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 *
나는 마을로 내려가기 위해, 의원을 나서고 중림사의 출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노엘 선생의 약초 효과는 탁월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느껴졌던 극심한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평소의 발걸음보다 가벼운 듯한 느낌도 들었다.
‘확실히 마법이 없어서 그런지 이런 쪽의 기술은 좋네.’
물론 그마저도 마법과 비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 이곳의 약초학은 일반적인 경지를 뛰어넘은 듯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연병장을 사뿐사뿐 걸어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연병장의 구석 부근에서 기분 나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녀석이 달시 누나 뒤를 따라온 괴물이라지?”
“쉿. 들리겠다, 데이몬.”
변성기도 찾아오지 않은 듯한 꼬마들의 목소리.
나는 그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남자애 하나와 여자애 하나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모랫바닥 위에 만들어 놓은 모래성을 보아하니, 방금까지 이곳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와 시선이 맞닿은 남자애는 모른 척하며 다시금 모래성을 만드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 꼬마들은……. 나보고 괴물이라고?’
자기들 딴에야 안 들릴 줄 알았겠지.
미안하지만 전부 들었단다, 꼬마들아.
그리하여 나는 곧 그 꼬마들이 있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이!”
나는 큰 목소리로 녀석들을 불렀다.
그러자 꼬마들은 죄를 지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그 뒤를 쫓아 달렸다.
애초에 그다지 훈계할 생각도 없었지만, 도망가는 모습에 덩달아 쫓게 된 것이다.
“어딜 도망가려고.”
여자애 쪽은 엄청나게 재빨랐다.
이곳에서 마법을 쓰지 못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거의 성인 남성의 속도를 훌쩍 뛰어넘는 민첩함이었다.
반면, 남자애 쪽은 도망치는 게 뭔가 어설펐다.
게다가 그 남자애는 이내 얼마 가지 못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
이윽고 땅바닥을 구르며 흙먼지를 뒤집어쓴 남자아이는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앙!”
나는 그 모습에 당황하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꼬마의 울음소리에 딱히 달려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래도 다들 가문 회의를 하러 간 모양이라 연병장에 남은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였다.
살짝 안심이 된 나는 넘어진 꼬마에게로 다가갔다.
“오, 오지 마! 괴물!”
“괴물이라고?”
그런 부류의 놀이 설정인 건가.
하긴, 한창 어릴 때는 어른이 괴물로 보이는 법이지.
‘그러고 보니 나, 이곳에서는 어른이 아닌 건가?’
애초에 아카데미의 학생 신분이기에 어른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어쨌든 저 꼬마들보다는 충분히 나이가 많으니까.
내가 넘어져 있는 남자 꼬마에게로 다가서자, 이내 한창 도망가던 여자 꼬마가 달려오더니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데이몬을 건들면 가만 안 둬요!”
“딱히 건드릴 생각은 없는데.”
애초에 먼저 시비를 건 건 이 꼬마 녀석들 아니었나.
졸지에 악당이 되어 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이, 꼬마들아.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아무리 촉법소년이라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야.”
물론 이 세계에서도 꼬마들을 지켜 주는 법이 있을지의 여부는 모르겠다.
다만, 적어도 지금 이 꼬마들이 상당히 버릇없는 것은 확실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다가섰고, 여자 꼬마애는 곧 비장의 수를 꺼냈다.
“더 다가오면 달시 언니한테 이를 거예요!”
“달시한테 이른다고? 아이고 무서워라.”
“달시 언니가 무섭지도 않아요? 달시 언니는 세이피어 가문의 당주님이라고요!”
“뭐? 세이피어 가문의 당주님? 저엉말 무섭겠는데?”
꼬마를 놀리는 건 그다지 취미는 아니었지만, 상황이 제법 재밌었다.
고작 고민해서 나온 협박이라는 게 달시한테 고자질하겠다는 거라니.
나는 그런 꼬마들을 상대로 잔뜩 이죽거렸다.
“지, 지금 세이피어 가문을 모욕한 거예요? 용서하지 않겠어요!!”
갑자기 자세를 잡는 여자 꼬마.
그 모습에 나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뭐지? 얘도 중림사의 무술인인 건가? 그래봤자 애 아니야? 어차피 마나도 못 쓰는…….’
“커억…….”
당했다.
내가 방심하고 있는 사이 여자애의 정권 지르기가 내 복부에 꽂힌 것이다.
다행히 명치에 빗나가게 맞아서 망정이지, 급소에 꽂혔으면 그대로 무릎을 꿇었을지도 모르겠다.
“잘했어, 포비!”
어느새 남자애는 눈물을 그치고는 여자애를 응원하고 있었다.
그런 꼬마들의 전우애를 보며, 순간 진심이 울컥 튀어나왔다.
“너, 이 자식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애들 장난이라지만, 이대로 맞기만 하고 넘어가기에는 어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상대가 무술을 배운 꼬마라 해도 결국 초등학생 수준일 뿐.
성인 남성과 비슷한 내 피지컬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수개월 간 아텔라 교수님 밑에서 단련한 몸이었다.
“다 죽었다!”
“괴물이 분노했다!”
“꺄아아!!”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기 시작한 아이들.
그러나 나는 이를 악물고 진심을 다해 녀석들을 쫓았다.
그리하여 나는 곧 여자 꼬마를 붙잡을 수 있었고, 이어서 느릿느릿한 남자애도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내 양손에 붙잡힌 꼬마들은 곧 아우성을 치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 살려 주세요!!”
“이거 놔, 이 나쁜 괴물아!”
“…….”
살짝 열을 받았던 나였지만, 꼬마들의 반응에 곧바로 현실을 자각했다.
‘이거 누가 보면 영락없이 아동 학대 아닐까.’
물론 먼저 잘못한 건 꼬마들이었다.
게다가 내가 한 거라곤 고작 꼬마들의 뒷덜미를 잡은 것뿐.
그럼에도 자기 객관화를 하자면, 누가 봐도 이상한 광경은 맞았다.
그나마 가문 회의 덕분에 목격자가 없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나는 문득 이 녀석들이 누군지 궁금해졌다.
“너희들, 도대체 정체가 뭐냐?”
“우, 우린 세이피어 가문의 후계자다!”
“맞아요! 후계자인 우리를 건든 이상, 달시 언니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후계자?”
애초에 세이피어 가문의 당주는 달시였다.
그렇다면 후계자라는 것은…….
“…달시의 동생이라고?”
“이, 이제야 알아챘나 보지!”
“지금 큰 실수하는 거예요!”
“…….”
이 녀석들, 달시의 친동생들이었나.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버릇없는 태도들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애초에 달시가 이곳의 당주라면 이 아이들은 달시 바로 밑의 권력자들.
지금껏 달시가 칼루스 아카데미에 있었기에 더더욱 이곳에서 떠받들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아까 보니 당주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한 것으로 보였다.
결국 이 아이들은 지금까지 오냐오냐 길러졌기에 이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달시는 이 정도는 아닌데.’
달시가 좀 무모하고 제멋대로인 경향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버릇이나 인성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달시는 칼루스 아카데미에서도 나름 좋은 성격이라고 꼽을 수 있었다.
‘애들이라 그런 건가.’
나는 여전히 꿈틀거리며 반항하는 두 꼬마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희들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나는 괴물도 뭣도 아니야. 달시와 친구일 뿐이라고.”
“거짓말! 외부인은 다 괴물이라 그랬어!”
“맞아요!”
“아아, 그런 거야?”
그래서 그랬던 건가.
하긴, 이곳은 외부인의 출입이 적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고, 그리하여 이 꼬마들에게도 그런 이상한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나는 괴물이 아니라…….”
말을 이으려던 찰나,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꼬마들을 설득하려면 꼬마의 눈높이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괴물이 있다면 분명 그에 대항하는 반대의 존재도 있을 터.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용사야.”
“용…사……?”
“용사님이라고요?!”
“응. 이 세계를 지키는 용사지.”
갑자기 꼬마들의 태도가 조금 바뀌었다.
나는 초롱초롱해진 녀석들의 눈빛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역시 꼬마 녀석들을 설득하기엔 이만한 소재가 또 없었다.
“나는 너희들의 누나 달시와 함께 지금껏 마왕에 맞서 싸우고 있었어. 잠시 휴식이 필요해서 이 마을에 들른 것뿐이고. 그러니까 괴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오해야, 알겠어?”
“진짜요?”
“그, 그걸 어떻게 믿어!”
여자애 쪽은 조금 넘어온 것 같으나, 남자애 쪽은 아직도 적의를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허리춤에 있는 언노운을 뽑아 들었다.
파앗―!
뭉뚝한 날에 1m 남짓한 길이의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그 나름의 느낌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언노운을 들고 허공을 베기 시작했다.
솨악―
솩―
솨아악―
아텔라 교수님께 배운 검술 훈련이 헛되지 않은 듯, 나는 능숙하게 검술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꼬마들이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기에, 언노운의 마나 방출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한번 해 볼까?’
그리하여 나는 이내 눈을 감고 집중한 뒤 마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파지직―!
마나를 방출하려 하자, 세오린 산의 마나 억제 때문에 온몸에서 잠시 스파크가 일렁였다.
그리고 곧 잠잠해졌다.
‘역시 마나 억제 때문에 쉽지 않네.’
그러나 찰나의 스파크로 충분했다.
이미 나를 보는 꼬마들의 눈빛은 바뀌어 있었다.
그리하여 몇 번 더 검신을 휘두른 나는, 언노운을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어때?”
“멋있어요, 용사님!!”
“나, 나쁘지 않네.”
여자애 쪽은 완전히 믿는 것 같았고, 남자애 쪽은 그럭저럭 인정하는 듯 보였다.
역시 꼬마는 꼬마였다.
“그래, 앞으로 몇 주간은 이곳에 머물 거니까 깍듯이 대해야 한다. 알았지?”
“네, 용사님!!”
“으응…….”
“그나저나 너희들, 이름이 뭐니?”
“저는 포비고 이쪽은…….”
“데이몬.”
“그렇구나.”
달시의 동생들이니까, 포비 세이피어랑 데이몬 세이피어인 건가.
아무튼 이곳에서 영웅의 아티팩트를 찾기 전까지는 꽤나 머물 예정인데, 굳이 트러블을 일으켜서 좋을 건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구슬리는 편이 백번 나았다.
‘그럼 꼬마들도 완전히 넘어왔겠다.’
나는 이내 다시금 가던 길을 가려 했다.
“그럼 난 마을에 갈 거라서, 이만.”
“마을에 가신다고요?!”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진 포비 세이피어.
나는 그 모습에 살짝 의아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마을에는 가지 말랬는데.”
“누가?”
“어른들이.”
데이몬 쪽은 묘하게 말이 짧았지만, 그저 어린애의 말버릇이라 생각하면 그렇게 거슬리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마을을 내려가는 것을 만류하는 이 꼬마 녀석들의 태도였다.
‘달시는 딱히 뭐라 하진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의원에서 노엘 선생의 태도도 그랬고, 마을에 뭔가 있는 것은 분명했다.
‘흐으음…….’
그러나 나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
결국 내 입장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은 달시 세이피어였고, 그녀가 마을을 구경해도 된다고 말했으니까.
“어쨌든, 나는 마을에 내려갈 거야.”
“괜찮아요?”
“괜찮아, 용사니까.”
나는 포비에게 살짝 윙크했다.
“그나저나 마을 시장에서 추천하는 건 뭐 없어? 이곳 특산물이라든가.”
“…염통 꼬치.”
“염통 꼬치? 그런 걸 판단 말이지. 너 염통 꼬치 좋아해?”
“응.”
굉장히 동양풍의 음식이었다.
예전에 길거리에서 몇 번 먹어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마을 들렀다가 올 때 너희들 것도 좀 사 올게.”
“진짜……?”
“응. 원래 용사는 약속을 지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데이몬 세이피어.
나는 녀석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이내 중림사 문밖으로 발걸음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