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 * *
“흐아암…….”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기지개를 쭈욱 켰다.
시계를 확인하니 시간은 벌써 느지막한 오후.
이렇게 오랫동안 숙면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원래 세계에 있을 때는 늦은 새벽에 취침하고 오후 늦게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만, 이곳에 오게 된 이후부터는 매일 아침 시작되는 1교시 때문에 이렇게 늦잠 잘 일이 도통 없던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여유가 좀 있으려나.”
어차피 약속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애초에 만나기로 한 시간은 해가 지고 난 뒤의 저녁 시간.
굳이 해가 지고 난 뒤의 시간에 약속을 잡은 이유는, 유진에게서 아네락샤 기숙사가 폭죽 부스를 운영한다는 소식을 들어서였다.
축제라면 당연히 불꽃놀이는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우리는 해가 지고 난 뒤, 폭죽을 터트리기 몇 시간 전에 모이기로 했다.
“그건, 그거고…….”
축제를 즐기는 거와는 별개로 눈을 뜨자마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프레시스코(præscísco)!!」
아카데미 내부 점검이었다.
감지 마법을 외운 내 시야에는 이내 형형색색의 마나 정보가 들어오고 있었다.
한참을 꼼꼼히 살핀 결과, 마기가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제야 감지 마법을 취소하였다.
‘좋아. 다행히 이상은 없는 거 같네.’
당장 어제 정체를 알 수 없는 마기를 뿜어내는 마도구를 발견한 이후, 녀석들의 추가 움직임이 있을까 싶어 점검해 봤지만 딱히 특이점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나저나 정말 다행이네.’
어젯밤, 밤잠을 못 이루고 뒤척여 가면서 내가 내린 결론.
그것은 바로 어제의 그 검은 구체가 ‘아카마’에서 교사들을 전장에서 이탈시킨 원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고 제거한 이상, 나는 조금 마음이 편안해져 있었다.
‘지금쯤 랑켄 슈타이너 교수님이 열심히 분석하고 계시겠지?’
나는 랑켄 슈타이너를 굳게 믿고 있었다.
하얀 의사 가운에 머리에 쓰고 있는 왠지 모를 방독면.
게다가 방출계의 권좌라는 직함까지.
뭔가 사람이 겉으로는 조금 딱딱해 보여도, 상당히 믿을 만하다고 느껴졌다.
“아무튼 오늘은 오늘대로 축제를 즐기자.”
커다란 위협 요소도 제거했겠다, 나는 마음을 한결 홀가분하게 먹기로 했다.
* * *
해가 진 이른 저녁.
늦은 시간까지 한창 영업 중인 부스들의 조명이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부스 거리의 입구에서 두리번거리던 나는, 이윽고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루비 버밀리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와 있었네?”
“아, 응.”
루비 버밀리온은 나를 발견하자 살짝 머리를 매만졌다.
그와 함께 그녀의 분홍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그, 그냥?”
나도 약속 시간보다 10분은 일찍 나왔다.
그런데 루비 버밀리온은 그보다 더 오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한창 귀 아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배배 꼬던 루비 버밀리온은 이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럼… 갈까?”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어서.”
“…더 올 사람?”
그때.
때마침 나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느, 늦진 않았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살짝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제페토 골드버그.
그리고,
“죄송해요. 오라버니가 한참 거울을 보느라 늦었네요.”
그 옆에는 무언가가 들어 있을 법한 쇼핑백을 들고 있는 캐서린 골드버그가 있었다.
‘뭐야, 둘이 같이 왔네?’
물론 둘을 부른 건 나였지만, 둘이 동시에 도착할 줄은 몰랐다.
가만 보면 저 골드버그 남매의 사이가 그리 나쁜 거 같지만도 않게 느껴진다.
“뭐, 뭐야. 사람이 더 있었…….”
옆에서 루비가 조금 당황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올 사람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안녕!”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제이드.
그리고 그 옆에는 백금발의 머리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샬롯 아메드가 있었다.
둘을 확인한 루비는 못다 한 말을 이었다.
“제이드랑 샬롯도 있었네……?”
“응. 다들 불렀어. 다 같이 축제를 즐기면 좋잖아?”
사실 내 계획은 이랬다.
루비를 부르고, 제페토 골드버그를 부른다.
그리고 제이드를 부르고, 캐서린 골드버그를 부른다.
이번 축제 기간에 부스를 운영하느라 고생한 둘에게 작은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샬롯 아메드까지 와 버려서 총인원은 여섯 명이 되어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달시도 부르는 건데…….”
“응?”
옆에서 루비가 무언가 중얼거렸지만, 이내 시끌벅적 떠드는 녀석들 덕분에 말이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럼 모두가 모였겠다.
“다들 축제를 즐겨 볼까?”
우리는 함께 부스의 거리 내부로 들어갔다.
어제와 그저께는 하루 종일 부스 내부에서 손님을 받느라 정신없었지만, 막상 손님의 입장으로 거리를 걸어 다니니 신선한 기분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칼루스 아카데미의 축제를 맘껏 즐겼다.
경품 부스에서 루비 앞이라고 한껏 폼을 잡고 다트를 던져 대는 제페토 골드버그.
어설픈 솜씨로 달고나 뽑기에 재차 도전하는 루비 버밀리온.
그 옆에서 초콜릿이 듬뿍 묻은 탕후루같이 생긴 꼬치를 몇십 개씩 먹어 대는 제이드.
그리고 그런 녀석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며 내심 미소 짓고 있는 캐서린까지.
녀석들을 보고 있자니 나도 조금씩 행복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침공 이벤트만 없었으면 좋으련만.’
이 행복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 평화로운 칼루스 아카데미에도 블랙잭 녀석들의 위협은 반드시 닥쳐올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잘 해결된다 해도, 아카데미 측의 전원이 무사할 거라는 보장도 없었다.
‘아니, 단 한 명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게 할 거야. 반드시.’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절대로 블랙잭 녀석들이 마음껏 그들의 목적을 이루게끔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저기 봐 봐!”
그때, 제이드가 갑자기 어딘가를 가리켰다.
가리킨 손가락 끝에 보이는 것은 으스스한 장식이 달린 부스.
그리고 그 부스 위의 간판에 적혀 있는 이름은 다름 아닌 ‘귀신의 집’이었다.
“재밌겠는데?”
마침 타이밍이 좋았다.
아무래도 시간상 저 귀신의 집을 보고 나서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면, 불꽃놀이의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뭐니 뭐니 해도 귀신의 집은 남녀가 둘이 들어가는 게 정석.
저 귀신의 집을 잘만 이용한다면, 원래 계획대로 제페토와 캐서린을 각각 이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먼저 입장 파트너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그럼, 제이드는 캐서린이랑…….”
“난, 샬롯이랑 들어갈게.”
“좋아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샬롯과 함께 먼저 ‘귀신의 집’ 부스 안으로 입장하는 제이드.
나는 그의 모습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슬쩍 캐서린의 눈치를 살피니 캐서린도 당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캐서린한테는 좀 미안한데…….’
그러나 이미 제이드가 먼저 들어간 탓에 딱히 방법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제이드와 캐서린은 포기하고, 루비와 제페토라도 이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나는 캐서린이랑 들어갈게.”
“어어……?”
내 말에 루비는 조금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녀에게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캐서린의 손목을 잡고 어서 가자는 듯 잡아당겼다.
“자, 가자!”
“…그래요.”
캐서린은 그다지 반항하지 않고 따라왔다.
그렇게 나는 루비와 제페토를 남겨 두고는 캐서린과 함께 ‘귀신의 집’ 부스 안으로 입장했다.
- 흑… 흑… 흑…….
들어가자마자 어두컴컴한 공간 안에서는 흐느끼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기분 나쁜 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입장할 때부터 머릿속이 온통 딴생각으로 가득했기에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곳의 제이드는 샬롯 루트를 타는 건가?’
오늘 제이드가 샬롯을 데려온 것도 그렇고, 축제 때 애초에 샬롯과 함께 부스를 운영하겠다는 것도 그렇고, 귀신의 집에 둘이 먼저 입장한 것도 그렇고.
제이드와 샬롯은 묘하게 가까워 보였다.
‘응?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지금까지 제이드의 행동들에는 조금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분명, 여기에 있는 제이드는 플레이어가 조종하는 게 아닌 살아 움직이고 스스로 판단하는 제이드.
그런데 묘하게 제이드의 행동들이 내가 ‘아카마’에서 마지막에 히든 엔딩을 보기 위해 선택했던 루트를 답습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애초에 샬롯을 선택하는 루트도, 샬롯 아메드가 그나마 연애에 대한 집념이 약했기 때문에, 미연시 게임인 ‘아카마’에서 연애를 회피하고 히든 엔딩에 도달하는 방법이기도 했었다.
‘기분 탓인가……?’
나는 이내 잡생각을 떨쳐 버렸다.
아무튼, 제이드가 샬롯을 택한 이상 캐서린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 꺄아아아아아!!
째지는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처녀 귀신이, 갑자기 내 얼굴 앞에 거꾸로 매달려 나타났다.
그러더니 나와 눈이 마주친 처녀 귀신은, 입을 쩍 벌려 기묘하게 움직이는 혀로 내 코를 살짝 핥았다.
무언가 축축하고 끈적거리며 차가운 것이 코를 훑는 불쾌한 감촉.
‘우와아아…….’
그러나 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눈앞의 처녀 귀신에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잘 구현했네.”
“그러게요.”
눈앞의 처녀 귀신의 정체는 바로 방출계 마법으로 만들어진 시뮬레이션이었다.
소환계와 다르게 온전히 마나만으로 이루어진 허상이어서, 그저 끈적거리는 느낌과 축축한 느낌만 전달할 뿐 실제로 무언가가 내 코를 핥은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4D 영화나 다름없었다.
방출계 마법은 의료, 제작뿐만 아니라 이렇게 시뮬레이션 분야에도 활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만능 비전투 계열인 것이다.
물론 제이드라는 예외적인 공격형 방출계 녀석이 존재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안 무서워요?”
이내 내 앞에 거꾸로 매달린 귀신이 사라지자 캐서린이 넌지시 물어 왔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가짜잖아. 허상인 걸 아는데 무서울 리가 있나?”
“특이하네요.”
“그러는 너야말로 그다지 안 놀란 거 같은데?”
“저요……?”
잠깐 침묵하는 캐서린.
그리고 이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그야 어렸을 때부터 오라버니가 어두운 곳에 자주 가둬 놔서요. 그때마다 귀신이 튀어나올까 봐 겁먹었는데, 하도 반복되니까 이젠 무섭지 않게 됐네요.”
“…….”
역시 골드버그 남매의 사연은 조금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는 살짝 침울해진 분위기에 황급히 화제를 돌리고자 했다.
“그,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미안.”
“네? 왜요?”
“사실, 제이드랑 엮어 주려 했었는데, 오늘.”
“아아……. 그런 거였어요?”
내 말에 캐서린은 쇼핑백을 든 양손을 뒷짐 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휙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빤히 보았다.
“오늘은 한 번 봐 드릴게요. 다음부턴 그러지 마세요.”
“…응? 그, 그래.”
살짝 째려보는 듯한 그녀의 표정에 나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캐서린의 일은 아무래도 오지랖인 듯싶다.
제페토 쪽이야 본인이 부탁했으니까 그렇다 쳐도, 캐서린은 본인 스스로 관계를 만들어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제페토 쪽은 잘하고 있으려나?’
뒤쪽을 힐끔 돌아봤지만 따라 들어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 까탈스러운 제페토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제대로 잡을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