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붉은빛이 흘러나오는 포탈.
그리고 그 주위를 뱅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군주급 마물.
우리는 풀숲 뒤에 숨어 그 모습을 감시할 뿐이었다.
“어찌해야 하나…….”
리스폰 지역에서는 오스카 큐리어스의 도움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지만, 이번엔 정말 답이 없었다.
“어떻게든 저 포탈을 밟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보통 포탈을 밟으면 곧바로 전송되잖아.”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냐는 식으로 말하는 루비 버밀리온.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만약에 실패하기라도 하면 우린 다시 리스폰 지역에서부터 시작해야 해.”
오스카 큐리어스가 아무리 괴물 같은 녀석이라 할지라도, 리스폰 지역의 수많은 마물에게 마법을 사용하느라 이미 탈진 상태일 것이다.
따라서 자칫 여기서 피해를 입어 리스폰 지역으로 가게 된다면, 영영 이 던전을 못 빠져나갈 수도 있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녀석들을 전부 몰살시키는 것.
다만 녀석들은 일개 잡몹이 아닌 군주급이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한 방법이었다.
차선책은 녀석들을 포탈 밖으로 유인시키는 것.
그러나 애초에 유인시키기도 전에 녀석들의 공격에 게임 오버 될 게 분명했다.
“저 녀석들의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 응?!”
갑자기 머릿속에 번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녀석들의 공격을 버틸 수 있을 만한 존재.
애초에 대미지는커녕 죽음 자체를 겪지 않는 그런 존재.
그리하여 나는 곧바로 허리춤의 인벤토리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이전의 용암 던전에서 얻은 피닉스의 알이었다.
“그건… 뭐야?”
“피닉스의 알.”
“피닉스? 설마 불사의 존재 피닉스를 말하는 거야? 그 불사조의 알을 얻었다고?!”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이 알의 출처를 설명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보다 내 머릿속에 든 의문은 과연 이러한 작전이 먹혀들는지의 여부였다.
‘이제 막 부화하는 녀석인데 내 말을 들을까?’
그러나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피닉스의 알에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우우웅.
곧 피닉스의 알에 빛이 나기 시작하더니, 눈앞에 시스템 창이 나타났다.
[‘피닉스의 알’이 부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이템 ‘피닉스의 알’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수락]
[▶ 거절]
나는 주저 없이 수락의 선택지를 골랐다.
그러자 알이 쩌저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휘이이이이익!
머리 위로 거대한 피닉스가 날갯짓을 하며 나타났다.
녀석은 방금 막 알에서 나왔음에도 일전에 용암 던전에서 봤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와아아!”
“이, 이게 정말 사역마라고……?”
그 모습에 제이드와 루비 버밀리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붉은 포탈을 지키고 있는 군주급 마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녀석들은 피닉스의 등장에 경계 태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 서둘러 피닉스에게 명령을 내리고자 했다.
“저기… 피닉스……? 아니 피닉스 님?”
휘이익?
날개를 펄럭이며 나를 내려다보는 피닉스.
녀석의 맑은 눈동자를 보아 대화가 통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저 녀석들을 포탈 밖으로 유인해 줄 수 있겠어?”
휘이이익!
녀석은 대답 대신 하늘 위로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 말을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명령을 들어줘서 다행이네.’
혹시 용암 던전에서의 일을 기억하여 공격적인 태도로 나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래도 주종 관계는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이내 피닉스는 크게 활공하더니 포탈이 있는 쪽으로 접근했다.
그 모습에 군주급 마물들은 방심하지 않고 피닉스를 향해 일제히 공격을 날렸다.
끼이이익!!
그러자 순식간에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소멸해 버린 피닉스.
역시 용암 던전에서 파르에게 밀렸던 것이 단순 기우가 아니었다는 듯,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쉽게 부서져 버렸다.
그러나 녀석은 단순히 죽은 게 아니었다.
피닉스는 이내 불씨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마물들은 어리둥절한 듯 보였다.
그리고 곧, 불씨 속에서 피닉스가 부활했다.
휘이이이익!!
피닉스는 다시금 마물들을 포탈로부터 유인해 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녀석들의 공격에 죽어 버린다.
‘어째, 조금 미안한데…….’
몇 주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피닉스였다.
그런데 부활하자마자 이렇게 매몰찬 명령을 받게 되다니.
‘피닉스야……. 고맙다…….’
나는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피닉스는 죽고, 부활하고, 유인하고를 반복했다.
마물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을 꼬셔 대는 피닉스를 따라갔고, 어느새 포탈에서 꽤 벗어나 있었다.
“지금이야!!”
나는 제이드와 루비 버밀리온에게 신호를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루비의 중력 감소 버프를 받은 채, 붉은 포탈을 향해 뛰어갔다.
그 모습에 뒤늦게 피닉스를 쫓던 마물들이 서둘러 우리 쪽으로 오려 했지만, 이미 거리는 꽤 벌어진 상태였다.
“피닉스야, 정말 고맙다! 너의 희생은 잊지 않을게!!”
나는 피닉스에게 들리게끔 큰 소리로 녀석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그런데 아직 변수는 남아 있었다.
“…어어?!”
포탈의 옆에 마치 롯데타워처럼 솟아 있는 자이언트 웜.
중간고사가 시작하자마자 루비 버밀리온을 공격했던 그 녀석이었다.
곧 자이언트 웜은 우리를 발견하고는,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우릴 향해 주둥이를 흔들어 댔다.
“다들 나한테 붙어!!”
나는 빠르게 판단을 하고 오더를 내렸다.
그러는 사이에 내 손은 목에 걸린 오팔 목걸이를 향해 있었다.
키에에에엑!!
이내 주둥이에서 녹색의 액체를 쏟아 내는 자이언트 웜.
그 녹색의 액체는 마치 비처럼 우리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동시에 나는 오팔 목걸이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그러자 순식간에 목걸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녹색의 액체들.
옆에 있던 루비 버밀리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한 거야?”
“일단 뛰어!”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붉은 포탈을 밟았다.
그러자 포탈에서 빛이 새어 나오더니 이내 우리를 감쌌다.
슈우우웅!
잠깐 눈앞이 번쩍이더니, 이내 보이는 것은 아카데미의 숲이었다.
“성공…한 건가.”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털썩 누워 버렸다.
지금껏 계속해서 뛰어다닌 터라, 긴장이 풀리자마자 피로가 확 몰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지금 당장 아카데미가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휴식을 취할 여유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그때,
크르르르.
키에엑.
가려진 나무들 사이로 무언가 기분 나쁜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로 파악하건대, 적어도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곧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들.
“…마인?”
“위저드 협곡에서 봤던 그 녀석들이잖아!”
녀석들은 마치 좀비처럼 안색이 창백하고, 눈동자엔 초점이 없었다.
우리를 포위하는 마인들의 모습을 보자 떠오르는 것은 하나였다.
‘역시 침공 이벤트가 시작된 건가?’
녀석들이 이 칼루스 아카데미의 숲 내부에 있다는 것은 결국 침공 이벤트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녀석들이 노리는 것은…….’
그런데 그때,
“뭐야, 제 발로 기어 나왔잖아?”
마인들의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하트.
그는 저벅저벅 수풀을 밟으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수고를 덜었네. 그나저나 스페이드 이 자식, 일 처리를 제대로 한 게 맞나? 어떻게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거지?”
하트는 계속해서 투덜대고 있었다.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녀석의 모습을 바라만 볼 뿐이었다.
그리고 곧 우리와 다소 거리를 벌리고 멈춰 선 하트.
마인들은 녀석의 명령을 기다리는지 움직이지 않은 채 그저 우리를 빼곡히 둘러쌀 뿐이었다.
‘뭐가 이렇게 많아…….’
힐끔 나무 사이사이를 살펴본 결과, 시야에 들어오는 마인들만 해도 수백이 넘어 보였다.
나는 그 묘한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고는 이내 하트를 노려보았다.
“이러는 목적이 뭐지? 왜 칼루스 아카데미를 노리는 거야?”
“우리의 목적……?”
하트는 이내 이마를 손으로 짚고는 고개를 젖히고 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왜 웃는 거냐……?”
“곧 죽을 녀석들이 이유를 묻는 게 가소로워서 말이지.”
하트는 자만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녀석의 태도에 코웃음을 쳤다.
“글쎄다. 고작 케이든 교수님 한 명에게조차도 쩔쩔매는 녀석들이 칼루스 아카데미를 어떻게 넘보려고?”
“뭐, 뭐라고?!”
빙고.
케이든 교수의 언급에 녀석의 얼굴이 이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아무래도 위저드 협곡에서 케이든 교수를 상대로 도망친 건 블랙잭의 역린인 듯싶었다.
녀석의 감정이 흐트러진 지금.
나는 이때다 싶어서 곧바로 녀석들의 목적을 넌지시 유도해 봤다.
“너희들의 목적은 역시 히로빈 교장님이지?”
“풉…….”
이내 녀석은 조금 안정을 찾았는지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꼬마야.”
“반은 틀리다고……?”
“나머지 목적은 여기 있는걸?”
여기 있다고……?
우리 중 하나를 노린단 소린가?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서 그런 거였나.’
하트의 말대로 녀석들, 블랙잭의 목적은 두 가지로 보였다.
하나는 교장 히로빈 그린월드.
이유는 모르겠지만 녀석들은 히로빈 그린월드를 노리기 위해 학생들과 교수들을 던전 안에 가둬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적은 지금 여기 있는 우리 중 하나.
나는 그게 ‘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녀석들은 내 방문 앞에 그 검은 구체를 심어 놓았던 전적이 있었으니까.
다만, 나를 노릴 만한 이유는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교장님은 어떻게 했지?”
“글쎄. 지금쯤 스페이드가 처리하지 않았을까?”
녀석의 자신만만한 표정을 보아 허세는 아니었다.
내 예상대로, 녀석들은 분명 히로빈 그린월드를 죽일 만한 방법을 따로 마련한 것이다.
‘여기서 마냥 시간을 끌 순 없어. 한시가 급하잖아.’
당장 중요한 것은 히로빈 그린월드의 안위였다.
빠르게 판단한 나는 제이드와 루비 버밀리온에게 속삭였다.
“서둘러 도망치자. 지금 당장은 히로빈 교장님 쪽이 급하니까.”
그런데 내 말에 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여기 남을게.”
“여기 남는다고……?”
“응. 어차피 저 녀석도 우릴 쉽게 보내진 않을 거야. 내가 남아서 저 녀석을 저지할게.”
그러자 옆에 있던 루비 버밀리온도 어깨를 으쓱했다.
“제이드, 혼자 괜찮겠어? 나도 남을게. 남아서 저 녀석의 발목을 잡을 테니까, 제로가 교장님 쪽을 확인해 줘.”
나는 루비, 제이드와 말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나는 아카데미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달려드는 마인들.
그러나 내게 달라붙는 마인들은 제이드의 방출 마법과 루비 버밀리온의 중력 마법에 쉽게 제압되었다.
‘녀석들을 믿자.’
영웅의 가문 엘가시아와 버밀리온의 핏줄들이다.
이곳에서 호락호락하게 당할 녀석들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교장 히로빈 그린월드의 상태 확인이 더 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째 쉽게 보내 주는 거 같은데……?’
어느새 뒤에서 따로 추적해 오는 마인들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절대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말을 한 녀석치고는 너무나도 소극적인 태도였다.
계속해서 달리던 나는, 이내 하트가 나를 그냥 보내 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숲을 벗어나자마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녀석.
“너는……!”
“또 만나게 됐군.”
아우레인 기숙사 뒤편의 벽에 팔짱을 끼며 등을 기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클로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