해치웠나…….”
온몸에 성한 구석이 없었다.
솔직히 이렇게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부터가 기적이었다.
‘…피곤…하네.’
이제 슬슬 눕고 싶었다.
온몸에 피로가 몰려와 눈이 감겼다.
그런데 그때,
사아아아아.
누워 있는 캐서린의 검은 드레스에서 다시금 천천히 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끝이 아니라고……?”
절망스러웠다.
도저히 그녀를 구할 방법이 없는 것인가?
정녕 그녀를 베어 내야 끝나는 것인가?
“방법이… 없는 건가.”
그런데 그때,
- 하나 있긴 하지.
언노운이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 방법은 간단하다. 저 계집은 아직 완전히 마인화가 되지 않아 몸속의 마기가 완벽히 융합되지 않았을 테지. 마기는 높은 농도의 마나로 이동한다. 따라서 네놈의 마나를 저 계집에게 주입하면 자연스레 마기는 네놈의 몸속으로 흡수될 게야.
삼투(滲透) 현상 같은 건가.
문득 언노운의 말을 들으니 저번 주 과학 시간에 들었던 수업 내용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 수업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 다만, 마기를 흡수한 네놈은 죽거나 마인이 되겠지.
“그런가요……. 그거참 무섭네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몸에선 이미 불투명한 무색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더 뺄 것도 없잖아요?”
그리고 나는 누워 있는 캐서린을 거칠게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