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왜 놀라?”
고개를 갸웃하는 달시 세이피어.
반면 나는 낯이 뜨거워졌다.
“같이 자자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같이 자면 안 돼? 친구잖아.”
“당연히 안 되지.”
“루비랑도 같이 잤는데?”
“그건 루비고!”
달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런 그녀를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나였다.
‘얼마나 순진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아카데미에 입학할 정도면 알 건 다 아는 나이일 텐데, 역시 달시는 근육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아무튼 안 되는 건 안 되니까 빨리 방이나 안내해 줄래?”
“아쉽네. 밤새 베개 싸움 하고 싶었는데.”
“…그걸 하고 싶었던 거였어?”
난 기껏 해 봐야 밤새 수다를 떨자는 취지일 줄 알았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달시는 좀 더 특이했다.
“그럼 정 싫다니 어쩔 수 없네. 여기서 자.”
달시는 이내 나에게 방을 하나 안내해 주고는 사라졌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는 착한데…….”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았다.
지금껏 달시의 저런 천연덕스러운 성격이 어려서부터 세이피어 가문의 무술 교육을 받은 탓이리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달시가 루비 버밀리온과 같은 환경에서 자란 거라면, 역시 그냥 천성인 듯싶었다.
“어쨌든 오늘은 이만 자 볼까.”
이미 밤이 늦었으니, 딱히 이곳에서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덧 세이피어의 모습이 사라지자, 나도 방으로 들어가려 방문을 드르륵 열었다.
그런데,
“응……?”
갑자기 마당 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누군가 한밤중에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게다가 그 마당에 보이는 상대는 어딘가 매우 낯이 익은 인물이었다.
“…카론?”
분명 그는 오후에 마을에서 봤던 회색 머리의 카론이었다.
무슨 일로 그가 이 세이피어 가문의 저택 마당을 거닐고 있는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그가 맞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카론이라는 확신이 들자,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카론!!”
그러자 자리에서 멈춰 서는 카론.
그러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카론에게로 단번에 달려가 말을 걸었다.
“아까 마을에서는 왜 갑자기 사라졌던 거야? 그보다 왜 여깄는 거야?”
아무래도 한차례 마을에서 도움을 받은 사이였다.
나에게는 매우 고마운 은인이 아닐 수 없었다.
카론은 한걸음에 달려온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도 세이피어 가문 사람이니까요.”
“응? 세이피어 가문 사람이라고? 그럼 설마…….”
불현듯 카론이 오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세이피어 가문의 직계와 방계에 관한 이야기.
스스로가 세이피어 가문이라 말하는 카론이 아까의 식사 자리에 없었다는 것은 그가 방계 소속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고 보니 머리 색도…….’
그의 머리 색은 회색.
회색은 그저 짙은 은색일 뿐이니까.
아무래도 카론은 세이피어 가문의 방계가 맞는 모양이었다.
“그쪽이야말로 이곳에 있는 것을 보아하니 당주님의 손님인가 보군요.”
“응, 맞아. 달시의 아카데미 친구야.”
“그래서, 무슨 용건이시죠?”
나는 예상외의 싸늘한 반응에 살짝 당황스러웠다.
지금의 카론은 오후에 봤을 때와는 다르게 무뚝뚝하고 조금 냉랭한 어투였다.
나는 당황스러움에 살짝 헛기침했다.
“그, 그냥 아까 마을에서 도와줘서 고맙다고. 갑자기 사라져서 고맙다는 말도 못 했잖아.”
“그거야 뭐, 그쪽이 알아서 해결한 문제니까요.”
“그래도 마을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혼자서는 영락없이 휘말렸을 거야. 알려 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나는 녀석에게 악수를 내밀었다.
그러나 카론은 내가 내민 손을 바라만 보더니 끝끝내 잡지 않았다.
“용건은 끝나신 건가요.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그 말을 끝으로 카론은 몸을 휙 돌리더니 저택의 정문 쪽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태도에 당황스러운 나머지, 내민 손을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카론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
‘뭐지……?’
오후에 도움을 받았을 때는 굉장히 좋은 사람인 줄 알았었다.
게다가 또래였기에 친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카론의 반응은 냉랭하다.
오히려 나를 싫어하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다.
‘설마… 내가 달시의 친구라서……?’
일리 있는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가 직계의 후계자들을 안 좋게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 실질적으로 이 마을에서 제일 피해자는 방계 사람들일 테니까.
그들은 권리는 누리지 못한 채, 책임만 지고 있는 사람들일 뿐이니까.
“그럴 수도 있지.”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뭐, 방계와 직계 사이의 관계는 나와는 별 상관없는 얘기였다.
어쨌든 내가 카론에게 도움을 받은 거는 사실이니까.
“다음에 만나면 오해를 풀어야겠네.”
나는 이내 방으로 들어가 취침을 준비했다.
* * *
다음 날.
나는 내 얼굴 위로 느껴지는 살짝 불쾌하고 뜨거운 바람에 깊은 잠에서 깨게 되었다.
그리고 살며시 뜬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달시였다.
그녀는 내 얼굴 조금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불쾌한 바람의 정체는 달시의 콧김인 듯했다.
그녀는 내가 일어난 걸 확인하자 살짝 얼굴의 간격을 뗀 뒤 배시시 웃었다.
“일어나는 거 기다렸지. 꽤나 오래 자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식으로 기다리는 게 말이 되냐고…….”
내가 일어날 때까지 내 얼굴 바로 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있었다는 것은 살짝 소름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겠지? 얼굴을 들이댄 건 방금뿐이었겠지……?’
나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왜 기다린 건데?”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서.”
“소개해 줄 사람?”
“응. 세이피어 가문의 무술을 배우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내가?”
‘내가 언제’라고 말하려던 걸 도로 삼켰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내가 이 세이피어 가문에 오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바로 세이피어 가문의 무술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물론 거기에 숨겨진 진짜 이유는 세이피어 가문의 아티팩트를 찾기 위함이었지만.
“그래서 무술 스승님을 소개해 주려고 했지.”
“무술 스승님?”
“응. 세이피어 가문 무술의 대가, 레온 선생.”
자신 있다는 듯 씨익 미소를 보이는 달시 세이피어.
나는 오히려 그러한 달시의 표정에 살짝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무술…이라…….’
사실 이 세계에서의 무술은 한계가 있었다.
애초에 아무리 무술을 단련한다고 하더라도, 마법으로 인간의 신체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강화계나 변신계를 상대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도 언젠간 쓸모가 있으려나.’
사실 아카데미에서의 검술 수업도 실용성을 바라고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검술을 배워 보고 싶었던 것일 뿐.
그러다 마침 언노운의 오러 블레이드가 개방되면서 검술의 사용처가 생긴 것이다.
‘무술도 언젠가는 활용할 방안이 생기겠지.’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쭉 펴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좋아. 가자.”
그리하여 나는 찌뿌둥한 몸을 이끌며 달시와 함께 연병장으로 나갔다.
연병장에는 어제는 보였던 수련생들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마 내가 무술을 배운다고 수련생들을 전부 내보낸 건 아니겠지?’
괜한 생각이겠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그야 달시 세이피어는 그만큼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니까.
“오셨습니까, 당주님.”
연병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백발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응, 왔어. 레온 선생.”
달시는 아무렇지 않게 눈앞의 노인에게 반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역시 당주란 건가.’
모르긴 몰라도 이곳에서 달시의 입지가 꽤나 높은 모양이었다.
“그분이 당주님의 친우분이십니까?”
“응. 세이피어 가문의 무술을 배우고 싶대. 잘 부탁해.”
“제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십니까.”
레온 선생은 나에게도 깍듯한 태도로 대했다.
아무래도 당주의 친구라서 그런지 제대로 대접을 받는 느낌이었다.
“그럼 나는 구경하고 있을 테니 편하게 해.”
“같이 하는 거 아니었어?”
“난 배울 게 없는데?”
“그, 그래?”
순간 달시의 당당한 태도에 할 말을 잃게 되었다.
‘저 녀석, 따지고 보면 그리 강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처음 아카데미에 들어왔을 때야 아무것도 모를 때니 달시 세이피어가 강해 보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과연 저 녀석이 강한 게 맞나 싶은 의문이 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제대로 된 고유 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었지.’
저 천진난만한 녀석의 고유 마법은 과연 뭘까.
문득 궁금해진 나였다.
그런 의문도 잠시, 이내 달시가 먼발치의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자 레온 선생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제로 님은 기존에 배워 왔던 무술이 따로 있습니까?”
“음… 아카데미에서 검술을 조금 배웠었습니다. 혹시 세이피어 가문의 무술 종류에도 검술이 있나요?”
“그럼요. 검술은 무의 기본이죠.”
말을 마친 레온 선생은 어디론가 잠시 갔다 오더니 목검을 두 개 들고 왔다.
“그럼, 조금 보여 주시겠습니까?”
“예.”
그리하여 나는 아텔라 교수님께 배웠던 검술을 레온 선생 앞에서 선보였다.
검을 쥐는 자세.
베는 자세.
찌르는 자세.
받아 내는 자세까지.
지난 몇 달간 아텔라 교수님 밑에서 수없이 배워 왔던 검술이었다.
말없이 그 모습을 감상하던 레온 선생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멈췄다.
“매우 군더더기 없는 자세군요.”
“예. 뭐…….”
나름 뿌듯했다.
그래도 레온 선생은 무술의 가문 세이피어에서도 ‘대가’라고 불리는 무술의 달인.
그런 사람에게 빈말이라도 칭찬을 듣게 되다니.
스스로도 뿌듯하고, 또 이런 검술을 가르쳐 준 아텔라 교수님에게도 고마웠다.
“이름이 있는 초식 같아 보이는데, 혹시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름이요? 딱히 이름은 알려 주지 않았던 거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제 의견으로는 현재 제로 님은 이미 훌륭한 검법을 연마하신 거 같습니다. 따라서 세이피어 가문의 검술을 습득한다면, 오히려 제로 님의 검에 문제가 생길까 우려되는군요.”
그 정도라고?
별생각 없이 배워 왔던 검술이 높게 평가되는 게 기분이 좋으면서도 의아했다.
“물론, 그렇다고 세이피어 가문의 검술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스타일이 다릅니다. 제로 님의 검법은 동일한 상대를 위한 검법이라기보다는, 그보다 강한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검법입니다.”
“강한 상대를 이기기 위한 검법이요?”
“네. 한눈에 봐도 막아 내는 것보다는 흘러내리는 형식의, 마치 음양오행의 물과 같은 초식이더군요. 아무래도 근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 낸 검법 같습니다.”
확실히.
그러고 보니 아텔라 교수님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았다.
애초에 마법사의 세계에서 검을 사용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신체가 강화된 변신계와 강화계 마법사를 상대로도 검을 휘둘러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아텔라 교수님이 습득했고 또 나에게 가르치려는 검술은, 그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효율적으로 검을 사용하는 검술이라고 했었다.
‘뭔가 기분이 묘하네.’
사실 아텔라 교수님은 레온 선생처럼 자세하게 검술의 목적과 효과를 설명하진 않았었다. 그런 만큼 레온 선생의 입에서 내 검술을 평가받았을 때의 느낌은 새로웠다.
“그렇다면 한번 실전에서 보여 주시겠습니까?”
“실전이요?”
“저희 세이피어 가문의 생도와 한번 대련을 보여 주시지요.”
대련이라.
게다가 세이피어 가문의 생도라면 어느 정도 뛰어난 실력자일 게 분명했다.
다만, 나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좋습니다.”
나는 대답과 동시에 목을 까딱까딱하며 대련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