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86화 (86/175)

86화

수많은 군주급 마물의 모습에 리스폰 지역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곧 리스폰 지역에 있던 학생들 중 한 녀석이 패기 있게 앞으로 나섰다.

“고작 중간고사에 이렇게 많은 군주급 마물이라고? 말이 안 되잖아. 다 가짜 아니야?!”

눈앞에 보이는 군주급 마물들이 허상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해 보려는 듯, 리스폰 지역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한 남학생.

그러나 남학생의 패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콰과과광!!

리스폰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그 앞에 즐비해 있던 군주급 마물 중 하나가 쏜 레이저에 맞고 녹아 버린 것이다.

이내 남학생의 몸은 다시금 리스폰 지역으로 복귀되어 있었다.

“말도 안 돼…….”

남학생은 몸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주변 학생들이 이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저게 진짜라고……?”

“지금 이거 중간고사는 맞는 거지?!”

“교수님들 반응도 이상한데?”

확실히 교수 진영 쪽도 학생들의 반응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명백히 지금 상황은 의도된 시나리오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 혼란 속에서 다소 침착해지려고 노력했다.

곧 살며시 눈을 감고는 현재 상황을 곱씹어 봤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인데……. 이건… 집사잖아……?’

집사.

우물 킬이라고도 불리는 게임 용어.

흔히 상대방의 리스폰 지역에서 상대방을 계속해서 죽이는 행위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애초에 죽임을 당하는 곳이 리스폰 지역임으로 대상은 죽자마자 부활한다.

그리고 또 상대방은 부활하자마자 대상을 죽인다.

그리하여 대상은 리스폰 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집사 및 우물 킬은 게임 속에서 지독한 비매너로 불리는 행위였다.

왜인진 몰라도, 이 리스폰 지역을 감싼 군주급 마물들은 우리에게 그러한 ‘집사’를 명백히 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이러한 집사 행위가 교수들이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교수들도 명백히 이 상황에 당황하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아니, 어떻게 고작 1학년생들 시험에 저렇게 많은 군주급 마물이 나타난 거예요?”

“샌드윅스 교감님,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이번 중간고사는 처음으로 실시되는 유례없는 통합형 중간고사.

이러한 큰 프로젝트는 교감 측이 승인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하여 교수진들은 실라이 샌드윅스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기 시작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나도 그러한 교수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이번 중간고사 던전은 루퍼스 그레이엄 교수가 발의한 내용으로… 루퍼스 교수가 직접 던전을 설계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루퍼스?! 그 자식이 이곳을 설계했다고?!’

어쩐지 처음부터 이상했다.

고작 1학년생들의 중간고사에 등장한 군주급 마물들.

애초부터 난센스였다.

‘아니 저 교감이라는 사람은 이걸 검토도 안 하고 승인한 거야……?’

뻔했다.

능력 있고 신임받는 젊은 교수가 갑자기 그럴듯한 아이디어를 발의하고, 게다가 본인이 직접 던전 설계까지 도맡아 하겠다니, 저 늙다리 교감 입장에서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좋다며 허락한 거겠지.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사람이 이 칼루스 아카데미의 교감이라니…….

결국 이 사달이 난 원인은 루퍼스 그레이엄이 블랙잭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 이전에 실라이 샌드윅스가 관리 감독을 허술하게 한 책임도 매우 컸다.

나는 허탈한 마음에 실라이를 살짝 째려보았다.

실라이는 안 그래도 교수들에게 둘러싸여서 질타를 받고 있었다.

그런 교수들 사이에서 실라이 샌드윅스는 어떻게든 상황을 모면하고자 땀을 삐질 흘리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 그 일단 다들 상황이 안정화될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어쨌든 당장에 위험한 것은 아니니까, 조금 차질이 생긴 것뿐이니까요. 중간고사의 진행에 관한 부분은 다시금 검토하면 되는 거고요…….”

당장에 위험하지 않아……?

응? 잠깐만…….

나는 실라이 샌드윅스의 말에 불현듯 싸한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을 검증하기 위해 곧바로 감지 마법을 사용해 보았다.

「프레시스코(præscísco)」

우우웅.

주변의 마나 정보가 혼란스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눈을 감고 녀석, 루퍼스 그레이엄의 자취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 녀석의 탁한 녹색 마나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젠장!!”

나는 바닥에 발을 내리찍었다.

애꿎은 바닥은 그와 함께 움푹 패게 되었다.

‘녀석은 분명 외부로 빠져나갔어.’

목적은 모르겠으나 의도는 확실했다.

녀석은 이 중간고사용 던전에 칼루스 아카데미의 교직원과 1, 2학년 학생들을 전부 가둬 놓은 것이다.

나는 녀석의 대범함과 당장 벌어진 현실에 눈앞이 살짝 아찔해졌다.

그때, 내 표정을 보고 옆에 있던 제이드와 루비가 말을 걸어 왔다.

“무슨 일이야?”

“중간고사 때문에 그런 거야? 그래도 어차피 리스폰 지역에 있으면 별문제는 없을 거 같은데……?”

“…….”

나는 대답 대신 입술을 피가 날 듯이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이곳이 아니라 던전 밖이 위험할지도 몰라.”

“밖이 위험하다고?!”

눈이 휘둥그레진 루비 버밀리온.

나는 이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루퍼스 그레이엄, 그 자식이 바로 블랙잭이거든.”

“블랙잭이라고?! 위저드 협곡에서 우릴 노렸던 그 블랙잭?! 어떻게 루퍼스 교수님이 블랙잭이야……?”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녀석이 블랙잭이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루비와 제이드의 눈동자를 번갈아 보며 쳐다보았다.

“애초에 녀석은 우릴 여기 가둬 놓기 위해 이 중간고사 던전을 설계한 거야. 실제로 우린 갇히게 되었고. 녀석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녀석은 밖에 있는 무언가를 노리고 있는 게 분명해.”

“…….”

루비는 쉽사리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역시, 그렇겠지.

내가 생각해도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다.

아무래도 지금껏 선량한 가면을 쓰고 행동했던 루퍼스였다.

그런 그를 당장 내 말 하나로 의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에 먼저 반응한 건 뜻밖에도 제이드였다.

“그래도 대부분이 던전 안에 있어서 다행이네.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안전하다는 거잖아?”

“너… 내 말을 믿는 거야?”

“응, 믿어.”

제이드의 얼굴엔 평소의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중에서 제일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드의 말을 듣고 있던 루비 버밀리온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나도 믿어. 조금 뜬금없긴 했지만, 제로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것보다 그게 진짜라면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는데?”

“너희들…….”

나는 살짝 입술을 떨면서 녀석들의 표정을 훑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 주고, 믿어 주었다.

그러나 이내 나는 고개를 젓고 정신을 차렸다.

언제까지 감상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럼, 도와주는 거지?”

“당연하지.”

“물론.”

정말 든든한 동료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녀석들의 모습에 힘을 얻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문득 머릿속에 드는 의문이 있었다.

‘그나저나 녀석과 블랙잭의 목적은 뭐지?’

위저드 협곡을 습격했을 당시에는 우리 중 누군가를 노린다고만 생각했었다.

‘아카마’의 일을 떠올려 보면 녀석들은 그저 모두를 학살할 뿐이었다.

그 두 가지 사건에 공통점은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아예 모두를 이곳에 가둬 놓다니.

덕분에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을 거 같으면서도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가만, 지금 외부에 있는 게 뭐지……?”

그리고 이내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교장.”

“응?”

내 혼잣말에 루비가 반문했다.

그리고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히로빈 교장님이 위험해!!”

* * *

한편 교장실.

히로빈 그린월드는 여느 때처럼 교장실의 소파에 누워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뿅뿅!

뿅!

그러나 그 기세 좋은 소리와는 달리, 게임기 속 고양이 캐릭터는 계속해서 장애물에 걸려 게임 오버 당할 뿐이었다.

“끄응… 어렵구만. 그 제로라는 친구가 할 때는 꽤나 쉬워 보였었는데.”

당시 교장실을 방문했던 제로는 신들린 컨트롤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고양이를 조종해 냈다.

히로빈 그린월드는 내심 그때의 제로처럼 플레이하고 싶었지만, 손가락이 따라와 주지 않아 야속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히로빈은 장애물을 돌파할 때까지, 계속해서 게임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똑똑!

누군가 교장실의 문을 두드렸다.

“응? 누구야? 들어와.”

히로빈의 대답에 이내 문이 끼익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히로빈이 힐끔 쳐다보자 그는 다름 아닌 루퍼스 그레이엄이었다.

“오오, 무슨 일이야. 지금 중간고사가 한창 진행 중이지 않나?”

“그렇긴 한데, 잠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래 그래. 앉아서 이야기해.”

히로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채, 여전히 누워 있는 상태로 루퍼스를 맞이했다.

심지어는 게임기를 놓지도, 시선을 떼지도 않았다.

그만큼 옛 제자 루퍼스와 거리감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루퍼스는 그런 히로빈의 모습에 옛 생각이 나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맞은편 소파에 조심스레 앉게 되었다.

자리에 앉은 루퍼스를 힐끔 보던 히로빈은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겨서요.”

“궁금한 거라니?”

대답하다가 실수로 죽어 버린 게임기 속 캐릭터.

히로빈 그린월드는 이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7년 전 일… 기억하십니까?”

“7년 전이라면… ‘그 사건’을 말하는 거야?”

여전히 시큰둥한 반응의 히로빈 그린월드.

그는 7년 전 있었던 일에 대해 딱히 유감이 없어 보였다.

“7년 전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가요? 왜 그 학생들이 히로빈 교장님을 노렸던 겁니까?”

“나를 노린 이유……?”

그제야 히로빈은 게임기를 살짝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듯, 소파에 몸을 뻗은 채로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 친구들이 찾고 있는 게 있었거든.”

“찾고 있는 거요?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그것’을 뺏기신 건가요?”

“헤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뺏겨 버렸어. 나도 늙은 걸까, 고작 학생들에게 당해 버리다니. 물론 하나뿐이긴 했지만.”

“하나요? 그렇다는 말은 남은 하나가 또 있다는 거군요?”

“응. 아직 가지고 있지.”

별거 아니라는 가벼운 말투의 히로빈 그린월드.

여전히 히로빈은 루퍼스 쪽을 전혀 경계하지 않은 채, 이내 다음 게임을 이어 나가려고 게임기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루퍼스 그레이엄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그 나머지 ‘큐브’도 내놓으셔야겠는데요.”

동시에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루퍼스 그레이엄.

“……!”

히로빈은 그 모습에 빠르게 주문을 외우려 했다.

그러나,

푸우욱!

루퍼스의 동작이 훨씬 빨랐다.

이내 루퍼스의 품 안에서 나온 무언가는 히로빈의 가슴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럼, 그 남은 하나를 주셔야겠습니다.”

“너, 너…….”

히로빈은 말을 더듬으며 계속해서 마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변신계를 상징하는 녹색의 마나는 몸으로부터 빠져나오기만 할 뿐, 정작 마법은 사용되지 않았다.

‘바, 방심했다.’

녀석은 7년 전부터 히로빈이 아끼는 애제자.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었다.

“그건 ‘히드라의 독니’입니다. 5년 전에 얻었죠. 아마 당신에겐 쥐약인 거겠지요?”

“히, 히드라의 독니…….”

‘신을 죽이는 무기’라고 알려진 히드라의 독니.

히로빈 그린월드는 그 전설급 아이템에 가슴이 찔린 것이다.

이내 히로빈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루퍼스 그레이엄의 입가엔 미소가 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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