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 *
마치 민속촌 같은 풍의 세오린 마을.
그 거리에는 순간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고자 하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나를 향해 날을 세우던 농기구와 몽둥이들을 다리 사이로 스르륵 감출 뿐이었다.
나는 그 주눅 든 모습을 감상하다가, 이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도 또한 바깥세상 귀족들의 기득권이 싫어서 이 마을에 도망쳐 온 것인데. 이 마을은 오히려 평민에 대한 혐오가 너무 심한 것 같군요. 이래서야 이곳에 머물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 그렇지만…….”
나를 포위하고 있던 자경단원 중, 제일 앞에 선 늙은 남자가 뭐라 말을 꺼내려다 도로 삼켰다.
아무래도 내 말에 반박할 구색을 찾지 못하는 듯했다.
“그럼 이제 아까 주막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조사를 하러 가면 되는 건가요?”
그러자 자경단원들은 서로 눈치만 봤다.
그러고는 그들 제일 앞에 있는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가라고요?”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는 늙은 남자.
그 모습에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한 가지 여쭙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꿀꺽.
내 앞에 있는 남자는 긴장한 나머지 침을 넘겼다.
또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염통 꼬치는 어디서 파나요?”
휴우우―
내 말에 다행이라는 듯 크게 한숨을 쉰 노인은 이내 마을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런 그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말을 마친 나는, 이내 내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군중 속에서 카론을 찾았다.
그러나 카론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어디 갔지?’
이 마을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알려 주는 큰 도움을 받았으니, 그에 따른 보상을 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내 마을 사람들에게 다시금 인사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
나는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그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왔다.
* * *
그렇게 염통 꼬치를 사 들고 중림사로 올라온 것은 이미 해가 저문 뒤였다.
고산 지대에 마나까지 제한되어 있으니 공기의 상쾌함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별이 훤히 보이는 밤하늘이 예뻐 보였다.
내가 중림사 안으로 들어서자, 또다시 연병장에서 무술 훈련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해가 진 뒤에도 훈련은 계속되는 모양이었다.
‘저 사람들은 전부 세이피어 가문 사람들인가? 아니면 마을 사람?’
저 많은 사람이 전부 세이피어 가문의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아까 전, 마을에서 이곳 사람들의 실태를 알아 버렸기에, 그들에게 조금 반감이 드는 부분은 없지 않아 있었다.
“그나저나 어디로 가야 하나.”
중림사는 연병장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에 한옥들이 빼곡히 나열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무술 훈련을 하는 사람들에게 달시가 있는 곳을 물어보려 하던 참이었다.
“왔어?”
멀리서 나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검은 그림자.
자세히 보니 그 인영의 주인은 달시 세이피어였다.
“뭐야, 기다리고 있었어?”
“응. 같이 저녁 먹어야지.”
“저녁……?”
방금 전까지 염통 꼬치를 먹던 참이었다.
게다가 몇 시간 전에는 마을에서 국밥도 먹었었다.
사실, 그다지 저녁이 당기지는 않았다.
이런 내 표정을 달시가 읽은 모양이었다.
“뭐야, 배 안 고파?”
“으응……. 마을에서 이것저것 먹다 보니 좀 많이 먹게 됐네.”
“그래? 아쉽다. 너 온 김에 오늘 저녁은 특별히 갈비를 요청했었는데.”
“갈비? 내가 아는 그 ‘갈비’? 간장과 마늘로 양념을 만드는 그 갈비를 말하는 거야?”
“어? 알아?”
알다마다, 한국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음식이니까.
나는 그 갈비라는 단어에 살짝 눈물이 맺혔다.
‘갈비라니…….’
매일 칼루스 아카데미에서 서양식만 먹어 왔던 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곳에서 고향의 음식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갈비가 예전에는 궁중 음식이라 했던가.’
나름 나를 대접하기 위해 준비한 음식이리라.
어느새 내 입가에는 잃어버렸던 식욕이 돌아와 군침이 돌고 있었다.
“먹어야겠네.”
“그래, 저녁 먹으러 가자.”
그리하여 나는 달시를 따라 세이피어의 저택으로 갔다.
세이피어의 저택은 가장자리에 있는 한옥 중에서도 가장 으리으리하고 거대한 집이었다.
그 웅장한 건물의 모습을 보니 새삼 달시가 이곳의 당주라는 것을 또 한 번 깨닫게 되었다.
대문을 들어서자 넓은 마당이 보였고, 달시는 이내 나를 안방으로 이끌었다.
그곳에는 이미 다 차려 놓은 밥상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은 아까 오후에 봤던 두 꼬마 녀석이었다.
“어? 용사님!”
나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포비 세이피어.
그러나 데이몬은 뭐가 불만인지 나를 보자마자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응? 용사님? 그게 무슨 소리야?”
달시는 포비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고 나는 그런 달시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몰랐어? 나 용사잖아.”
“으응……?”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는 표정의 달시를 뒤로한 채, 앉아 있는 꼬마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마을에서 사 온 염통 꼬치를 건넸다.
“자, 약속 지켰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무뚝뚝하게 있던 데이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아무래도 염통 꼬치를 좋아하는 쪽은 데이몬인 듯싶었다.
데이몬은 이내 내가 내민 꼬치를 받아들더니 곧바로 입에 넣으려 했다.
나는 그런 데이몬을 저지했다.
“아니, 지금은 저녁 먹어야지, 나중에 먹어.”
“…응.”
뇌물을 바쳐서 그런가, 어쩐지 고분고분해진 데이몬이었다.
“그럼 먹을까?”
말을 하자마자 테이블에 앉고서는 갈비를 뜯기 시작한 달시 세이피어.
순식간에 갈비 여러 개를 해치워 버린다.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 놓은 음식들이 어쩌면 전부 저 달시를 위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도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이내 달시의 맞은편에 앉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역시 갈비는 익히 알던 익숙한 맛이었고, 나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한식의 맛에 감동했다.
‘그나저나 가족은 이게 다인가?’
이렇게 넓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달시와 두 꼬마뿐이었다.
‘부모님은… 안 계시는 건가.’
애초에 달시가 당주라는 사실에서부터 아버지가 안 계신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지만, 어머니 쪽도 안 계실 줄은 몰랐다.
‘그런데 가문에는 방계 사람들도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분명 아까 마을에서 카론에게 듣기로는 세이피어 가문은 직계와 방계로 나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에 있는 달시와 두 꼬마 녀석이 세이피어 가문의 직계인 거겠지.
살짝 그들의 관계가 궁금해진 나는 넌지시 달시에게 화제를 건넸다.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같이 안 먹어?”
“다른 사람들?”
“아까 연병장에서 훈련하는 사람들이라든가, 다른 가문 사람들이라든가.”
“여긴 우리 집이잖아. 그 사람들은 각자 집에서 먹고 있겠지.”
“…맞네.”
착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같은 가문이고 같은 동네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굳이 친척들끼리 모여서 밥을 먹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명절도 아니고서야 말이다.
“그럼 아까 밖에서 훈련하는 사람들은 가문 사람들이야?”
“음……. 가문 사람들도 있고, 마을 사람들 중에서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중림사에 와서 수련할 수 있어.”
대답하면서도 달시는 꾸역꾸역 입에 음식을 넣었다.
아무래도 조금도 먹는 것을 쉬고 싶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역시 이곳에서 수련받는 사람 중에는 마을 사람도 있는 건가.’
생각해 보니 아까 전 마을 사람들 중에서는 딱히 무술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세이피어 가문에게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은 마을의 강경파들과는 또 다른 부류이겠지.
애초에 마을의 분위기 자체가 강경파가 대다수인 것 같으니, 이곳에서 수련하는 사람들은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소수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혹시… 이곳 마을 사람들, 좀 이상하지 않아?”
“왜?”
“분위기라든가, 태도라든가 말이야.”
“마을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달시 세이피어.
그녀의 눈빛에 거짓은 없었다.
애초에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었고.
‘설마 진짜 마을에 관한 일을 모르는 건가?’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그야 알았다면 달시 세이피어의 성격상 그런 식의 행태를 보고만 있진 않았겠지.
다만, 달시가 모른다는 이유 자체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때, 깨작깨작 밥을 먹고 있던 데이몬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달시 누나는… 이곳에서 살지 않았으니까.”
“이곳에서 살지 않았다고……?”
“응? 무슨 소리들 하는 거야? 여기서 살지 않은 건 맞지만.”
대화의 흐름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달시 세이피어.
다만, 먹는 데 집중하느라 그다지 관심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따라서 나는 달시가 이곳에서 살지 않은 이유로 화제를 돌렸다.
“여기서 자란 게 아니라는 거야?”
“응. 나는 버밀리온 가문의 영지에서 자랐어.”
“버밀리온 가문? 그래서 루비 버밀리온이랑 친했던 건가. 근데 왜?”
“아빠가 지병으로 많이 편찮으셨거든. 그래서 나를 버밀리온 가문에 맡기게 된 거야. 본인이 직접 나를 봐주시지 못하니까 협회장님 밑에서 배우라고. 협회장님이랑 아빠는 예전부터 친했으니까.”
“그렇구나…….”
“가끔 이곳에 놀러 오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머물게 된 것은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마저도 칼루스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돼서 오래 머문 것도 아니었지만.”
이런 사정이 있었나.
그렇다면 마을에 대해 전혀 모를 만도 했다.
‘그럼, 마을의 사정에 대해서 말해 주는 건 오지랖이려나……?’
물론 알게 되면 달시는 어떻게든 해결 방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다만, 그것을 외부인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도 오지랖이었다.
어쨌든 이것은 세이피어 가문의 영지에서 벌어지는 일.
결국 당주로서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뭐, 알아서 하겠지.’
나는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애초에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세이피어 가문의 아티팩트를 찾으려는 것이지, 이 마을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어느덧 식사는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상다리가 휘도록 차려 놓은 음식들도 어느새 모습을 감추었다.
‘결국 다 먹은 건가…….’
솔직히 네 명이서 먹기에는 불가능한 양일 줄 알았는데, 달시 세이피어를 너무 과소평가한 모양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포비와 데이몬, 두 꼬마는 먼저 방으로 들어갔고 달시만이 남았다.
“이제 자야지?”
“응? 밥 먹자마자 잔다고?”
“달이 떴잖아? 달이 떴으면 자는 거잖아.”
“…그건 맞지만…….”
먹고, 또 자고.
달시 세이피어는 너무 단순했다.
‘나도 일단 오늘은 잘까.’
사실 좀 피곤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래도 페가수스 때부터 시작해서 조금 바쁜 하루였기도 했고, 이곳의 마나 억제 감각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아서 쉽게 피로감을 느끼는 점도 있었다.
‘뭐, 아티팩트는 내일 천천히 찾아봐야지.’
어차피 칼루스 아카데미의 휴교 기간은 꽤 길었다.
아직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았다.
“그럼 나는 어디서 자면 돼? 내 방은 어디야?”
나는 달시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그러자 달시는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하는 말,
“같이 잘래?”
“…뭐?”
달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