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와아아아…….”
제로와 에이체스, 벅스의 대련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아우레인 학생들의 분위기가 조금 숙연해졌다.
비록 2:1이긴 하지만, 제로의 패배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제로가 보여 주는 힘의 격차는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그 모습을 모니터 너머로 보고 있던 루비 버밀리온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설마 저번 일의 복수인가……?”
제로가 저렇게까지 상대를 잔인하게(?) 다루는 이유는 저번 주에 있었던 일의 복수인 것이 틀림없었다.
근육질 사역마에 붙잡혀 엉덩이 팡팡을 당하는 녀석들이 심지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응? 무슨 일인데?”
그때, 옆에 있던 달시 세이피어가 루비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궁금해했다.
“위자드 협곡에서 도주 훈련할 때 있잖아. 저 두 녀석이 나랑 제로를 동굴 안에 가뒀었거든.”
“진짜?”
“응. 그래서 그거 때문에 일부러 저 녀석들을 대련 상대로 지목한 건가 싶어서.”
“그럼, 저렇게 당해도 싸네.”
“그렇긴 하지. 그거 때문에 죽을 뻔도 했으니까…….”
“응? 죽을 뻔했다고?”
달시의 반문에, 루비는 갑자기 그때 당시의 상황이 떠올랐다.
갑작스레 동굴 안으로 들어온 안티 매지션.
그리고 녀석의 등장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맞서던 제로.
그때 일을 생각하자 루비의 볼이 빨개졌다.
“왜애? 무슨 일인데에?”
달시는 갑작스레 말이 없어진 루비를 호기심이 잔뜩 어린 표정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비는 대답을 조금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당하기만 하던 에이체스와 벅스 쪽이 반격을 시작한 듯 보였다.
스타트를 끊은 건 에이체스 쪽이었다.
개의 형상을 한 에이체스의 목 아랫부분이 점차 붉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근육질 사역마의 손아귀를 뿌리쳤다. 그러고는 벅스의 등덜미를 물어 빠르게 사역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루비는 황급히 달시의 시선을 모니터 쪽으로 돌렸다.
“이, 일단은 대련을 보자. 아무래도 저 녀석들. 가만히 당해 주고 있지만은 않을 거 같은데?”
“으응.”
달시도 이내 루비에 대한 호기심을 거두고는 모니터 쪽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다만, 달시는 녀석들이 제대로 된 반격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 * *
“뭐야, 그래도 꿈틀거리긴 하잖아?”
결국 매기의 손아귀를 벗어난 에이체스와 벅스를 보며 나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이대로 끝날 정도였으면 상당히 실망할 뻔했다.
그래도 매기를 뿌리칠 실력이면 그럭저럭 샌드백으로서는 통과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들 원작에서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
‘아카마’에서는 애초에 제이드와 제페토의 대립이 끝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저 녀석들은 그저 제페토의 등 뒤에서 한마디씩 거들 뿐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실력을 발휘할 시간이 찾아오자 그 밑천이 드러난 것이다.
“꼭 학창 시절에 저런 녀석들이 있긴 하지.”
힘은 개뿔도 없으면서 강자의 등 뒤에 숨어 빌붙는 놈들.
그렇게 호가호위하면서 그 힘이 마치 자신들 때문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녀석들.
앞에서 힘을 휘두르는 녀석도 녀석이지만, 저런 놈들은 더더욱 꼴 보기 싫은 유형이었다.
“응?”
나는 여유를 부리며 녀석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있었다.
그런데 벅스 쪽이 심상치 않았다.
개로 변신한 에이체스의 등 위에 올라타 있는 벅스.
그의 하늘 위로 뻗은 양손에서 일렁이는 불덩이가 점차 커져 나가기 시작했다.
“…저것도 일종의 차지 캐스팅인 건가?”
나는 그 모습이 가소로워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팔짱을 풀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주문을 속삭였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위잉위잉위잉.
이내 내 오른손에는 마나가 모이고 있었다.
에이체스와 벅스는 도망갈 생각 없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고는 기회다 싶은 모양이었다.
애초에 ‘차지 캐스팅’의 매직 미사일은 육안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니까, 내가 아무것도 안 하는 줄 착각한 듯 보였다.
“너, 이 자식! 죽여 주마!!”
전형적인 삼류 악당 같은 멘트.
나는 그저 코웃음 칠 뿐이었다.
놓친 녀석들을 잡으려고 매기가 서둘러 뛰어오고 있었지만, 나는 왼쪽 주먹을 쥐며 정지 신호를 보냈다. 애초에 매기의 도움은 필요 없을 테니까.
이내 벅스의 하늘 위로 들어 올린 양 손바닥 위에는 거대한 불구덩이가 생성되어 있었다.
“죽어라!!”
그리고 벅스는 그 불구덩이를 나를 향해 힘껏 던졌다.
나는 날아오는 불구덩이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파르에게 눈치를 줬다.
“알지?”
- 파르.
이미 내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알고 있다는 듯 대답하는 파르.
그리고 파르는 살며시 몸을 움직여 불구덩이를 정면으로 맞이했다.
펑!
파르의 몸에 닿은 불구덩이는 그 크기에 걸맞지 않게 초라한 소리를 내며 사라져 버렸다.
애초에 파르는 화속성 면역이기 때문에, 벅스의 회심의 일격조차도 쉽게 흡수해 버릴 수 있던 것이다.
상황의 흐름은 전부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당혹스러워하는 녀석들의 표정이 보였다.
녀석들에게는 안타까운 얘기지만 상대가 나빴다.
나름 지들 딴에는 최후의 필살기급 공격.
그러나 필살기라기엔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혀 버렸으니 나라도 어이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말도 안 돼…….”
나는 아연실색한 녀석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같은 아우레인 기숙사 동급생한테 ‘죽어라.’라는 말은 좀 심한 거 같은데?”
내가 무슨 안티 매지션도 아니고, 당연하다는 듯 죽으라고 말하는 건 어느 정신머리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저런 몰상식한 녀석들에게는 따끔한 교육이 필요한 법이다.
“나는 죽이진 않고…….”
말과 동시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밀집해 있던 거대한 매직 미사일이 순식간에 오른손으로부터 방출되었다.
“…살려는 드릴게.”
이미 내가 오른팔을 조준하는 순간, 에이체스는 위험한 낌새를 감지했는지 거리를 벌리며 도망치고 있었다. 그리고 벅스는 날아오기 시작한 고출력 매직 미사일을 확인하고는 절규했다.
“에, 에이체스, 빨리 도망쳐!!”
“멍청아! 최대한 도망치고 있는 거라고!!”
두 녀석의 대화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응, 못 도망가. 방향도 내가 조종할 수 있거든, 바보들아.”
나는 뻗은 손가락을 휙 움직여, 급하게 방향을 꺾는 에이체스를 향해 조준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고출력 매직 미사일이 녀석들을 덮쳤다.
콰과과과과광!!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마나 구체는 주변을 전부 파괴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매직 미사일에 맞은 녀석들은 이내 강제 귀환 당해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다.
“…뭐야, 벌써 끝이야?”
그래도 강제 귀환까지의 대미지 수치를 높게 설정했다길래 한 번은 버티지 않을까 싶었는데, 결국 녀석들은 한 방 컷이었다.
아무래도 그만큼 고출력 매직 미사일의 위력이 강력하다는 뜻이겠지.
나는 방금의 위력을 보고는 앞으로 사람에게 사용할 때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한 복수가 됐으려나.”
녀석들이 강제 귀환 당했다는 것은 그만큼 피해와 고통을 한계까지 고스란히 입었다는 의미였다.
또한 그 이전에 모니터를 통해 지켜보고 있을 학생들 앞에서 엉덩이도 흠씬 두들겨 맞았으니, 신체적 고통에 더불어 정신적 고통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나는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까지 해 줬는데 다음에 또 덤벼들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말 못 하는 짐승도 이 정도로 호되게 당했으면 알아서 설설 기는 것이 당연하다.
오늘 이후에도 나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한다면, 그건 녀석들이 최소 사람 이하라는 의미겠지.
에이체스와 벅스가 강제 귀환되자, 이내 내 몸에도 하얀빛이 돌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눈을 감았다 뜨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던전 입구 앞에 앉아 있는 동급생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에게 감탄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반면.
한쪽 구석에는 겁에 질려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에이체스와 벅스가 보였다.
짝짝짝!
곧 루퍼스 그레이엄이 박수를 치며 내게 다가왔다.
“역시 수석은 수석이네. 딱히 흠잡을 데가 없는데? 사역마의 운용도 좋았고, 심지어는 소환계임에도 사역마와는 별개로 따로 기초 마법을 연마한 거구나? 그 정도 경지의 기초 마법 운용은 현역조차도 쉽지 않을 거 같은데.”
“예. 뭐…….”
애초에 내 경우에는 사실상 무속성 마법인 매직 미사일이 주기술이었고, 사역마 쪽이 부가 요소였지만.
굳이 멋대로 착각하는 루퍼스 교수를 정정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봤을 때는 거의 상대를 가지고 놀다시피 하는 거 같던데. 맞지?”
“글쎄요. 조금 아슬아슬했네요.”
“아슬아슬하다니, 겸손도 정도가 있지. 아무튼 정말 놀라웠다. 다들 수준 높은 실력을 보여 준 제로에게 박수!”
짝짝짝!!
동급생들의 반응에 살짝 멋쩍어진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갑작스레 시작된 대련 훈련 속에서, 녀석들에 대한 복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듯싶었다.
* * *
저녁 시간.
에이체스와 벅스는 아네락샤 기숙사의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아카데미 외부로 외출을 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오전의 수업 시간, 에이체스와 벅스가 입고 있던 로브가 제로의 마법에 의해 갈가리 찢어졌기 때문이었다.
원래였으면 그 전에 강제 귀환 조치 되는 게 정상이겠지만, 이번 수업에 사용된 던전의 대미지 한계 수치가 보통보다 높게 설정되어 있었기에 로브가 손상된 것이었다.
담당 교수 루퍼스 그레이엄은 이러한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지, 연신 그들에게 사과했지만 이미 에이체스와 벅스의 기분은 나락이었다.
‘x발! x발! x발! x발!!’
에이체스는 속으로 백 번은 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것은 제로에 대한 욕설이었을까, 던전 설정을 그렇게 한 루퍼스 교수에 대한 욕설이었을까, 아니면 갈가리 찢어진 로브를 비웃던 동급생들을 향한 욕설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무참히 짓밟힌 스스로가 한심해서였을까.
에이체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하여 로브 상점에서도 대충 아무거나 휙 고르고 말았다.
애초에 제대로 된 쇼핑을 할 기분도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벅스는 자신과는 상황이 조금 다른 것으로 보였다.
오전의 일은 벌써 잊었다는 듯, 아네락샤의 친구와 하하 호호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에이체스는 그런 벅스마저 한심스럽고 짜증 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둘을 내버려 둔 채, 에이체스는 먼저 상점 밖으로 나왔다.
아직 완연한 봄이 찾아온 것은 아닌 듯, 저녁 날씨는 꽃샘추위로 인해 제법 쌀쌀했다.
에이체스는 계속해서 욕지거리를 중얼거리며 애꿎은 바닥만 찰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죽고 싶지 않으면, 좋은 말로 할 때 이쪽으로 오도록.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자신을 골목 어귀로 이끌고 있었다.
애초에 머릿속에 목소리를 주입하는 텔레파시 마법을 받았다는 것은, 상대가 자신보다 월등한 실력의 정신계 마법사라는 뜻이었다.
따라서 에이체스는 침을 꿀꺽 삼킨 채 목소리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보게 된 남자들 중 하나는, 이전에 본 적 있던 낯설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 당신은…….”
“뭐야, 이 녀석이랑 아는 사이야?”
“아아, 그때 그 착한 학생이로군.”
“응? 착한 학생?”
골목에서 에이체스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한 남자는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에이체스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고 있었고.
다른 남자는 얼굴을 귀까지 덮고 있는 터틀넥을 입고 있는 사내, 다름 아닌 위자드 협곡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였다.
“별 얘기 아니다. 그냥 서둘러 지배를 끝내라.”
“잠깐만. 굳이 지배를 안 해도 되겠는데……?”
에이체스의 머릿속을 헤집던 하트가 혀로 입술을 할짝거렸다.
웬만한 아카데미 학생 정도만 돼도 기억을 읽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만큼 상대의 마법 수준이 매우 낮았기에 하트는 에이체스의 기억을 대략 읽을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클로버는 팔짱을 낀 채 넌지시 하트에게 물었다.
그러나 하트는 그런 클로버의 말은 무시한 채 에이체스에게 말을 걸었다.
“너. 복수가 하고 싶구나?”
어딘가 음흉한 하트의 미소.
방금까지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던 에이체스는 하트의 표정을 보고는 이내 고개를 조심스레 끄덕였다.
“그래 그래, 옳지. 대답도 잘하는구나. 클로버 말대로 정말 착한 아이였잖아? 그래서 복수가 하고 싶단 말이지…….”
방금까지 쪼그려 앉아 있던 하트는 이내 바지를 털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에이체스 쪽으로 무언가를 툭 건넸다.
“시키는 대로만 해. 그럼 너의 그 복수, 이루게 해 주지.”
에이체스는 조용히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주먹만 한 두 개의 검은 구체였다.
조심스레 검은 구체를 쓰다듬는 에이체스의 모습을 보며 하트는 혼잣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물론,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테지만.”
말없이 검은 구체를 내려다보는 에이체스를 보며 하트는 히죽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