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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87화 (87/175)

87화

* * *

“히로빈 그린월드 교장님이 위험하다고?”

내 말에 루비 버밀리온이 반문했다.

그리고 제이드도 고개를 갸우뚱했다.

“히로빈 교장님은 아무리 그래도 200년 전 마계대전의 영웅이신데?”

그러나 내 머릿속은 여전히 히로빈 교장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결국 현재 던전 외부에 있을 만한 인원은 히로빈 그린월드밖에 없었다.

게다가, 생각해 보면 그 마기를 품고 있던 검은 구체를 설치한 위치도 이상했다.

사실상 칼루스 아카데미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은 변신계의 영웅인 히로빈 그린월드.

그러나 구체가 노린 것은 교직원실과 아우레인의 기숙사뿐이었다.

그렇다는 소리는 히로빈 그린월드를 막을 무언가의 계책이 블랙잭 녀석들에게 있었다는 말로 들리기도 했다.

“어쨌든, 일단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먼저 아닐까?”

제이드의 말에 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지……?”

리스폰 구역을 포위하고 있는 수많은 군주급 마물.

그나마 다행인 점은 녀석들이 리스폰 구역 안으로까지는 들어오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상공으로 갈 수도 없고.”

애초에 녀석들의 기본적인 크기가 5m 이상이었다.

루비의 중력 마법을 빌려 공중으로 강행한다 해도 녀석들에게 잡힐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일단 시도는 해 볼까?”

고도가 문제라면 그보다 더 높이 날면 되는 것이었다.

기압이라든가, 온도 문제는 제이드의 방출 마법으로 몸을 감싸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먼저 상공으로의 도주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콰과광!!

성층권 높이에서 도주를 시도한 우리의 몸은 이내 리스폰 지역으로 돌아와 있었다.

“젠장. 역시 상공은 무리인 건가.”

아무리 고도를 높인다 해도 군주급 마물들이 날려 대는 마법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허공에 떠 있어서인지 더더욱 움직임이 제약돼 회피 자체를 시도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당장 루퍼스 그레이엄이 외부에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을지 모르는데, 어쩔 도리가 없으니 조금 답답했다.

그런데 그때,

“쓸데없는 짓이에요.”

지켜보던 실라이 샌드윅스가 넌지시 말을 걸어 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살짝 노려보았다.

“어차피 여기 있으면 안전하고, 가만히 있으면 곧 외부에서 꺼내 줄 텐데 왜 쓸데없는 행동을 하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뭐, 뭐라고요?!”

“당신이 무능하다고 타인의 노력마저 폄하할 생각은 마시죠, 실라이 샌드윅스 교감님.”

나는 순간 욱해서 곧이곧대로 말해 버렸다.

다만, 말을 내뱉은 것에 후회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지금 당장 외부에 침공 이벤트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데, 교감이니 학생이니 신분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마당에 시비를 거는 실라이 샌드윅스가 고까울 뿐이었다.

“지, 지금 뭐라 그랬나요!!”

“샌드윅스 교감님은 그저 이곳에서 기다리기나 하시죠. 왜 루퍼스 그레이엄이 던전을 이따위로 설정했는지, 지금 우리가 갇혀 있는 동안 외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전혀 생각도 하지 말고 말이에요.”

“다, 당장 이리 오세요! 제로 학생에게 벌점을 부여하겠어요!”

“네에 네에, 그러세요.”

나는 이내 실라이 샌드윅스를 무시하기로 했다.

뒤에서 씩씩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아예 대꾸조차 안 했다.

그러나 사실 다른 교수님들의 대처도 실라이 샌드윅스와 다를 바가 없었다.

다들 그저 이곳에서 구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

이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이나, 해결 방안에 대한 모색의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저들은 침공 이벤트를 미리 겪은 것도 아니었고, 루퍼스가 블랙잭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 대한 화를 거둘 수 없었다.

“던전 외부로 나가려면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 건 확실하지?”

그런 나에게 루비가 말을 걸어 왔다.

어쩌면 내 분노를 읽고 화제를 돌리려는 시도일 수도 있겠다.

“응. 확실해. 원래의 골인 지점에 도달하게 되면 외부로 나갈 수 있을 거야.”

골인 지점에서 엄청난 마나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감지 마법으로 확인되고 있었다.

분명, 저곳이 출구일 것이다.

애초에 루퍼스 그레이엄이 이 던전을 전부 설계했다 하더라도 외관상으로는 시험용 던전으로 꾸며 놨을 테지.

그리하여 출구도 멀쩡히 있고, 버프 시스템도 멀쩡히 있는 거고.

루퍼스가 건드린 부분은 오직 마물에 대한 설정뿐인 듯싶었다.

“결국 정면 돌파밖에 답이 없는 거네.”

제이드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럼, 계속해서 부딪쳐 보자. 어차피 죽는 것도 아니잖아?”

죽는 것도 아니다라.

녀석의 말이 맞았다.

“그래. 포기할까 보냐.”

그리하여 우리의 무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한 번은 아예 정면으로 돌파를 시도해 봤다.

그리고 한 번은 제이드의 방출 마법으로 땅굴을 파고 아래로 들어가 보기도 했다.

또 한 번은 거대 솜사탕으로 변한 매기의 몸속에 탑승하여 뚫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시도는 번번이 막힐 뿐이었다.

상대는 군주급 마물.

그것도 수십 마리의 군주급 마물이었다.

그런 녀석들을 상대로 뚫고 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스폰 지역에서 앉아 있는 교수들과 학생들은 그런 우리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아마도 미친놈으로 봤는지 비웃는 녀석들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도전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앉아 있던 학생 무리 중에서 누군가가 걸어왔다.

“또 대책 없이 무모하기만 하네.”

“응?”

나는 터벅터벅 들려오는 발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것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오스카 큐리어스?”

“그래도 이름은 기억하는구나?”

나는 녀석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옆에 있는 루비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쟤는 비무제 때 걔잖아?”

“비무제?”

“아, 제이드는 비무제 때 없었지 참? 쟤 비무제에서 우리 기숙사 애들을 공격했던 녀석이야.”

오스카는 루비와 제이드가 속닥거리든 말든 별 신경 쓰지 않고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앞에서 멈춰 서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

“뭐를?”

“너, 저길 뚫을 생각인 거지?”

“그야… 맞지……?”

그러자 녀석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도와줄게. 당장 준비해.”

“뭐? 도와준다고?.”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지?

오스카는 공간 이동이 가능한 물질계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 주는 형식의 고유 마법도 아니었다.

그저 녀석은 정신계일 뿐이었다.

응? 정신계?!

“너, 설마…….”

“10초. 10초 정도는 가능할 거 같은데, 괜찮겠어?”

오스카가 말하는 10초의 의미.

나는 곧 그것을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많은 군주급 마물을 지배할 수 있다고? 농담이지……?”

“그래. 좀 많으니까 10초가 한계야. 그것도 생명의 마나를 건드려야겠지만.”

“생명의 마나를 건드린다고……? 그건 너무 위험하잖아?!”

“걱정 마. 누구처럼 고작 이런 거에 목숨을 걸진 않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오스카 큐리어스의 어투는 무미건조했다.

다만, 녀석의 입가는 분명 미소 짓고 있었다.

“…그저 나도 조금 진심이 생겼을 뿐이야. 서둘러 준비해.”

나는 말없이 녀석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 이면에는, 나름의 진심이 느껴지고 있었다.

“…고마워.”

녀석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오스카 큐리어스와는 그저 비무제 때 한 번 만났을 뿐인 인연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그것도 본인의 생명의 마나를 걸고 도와주겠다니…….

‘뭐, 어쨌든 내가 저 녀석을 구해 줬던 빚도 있으니까.’

아무튼 오스카 큐리어스는 첫인상과는 다르게, 좋은 녀석으로 느껴졌다.

“그럼, 우리도 준비하자. 루비는 중력 감소 마법을 걸어 줘.”

“으응.”

우우웅.

곧 모두를 감싸는 루비 버밀리온의 붉은 마나.

우리는 달릴 준비를 끝마쳤다.

그러자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고 있던 오스카가 우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 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응원할게.”

“응. 고마워.”

그리고 나는 루비와 제이드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리고 동시에 리스폰 지역의 출구로 달리기 시작했다.

탓탓탓탓!

곧 우리는 순식간에 출구와 가까워졌고, 그런 우리를 보며 군주급 마물들은 곧바로 공격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멀리서 오스카의 주문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무스 임페리움(ánĭmus impérĭum)!!」

그러자,

우우우우웅!!

순식간에 주황색 마나의 폭풍이 마물들의 머리 위로 휘몰아쳤다.

그러더니 녀석들은 순간 동작을 멈췄다.

“성공했나?!”

우리는 매우 놀람과 동시에 필사적으로 마물들 사이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진짜 이 수많은 마물을 지배했다고? 그것도 그냥 마물들이 아니라 군주급 마물들인데?!’

물론 오스카의 현재 마법은 지배라기보다는 동작의 억제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이 수많은 군주급 마물을 단번에 제압하는 실력이라니…….

역시, 비무제 때도 알아봤지만 오스카의 정신계 마법 소질은 놀라울 따름이었다.

루비의 중력 마법을 받은 우리는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고, 어느새 섬의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뒤를 흘끔 돌아보자 약속된 10초의 시간이 끝나, 군주급 마물들의 억제가 풀려 있었다.

이내 도주하는 우리를 보며 괴성을 질러 대는 군주급 마물들.

뒤늦게 우리를 쫓아 오려 했지만, 이미 거리는 상당히 벌어져 있었다.

“사실은 좋은 녀석이었네, 오해하고 있었잖아?”

옆에서 달리고 있는 루비의 말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숙사가 같았고, 녀석의 불행한 과거가 없었더라면, 어쩌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리스폰 지역을 빠져나온 뒤로 계속해서 골인 지점을 향해 달렸다.

아무래도 섬의 마물들 대부분이 각각의 리스폰 지역에 몰려 있는지, 이동 중에 마물을 마주치진 않았다.

달리던 와중, 문득 나는 루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저기…….”

“응?”

“혹시 입고 있는 로브, 나한테 줄 수 있어?”

“로브는 왜……?”

루비는 뜬금없다는 듯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나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더더욱 그녀에게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그야 지금 당장 침공 이벤트가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시점에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영웅의 아티팩트는 너무나도 소중했으니까.

그리하여 나는 루비 버밀리온을 제대로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고유 마법과 관련 있거든. 지금 당장 블랙잭이 침공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조금이라도 힘이 더 필요할 거 같아서.”

“내 로브가 고유 마법과 관련이 있다고……?”

루비는 어이없다는 듯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나는 최대한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안 돼. 이 로브는 오빠가 물려 준 너무나도 소중한 로브야.”

“그래……? 알겠어.”

어쩔 수 없었다.

뜬금없이 소중한 로브를 내놓으라는 말을 들은 그녀의 입장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그냥 지금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자.’

나는 그렇게 마음먹었다.

한참을 달린 우리는 어느새 골인 지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의 다 도착한 거 같은데? 응……?”

그런데 순간 나는 달리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루비와 제이드도 급정거를 했다.

“저게… 말이 돼……?”

골인 지점에 우글우글 몰려 있는 수많은 군주급 마물.

그 압도적인 모습에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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