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제법 많잖아?”
펄펄 끓는 용암 속에서 하나둘씩 튀어나오는 샐러맨더들을 보며 나는 목을 까닥까닥 스트레칭했다.
압도적인 상대의 수에 당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제부터 시작될 학살극에 절로 미소가 나왔다.
살랑살랑 불씨가 달린 꼬리를 흔들며 모습을 드러낸 수십 마리의 샐러맨더들.
녀석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띠링!
새로운 이벤트를 알리는 시스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던전 이벤트〉
[용암 지대 돌파!]
* 달성 조건: 용암 지대의 마물을 처치한 후 얻을 수 있는 화염 정수 99,999개를 수집한다.
* 제한 시간: 무제한
* 실패 조건: 던전 이탈, 사망
* 보상: 던전 안에서의 화염 속성 내성 90% 증가
* 특이사항: 보상은 던전에 입장한 모든 동료에게 같이 적용됩니다.
[현재 수집한 화염 정수: 0개]
‘던전… 이벤트……?’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종류의 이벤트가 눈앞에 나타났다.
이 던전 이벤트라는 것은 ‘아카마’에서조차 겪어 본 적 없었다.
‘게다가 보상이… 무려 화염 저항 90% 증가라고?’
이 용암 지대는 엄연히 화염 속성의 던전.
그렇기에 이곳에서 출몰하는 마물이나 보스는 화염 속성임이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화염 속성 내성을 90% 증가시켜 준다는 것은 곧 이 던전 한정으로 받는 대미지를 90% 감소시켜 준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핀 던전 때가 아마 90%였지.’
스티브 로이드 교수의 던전 훈련 때 버프 효과로 주어졌던 수치가 대미지 감소 90%.
그것은 훈련용 던전으로서 설정된 것이기에 가능한 수치였다.
사실상 90%의 피해 감소는 어마어마한 수치인 것이다.
게다가 나뿐만 아니라 동료에게까지 적용된다니.
이래서야 정말 레이드를 입장한 파티의 파티 퀘스트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보상이 어째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네……?’
화염 정수를 수집해서 얻게 되는 것은 결국 이 던전 내부에서 필요한 버프 효과였다. 딱히 재화나 아이템 같은 나를 위한 보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이 ‘던전 이벤트’라는 것의 특성인 듯싶었다.
‘이거 설마… 그만큼 보스가 어렵다는 소리인가? 게다가 90%라는 건 거의 퍼 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나는 곧 이 던전 이벤트의 의미를 깨달았다.
이것은 시스템이 선사하는 일종의 밸런스 요소.
그만큼 이 군주급 던전의 보스라는 게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강하다는 경고였다.
‘뭐, 어쨌든 땡큐네.’
뭐가 됐든 결국 이 이벤트의 진의는 시스템 창이 내 편이라는 뜻이었다.
보스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도전하기에 앞서 이 이벤트를 클리어하면 그만이었다.
“뭘 그렇게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거냐!”
그때 시스템 창에 정신이 팔려 있던 나를 제페토가 꾸짖었다.
그리고 제페토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바리티아 페쿠스(avarítĭa pecus)!!」
「수페르비아 페쿠스(supérbĭa pecus)!!」
우우웅!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도철과 도올.
그 거대한 양과 멧돼지의 짐승들은 크게 울부짖으며 샐러맨더들을 위협했다.
나는 의욕 넘쳐 보이는 제페토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뭐야, 의욕 만땅인데? 이번에도 아까처럼 정신 착란에 걸리지는 않겠지?”
“뭐, 뭐라고?! 두 번 다시 홀릴까 보냐!! 게다가…….”
제페토는 내 말에 한 번 발끈하더니 이내 샐러맨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샐러맨더를 보는 녀석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해 보였다.
“…아까부터 몸이 근질근질했던 참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제페토는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그 소리에 맞춰 달려 나가는 도철과 도올.
- 크르렁!!
- 크어엉!!
혀를 날름거리며 대치 중이던 샐러맨더들은 갑작스러운 도철과 도올의 날뜀에 당황하여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입장에선 지금까지 억울할 만도 하네.’
나름 ‘아카마’에서는 제이드 다음으로 가는 2인자인 녀석이었다.
그런데 어째 나랑 엮이고 나서부터 매번 호구스러움만 보여 주던 제페토다.
그리하여 녀석은 지금, 그 울분을 토해 내고 있는 것이다.
- 키에엑!
- 키에에에엑!
도철과 도올의 날뜀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샐러맨더들.
순식간에 도철과 도올은 샐러맨더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팔짱을 끼며 흐뭇하게 관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띠링.
[용암 지대 샐러맨더를 처치하였습니다.]
[화염의 정수 여섯 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용암 지대 샐러맨더를 처치하였습니다.]
[화염의 정수 다섯 개를 획득하였습니다.]
……
도철과 도올이 샐러맨더들을 처치하자, 내 눈앞에는 그 결과를 알려 주는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역시 보상이 공유라서 그런가, 다른 사람이 처리해도 수집품을 얻을 수 있잖아? 그런데 그건 그거고…….’
지금껏 시스템 창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했던 적은 없었다.
계속해서 눈앞에 나타나는 마물의 처리를 알리는 시스템 창과, 하나둘씩 쌓여 가는 수집품 내역을 보니 이내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그럼, 슬슬 나도 합류해 보실까.”
나는 일단 허리춤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뚜껑을 엄지로 튕겼다.
그러자 던전에 입장할 때 소환 해제되었던 매기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 끼루욱!
녀석은 소환되자마자 내 얼굴에 폭신폭신한 솜사탕 같은 털을 비벼댔다.
조금 전만 해도 같이 있었던 녀석이 고작 몇 분 떨어져 있었다고 새삼 이러는 것을 보면 어지간히 날 좋아하는 모양이다.
“말 안 해도 알지?”
- 끼룩!
슈슈슈슈!
매기는 바로 눈치껏 근육 폼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내 온전한 팔다리를 갖추자 바로 도철과 도올에게 합류해 샐러맨더 무리를 상대했다.
옆을 힐끔 보니 캐서린도 어느새 영체화의 짐승들을 소환하여 샐러맨더의 수를 줄여 나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샐러맨더 무리에 포위됐던 우리였으나, 이제 전세가 역전됐다.
우리가 포위된 것이 아니라, 녀석들이 거대한 벽을 마주한 것이다.
전투는 원하던 형세로 이끌어져 갔다.
앞쪽 전열은 나와 제페토, 캐서린의 사역마로 든든한 탱커 라인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기서 필요한 것은 후방의 화력 지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주문을 외웠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쏘아 낸다는 느낌보다는 한 점으로 모은다는 느낌.
그러자 매직 미사일은 발산하지 않고 내 손에 머물러 있었고, 곧 내 귓가에는 귀를 간질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위잉위잉위잉.
사실 클로버에게 이 ‘캐스팅 차지’ 매직 미사일을 사용했을 때는 상대방이 얼음 속으로 숨어 버렸기에 제대로 된 파괴력을 가늠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수많은 샐러맨더는 ‘캐스팅 차지’ 매직 미사일의 위력을 판단하기에 딱 좋은 상대들이었다.
위잉위잉위잉.
곧 내 오른손에는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의 밀집된 백색의 마나가 보이고 있었다.
나는 왼손으로 오른쪽 손목을 감싸고 샐러맨더 무리에 조준했다.
“고출력―”
곧 내 손끝으로 모이는 거대한 마나 에너지.
“―매직 미사일!!”
콰아아아아아아앙!!
손끝에서부터 뻗어 나가는 거대한 백색의 구체는 순식간에 샐러맨더 무리에 날아가 그 주변을 초토화했다.
콰과과과광!!
그 위력은 거의 언노운급과 비슷하다고 스스로 평가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언노운과의 계약은 필요 없는 거 아닐까.”
나는 방금의 고출력 매직 미사일의 위력에 매우 만족했다.
그러나 사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위력이 비슷해도 언노운은 이만한 위력을 단발로 뿜어낼 수 있었기에 비교 불가이긴 했다.
게다가, 이젠 오러 블레이드 형식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더더욱 언노운 쪽이 좋은 건 맞았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그만큼 지금의 내 힘에 만족하게 된 것이다.
[용암 지대 샐러맨더를 처치하였습니다.]
[용암 지대 샐러맨더를 처치하였습니다.]
……
[용암 지대 샐러맨더를 처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수없이 올라오는 시스템 창이 내 시야를 가렸다.
나는 따로 그 내역을 확인하지 않았으나, 그저 시스템 창이 끊임없이 처치 카운트를 해 주고 있었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게 진짜 잡몹 사냥이지.”
처치와 보상을 반복하는 시스템 창을 보자 갑자기 어릴 적 즐겨 했던 RPG 게임이 떠올랐다. 지금 기분은 마치 그 RPG 게임에서 자리를 잡고 사냥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져 버린 샐러맨더 무리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옆쪽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응?”
그리고 거기에는 토끼 눈을 한 캐서린 골드버그와 입을 떡 벌린 제페토가 있었다.
“언제… 어, 언제부터 이렇게 강했던 것이냐!!”
하긴.
제페토가 저렇게까지 놀랄 만했다.
그야 제페토는 지금껏 나에게 일종의 라이벌 의식 아닌 라이벌 의식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조금 전 내 마법의 위력을 보고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격차를 느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다물지 못하는 제페토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글쎄.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를 따라잡으려면 100만 년은 이를걸?”
“으으으!! 지지 않을 거다!!”
제페토 녀석은 이내 도철을 불러오더니 위에 탑승해서 직접 샐러맨더 무리에 뛰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 사이를 휘젓고 아까보다 더 적극적으로 샐러맨더들을 처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한 제페토의 모습에 피식 미소가 지어졌다.
“바보 오라버니네요.”
그 모습을 보던 캐서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역시 멋있어요.”
“응?”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리고 캐서린도 자극받았는지 더욱더 많은 수의 영체화 짐승을 소환하여 샐러맨더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우리 파티의 샐러맨더 학살은 몇 시간째 이어지게 되었다.
* * *
“헥― 헥―”
이미 모든 마나를 전부 소진하여 돌투성이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린 제페토.
마나 효율이 좋은 영체화를 사용하지만, 그럼에도 오랜 시간 동안 전투를 지속해서 지쳤는지 이마의 땀을 훔치는 캐서린.
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끊임없이 이동했던 우리 파티는, 아까부터 계속해서 샐러맨더의 서식지를 털고 다녔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자, 이젠 더 이상 샐러맨더는커녕 그 살랑거리던 불꽃조차도 찾을 수 없을 만큼 주변이 초토화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이 던전 안의 샐러맨더란 샐러맨더는 전부 멸종한 듯싶었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자 현재 진행 상황을 알려 주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현재 수집한 화염 정수: 28,274개]
“아직 반도 다 못 채웠네…….”
벌써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중간에 휴식과 이동시간을 제외해도 꼬박 5시간 정도는 샐러맨더 사냥에 집중한 듯싶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이 정도 속도면 적어도 이틀은 더 이 짓을 반복해야겠네…….”
아무래도 이번 던전 이벤트의 보상을 봤을 때, 화염 저항 보상 없이는 군주급 마물을 처치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보스를 처치하고 이 던전에서 나가려면 먼저 이벤트의 완료와 보상의 획득이 필수였다.
“하아아암…….”
나는 팔을 번쩍 들어 기지개를 켰다.
아무래도 기본적으로 마나 보유량이 많은 탓에 제페토나 캐서린보다는 덜했지만, 그럼에도 반나절을 사냥에 몰두하고 있으니 극심한 피로가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응……?”
지금껏 샐러맨더들을 처치하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보자, 길바닥에는 작아서 잘 안 보이는 무언가가 널브러져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도 엄청 많이.
“저건… 마정석이잖아?”
인스턴트 던전이 아닌 만큼 일반 마물들도 마정석을 드랍하는 모양이었다.
이제야 확인했을 정도로 매우 작은 손톱만 한 마정석들이었지만, 반나절 동안 사냥이 지속된 만큼 바닥에는 작게 빛나는 마정석들이 셀 수 없이 쫘르륵 깔려 있었다.
“…나는 이제 부자다!!”
신이 난 나는 매기와 함께 헐레벌떡 떨어져 있는 마정석들을 줍기 시작했다.
조금 전 지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신이 나서 바닥을 휩쓰는 내 광기 어린 모습에 캐서린과 제페토는 멍하니 보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