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37화 (37/175)

37화

* * *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 속.

누군가 캐서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누구…죠?’

의문이 생겼지만, 의심하진 않았다.

캐서린은 이내 그 따뜻한 손을 부여잡았고, 심연 속에 갇혀 있던 정신은 슬슬 깨어나기 시작했다.

‘여기는…….’

의식이 온전히 들어오기 시작한 그녀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초토화된 주변의 풍경과 코끝을 찌르는 피 냄새.

그리고 자신을 껴안고 있는 누군가였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투명한 마나는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윽고 자신을 껴안는 상대방을 확인한 캐서린은 무거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었군요.”

그리고 캐서린은 그 따뜻한 품 안에 와락 안겼다.

* * *

“으으윽…….”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온몸 여기저기서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기에, 눈을 뜨기까지 꽤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어느 정도 몸이 적응되자 나는 조심스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여긴… 어디지?’

코끝을 찌르는 약물 냄새.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자 연구실에서나 볼 법한 각종 도구가 나열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 정신이 안정된 나는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살아 있네.’

이번에야말로 죽는 줄 알았는데, 용케도 죽지 않았다.

벌써 죽을 뻔한 위기가 몇 번째인지도 모르겠다.

‘몸은 괜찮은 건가?’

분명 온몸이 괴물의 촉수에 의해 관통당했었고, 무엇보다 마기를 흡수했었기에 무슨 이상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사지는 멀쩡히 달라붙어 있고 정신은 온전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뭐야? 왜 몸이 묶여 있어?’

손을 움직여 보려 했지만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아진 채, 침대에 묶여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입도 붕대로 봉인되어 있어, 소리를 외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있는 힘껏 몸을 비틀며 발버둥을 쳐 댔다.

그러자, 잠시 후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랑켄… 슈타이너?’

남자는 흰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그의 왼쪽 가슴에는 ‘랑켄 슈타이너’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방독면을 쓰고 있었기에 신원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 일어났군. 몇 가지 질문을 하겠다.

남자가 쓴 방독면의 입가에서는 치지직 하는 기계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첫째, 몸 상태는 괜찮은가?

그러나 입을 칭칭 묶어 놓은 압박 붕대 때문에 나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다.

“읍… 읍… 읍!!”

- 아, 실수.

남자는 이내 내 입을 막아 둔 압박 붕대를 풀어 주었다.

“푸―하! 뭐예요? 당신은 누구죠? 여긴 어디예요?! 도대체 왜 저를 여기에다 묶어 놓은 거예요?!”

- 시끄러워. 질문은 내가 한다. 첫째, 몸 상태는 괜찮은가?

남자, 랑켄 슈타이너는 내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

어차피 몸이 묶여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남자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은 거 같아요.”

- 그럼 둘째, 몸에 불편한 점은 없나? 예를 들어 어딘가 이상이 생겼다든지.

“…여기다 묶어 놓으셔서 불편한데요.”

- 이상은 없나 보군.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셋째…….

랑켄 슈타이너는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방독면을 쓰고 있는 얼굴을 내 얼굴에 밀착시켰다. 그리고 순간 남자의 말하는 분위기가 바뀌었다.

- 어째서 마기를 흡수하고도 멀쩡한 거지?

맞다.

나 마기를 흡수했었지.

남자의 질문에 캐서린에게서부터 마기를 흡수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캐서린은 어떻게 된 거지?’

내 머릿속에 드는 의문을 무시한 채 남자는 말을 이었다.

- 분석에 따르면 네 몸은 마기를 온전히 흡수시켰다. 그런데 왜 어째서 멀쩡한 것이냐 이 말이다. 지금껏 그만큼의 마기를 흡수하고도 멀쩡한 사례는 없었다. 게다가 마인화는커녕 지금 네 몸에는 흔적만 있을 뿐, 단 1g조차도 마기를 찾아볼 수 없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거지?

남자의 말에 문득 아까 전 일이 떠올랐다.

사실 아무런 계획도 없이 캐서린에게서 마기를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도박이 성공했나 보네.’

나는 캐서린의 몸속으로 마나를 흘려보내 마기를 추출했었고, 그 마기가 내 몸속으로 흡수되는 순간, 오팔 목걸이를 발동시켰다.

‘마기’라는 것도 결국 마물이 가지고 있는 ‘마나’라는 생각에서 기인한 도박이었다. 결과적으로 저 랑켄 슈타이너의 말에 따르면 그 도박은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가만 생각해 보니 오팔 목걸이도 예사 물건이 아니잖아? 이 정도 효과면 거의 전설급이나 다름없는데?’

비록 오팔 목걸이는 하루에 단 1회만 사용할 수 있다는 큰 페널티가 있었지만, 지금까지의 활약을 생각하면 전설급 아이템이 분명했다.

내가 아까 전 일을 회상하고 있을 때, 랑켄 슈타이너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의 목소리는 왠지 아까보다 험악해져 있었다.

- 좋은 말로 할 때 털어놓는 게 좋을 거다. 만약 말하지 않는다면 일단 너의 팔을 손끝부터 삼두근까지 절단시키는 과정을 거칠 거야. 그리고 반대쪽 팔은 폼알데하이드에 24시간 동안 담가 놓을 거지. 걱정 마라, 절단은 최대한 깔끔하게 해서 아직 안 죽었을 테니까. 그리고 두 팔을 잃은 상체는 1,000도가량의 온도로……. 그리고 또 남은 두 다리는…….

남자의 끔찍한 이야기에 내 두 동공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나 남자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퍼억!

- 아야…….

“이 인간이 도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이올렛 테오니르였다.

“미안, 이 인간이 워낙 정신 나간 사람이라서. 대신 사과할게.”

저 랑켄이라는 사람의 말을 듣고 있을 때는 조금 오금이 저려 왔었는데, 이올렛의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이올렛은 침대로 다가오더니 온몸에 묶여 있던 붕대를 풀어 주었다.

“그런데… 저 사람은…….”

“아, 저 인간? 이 아카데미의 마나 의료술 교수이자, 보건 교사.”

- 그리고 방출계 권좌이기도 하지.

이올렛에게 걷어차인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조심스레 끼어드는 랑켄 슈타이너.

‘다행이다……. 그런데 방출계 권좌였다고? 방출계 권좌가 이 학교 보건 교사였구나…….’

‘아카마’에서 모든 권좌의 정보가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랑켄 슈타이너도 마찬가지로 ‘아카마’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어, 그런데 이 학교 보건 교사는 이올렛… 교수님 아니었어요?”

“뭐, 교수? 그건 좀 섭섭한데?”

- 흠, 역시 내 조교답군.

이올렛은 내 말과 옆에서 거드는 랑켄의 말에 조금 발끈한 듯 보였다. 반면 랑켄은 팔짱을 끼고는 방독면을 쓴 얼굴을 끄덕였다.

“내가 어딜 봐서 교수로 보이니? 너도 참……. 난 너 선배야. 2학년이라고.”

“서, 선배였어요……? 그런데 왜…….”

“이 인간이 허구한 날 여기 짱박혀 있어 가지고, 내가 대신 의무실을 보고 있는 거지. 이래 봬도 나 2학년 수석이거든.”

우와아아…….

어쩐지 이올렛의 외모가 내 또래 같다 싶더라니.

그런데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의무실에 이올렛이 없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역시 대학교든 아카데미든 조교는 참 서러운 것 같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예요?”

“아카데미의 지하 연구실. 지금은 저 랑켄 교수가 사용하고 있어.”

- 너를 케이든 교수가 업고 왔다. 여기 막 도착했을 때는 상태가 심각해서 애 좀 먹었지.

“케이든 교수님이요……?”

어떻게 케이든 교수가 나를 숲속에서 데려올 수 있었을까.

분명 숲은 캐서린의 결계로 인해 정보가 차단되어 있었을 텐데 말이다.

- 이번 일은 케이든 교수가 조용히 처리했다. 아마 그 여학생도 딱히 재판받거나 처벌받는 일은 없을 거야.

“…다행이다. 어? 그러고 보니 캐서린은요?”

정작 중요한 캐서린이 보이지 않았다.

랑켄 슈타이너는 대답 대신 엄지손가락으로 연구실 건너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캐서린 골드버그가 있었다.

- 별 이상은 없다. 그냥 잠들었을 뿐이야.

잠든 그녀의 침대 머리맡에는 노란색 꽃이 담긴 바구니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침대 옆 서랍 위에도 똑같은 꽃이 놓여 있었다.

얼핏 봐서는 국화꽃의 한 종류이지 않을까 싶었다.

“이건…….”

“아, 그거? 메리골드라더라. 자주 오던 학생이 두고 갔어.”

자주 오던 학생?

아무튼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결국 캐서린 골드버그를 구해 냈다는 것.

이런 벅차오르면서도 복잡한 감정은 이 ‘아카마’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이었다.

* * *

별 이상 없음이 확인된 나는, 바로 퇴원할 수 있었다.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니…….”

이올렛의 말에 따르면 벌써 숲에서 일이 벌어진 이후에 이틀이나 지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동안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조용히 처리했기에, 비무제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아, 맞다. 비무제!”

불현듯 이번 비무제의 서브 이벤트가 떠올랐다.

그리고,

[서브 이벤트 ‘학년의 최강자’에 실패하였습니다.]

[보상 ‘당신에게 필요한 마법 주문서(???) 선택권’ 다섯 장의 획득에 실패하였습니다.]

눈앞에 이벤트의 실패를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에엑…….”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 보상 획득에 실패했다는 메시지가 뜨자 조금 안타까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됐어. 어쨌든 캐서린을 구했잖아? 그거면 됐지.”

나는 이내 빠르게 고개를 저으며 안타까운 감정을 정리했다.

보상도 보상이지만, 나는 그보다 더 값진 뿌듯함을 이번 비무제 동안 얻게 된 것이다.

“가만… 이벤트 종료 창이 떴다는 것은 비무제가 방금 막 종료됐다는 소린가?”

결과가 궁금해진 나는 비무제의 경기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 *

- 축하합니다! 이번 비무제의 우승자는 바로 바로 바로! 제페토 골드버그입니다!!

와아아아아아!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함성.

그리고 모니터에는 제페토 골드버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결국 저 녀석이 우승한 건가? 그러고 보면 저 녀석도 참 입만 닥치고 있으면 꽤나 정상으로 보이는데 말이지.”

입만 열면 재수 없어서 그렇지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겼다.

아마도 조용히만 있는다면 분명 여자들에게도 인기가 제법 있을 상이었다.

“그나저나 저 녀석 우승한 건 우승한 거여도, 너무 꿀 대진이었잖아?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

제페토의 8강 상대인 나는 기권했었고, 4강도 들어 본 바로는 상대가 샬롯 아메드였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샬롯 아메드는 병실에 누워 있었기에 기권 처리가 되었고, 결승 상대는 바로 에메릴 그린월드.

애초부터 소환계는 변신계에 마나 상성상 우위에 있기 때문에, 어찌 보면 제페토가 우승하는 게 당연했다.

“뭐, 그렇다고 저 녀석이 실력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날로 먹은 우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비무제의 시상식과 폐막식을 지켜보고 난 뒤 나는 드디어 기숙사로 복귀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숙사의 입구로 들어가려던 순간,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자, 잠깐! 멈춰!!”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제페토 골드버그였다.

부르는 소리에 내가 멈춰 서자, 제페토는 거칠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도 멀리서부터 뛰어온 모양이었다.

“자, 잠깐 할 말이 있으니, 따라와라.”

‘저 녀석이 또 무슨 꿍꿍이지?’

며칠 동안 병실에 누워 있었기에, 지금 당장은 저 녀석을 상대할 컨디션은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오늘 우승해서 기분이 좋을 텐데 왜 또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았어.”

그리하여 나는 제페토 골드버그를 따라 기숙사의 뒤편으로 갔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