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물을 가득 담은 양동이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카론에게 물을 끼얹었다.
쫄딱 젖은 카론은 아무런 저항 없이 그들의 물세례를 묵묵히 받아 내고 있을 뿐이었다.
‘뭔 일이래.’
나는 일단 상황을 좌시하기로 했다.
그야 전후 사정도 따지지 않고 달려드는 것은 오지랖일 뿐이니까.
게다가 어제 세이피어 가문에서 나를 만났을 때 겪은 카론의 태도도, 내가 멈칫하게 된 이유 중 하나였다.
분명, 카론은 지금의 내 도움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좀 심한 거 아니야?’
물론, 카론에게서 이 마을 사람들이 세이피어 가문의 방계 소속 사람을 심하게 괴롭힌다는 말을 듣긴 했었다.
그런데 그 정도의 수위가 어제 내가 당한 것보다도 높아 보였다.
“빌어먹을 녀석!”
“이 머저리 자식이!”
거세게 윽박지르면서 이내 젖은 카론의 몸 위에 발길질을 해 대는 그들.
가히 광기 어린 모습들이었다.
“그 이방인 자식에게 잘도 우리 얘기를 했겠다?”
“또 너지? 또 너야!”
“넌 뒤질 때까지 처맞아야 해!”
‘응?’
그 이방인이라니.
가만 들어 보니 내 얘기 같았다.
‘설마 어제 나를 도와준 일로 당하고 있는 건가?’
대화의 문맥상 그게 맞아 보였다.
나를 도와준 일로 공격을 받는 거라면, 이젠 더 이상 관계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나는 녀석들에게 소리 지르며 달려갔다.
“멈춰!”
“감히 누가…….”
“너, 너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당황하는 마을 사람들.
어제 자신들이 나에게 했던 짓이 부끄럽긴 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이내 발길질을 멈추고는 카론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나는 카론의 앞에 서며 사람들을 막아섰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세요.”
내 뒤에서 중얼거리는 카론의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역시 카론은 내가 도와주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카론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이 마을에선 평민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며? 알다시피 나도 평민이란 말이지. 네가 말했잖아. ‘약자의 권력’이라고. 난 그저 내 권력을 행할 뿐이야.”
“…….”
딱히 반박하지 않는 카론이었다.
물론 내 말이 조금 억지일 수도 있겠다.
카론이 내 도움을 꺼리는 이유는 다름 아닌 당주인 달시 세이피어와 내가 친구라는 사실 때문일 테니까.
그것은 애초에 내가 평민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나로서도 억울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나도 또한 평민이라는 이유로 적지 않은 멸시를 받아 왔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당주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평민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조금 섭섭한 부분이었다.
“비, 비켜! 이건 우리의 사정이야!”
“그래, 이방인. 아무리 네가 평민일지라도 그 녀석을 감싼 이상 가만두진 않을 거야!”
‘아무리 네가 평민일지라도?’
풉.
실소가 절로 나왔다.
‘무슨 평민 역전 세계도 아니고……. 그저 평민과 귀족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하는 짓은 결국 똑같잖아?’
나는 그런 그들을 한심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다 들었거든요. 지금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든 이유가 어제 저를 도왔기 때문이라면서요?”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사람은 평민을 도왔을 뿐인데, 단지 귀족이라는 이유로 괴롭히시는 건가요? 아니면 설마 평민을 도운 거 자체를 죄라고 여기시는 건 아니겠죠?”
그러자 내 말에 발끈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어제 주막에서 가장 먼저 시비를 건 산적같이 생긴 남자였다.
“거 아무리 같은 평민일지라도 봐주는 데는 한계가 있단다, 꼬마야. 애초에 그 머저리 자식은 평소에도 그런 취급이었으니까, 괜히 오지랖 부리지 말고 가던 길 가는 게 좋을 거다.”
“아하,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취급했다는 건가요?”
어이가 없었다.
그 당당한 태도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상시에도 자신들이 카론을 괴롭혔다는 것을 스스럼없이 말하다니.
정말 이곳 마을 사람들은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나간 듯싶었다.
“당신들, 미쳤어요?”
“뭐라고? 뭐라 했냐, 꼬마야?”
“누군가를 괴롭혔다는 것에 어찌 그리 당당합니까?”
“흥, 그 녀석은 귀족이니까. 어차피 바깥세상에서 잔뜩 왕 노릇을 하던 녀석들이야. 귀족들은 당해도 싸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듯 아예 콧방귀를 껴 대는 남자.
나는 그런 녀석들을 향해 손바닥을 쭉 내밀고는 손가락 세 개를 남겨 두고 접었다.
“당신들의 생각에는 크게 세 가지의 오류가 있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는 거냐.”
“첫째, 여기 있는 세이피어 가문의 사람들은 당신들을 괴롭혔던 그 귀족들이 아니잖아.”
아무리 본인이 세오린 마을에 오기 전, 귀족들에게 수모를 당했다 하더라도 그건 이곳 세이피어 가문의 잘못이 아니었다.
“둘째, 모든 귀족이 왕 노릇을 했던 것도 아니고.”
분명 나조차도 귀족 출신에게 멸시를 받은 적은 있었다.
다만 그들은 겨우 소수였다.
나머지 귀족들, 아텔라 교수님과 루비 버밀리온과 샬롯 아메드 그리고 이곳의 당주 달시 세이피어까지. 하나같이 내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심지어 제페토 골드버그와 캐서린 골드버그는 나를 위해 본인 가문의 신념까지 꺾으며 내 친구가 돼 주었다.
이곳 마을 사람들이 모든 귀족을 증오하는 것은, 그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미련한 사람들의 일반화였다.
“마지막으로 셋째.”
이미 녀석들은 내 말에 반박할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닥치고 있는 녀석들을 보며 까딱까딱 목 근육을 풀었다.
“아무리 귀족들이 나쁘다고는 해도 지금 너희들만큼은 아니야. 쓰레기는 바로 너희들이다.”
“뭐라고?!”
내 말에 흥분해서 달려들 준비를 하는 마을 사람들.
나도 그에 대응해 자세를 취했다.
다만, 나에게는 무기가 없었기에, 급한 대로 허리춤에 있는 언노운을 꺼내 들었다.
중요한 것은 기세였다.
나는 녀석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오히려 큰소리쳤다.
“세이피어 가문 사람들이 너희를 오냐오냐 봐줬나 본데, 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거든. 어제 일을 생각해 봐. 너희들 수백 명이 달려들어도 내 상대가 될 거 같냐고.”
물론 어느 정도는 허세였다.
다만,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일단, 상대방들에게는 어제와 같은 무기들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즉 상대는 맨손.
아무리 무기가 검의 기능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1m 남짓의 뭉뚝한 검날의 언노운이라지만, 맨손의 열댓 명을 상대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아까 세이피어 가문의 문하생을 상대로 대련에 승리하고 나서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붙은 것도 있었다.
이내 내가 언노운을 녀석들에게 겨누자, 녀석들은 서로서로 눈치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저 녀석, 어제 보니 강하던데…….”
“그러게, 괜히 또 어제처럼 되는 거 아니야……?”
웅성웅성하는 사람들.
그러더니 이내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오, 오늘은 이만 물러간다. 다음에도 또 덤벼든다면 그때는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끝까지 자존심을 부리는 산적 같은 외모의 사내.
나는 그런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럼, 어서 도망가시죠. 진짜로 가만두지 않기 전에.”
“흐, 흠…….”
이내 사라지는 사내까지.
결국 카론을 괴롭히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물러났다.
그제야 나는 아직까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카론에게 손을 건넸다.
“자, 일어나.”
카론은 내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조심스레 잡았다.
“감사합니다.”
다만, 아예 마음을 연 것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카론은 여전히 무뚝뚝한 태도였다.
그는 일어나서 고개를 한 번 꾸벅이고는 이내 흠뻑 젖은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러자 옷 아래에 숨겨져 있던 그의 상체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역시 단련을 했던 녀석인가?’
일반인이라기엔 그의 몸은 평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몸으로만 따졌을 때는 아까 나와 대련했었던 그 대머리 녀석보다도 더 탄탄한 몸이었다.
‘그런데 왜 이 몸으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냐는 거야.’
분명 진심을 다해서 맞서 싸우면 마을 사람들쯤이야 몇 명이 달려들든 상대도 되지 않을 테지.
그럼에도 이들 방계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의 폭력을 묵묵히 받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냥 다 힘으로 눌러 버리면 안 되나. 나 같으면 그렇게 할 텐데.’
고작 평민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가만히 인내한다니, 참 이 녀석들도 힘들게 사는 듯싶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런데 왜 세이피어 가문의 직계는 저런 행태를 내버려 두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 세오린 산은 세이피어 가문의 영지잖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거 아니야?”
마을 사람들의 짓거리는 꽤나 오래 지속되어 온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달시 세이피어가 이곳 상황에 대해서 무지하다고는 하지만, 그 전대의 당주, 또 그 이전의 당주는 충분히 이곳의 질서를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런 문화가 자리 잡은 이유가 궁금했다.
그런데 카론의 입에서 나온 설명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애초에 저들의 행태를 허락한 것이 바로 ‘전 당주’거든요.”
“뭐? 그게 말이 돼?”
애초에 이것을 설계한 게 전 당주라니.
그렇다면 방계 사람들이 가만히 참고만 있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전 당주님께서 그러셨거든요. ‘애초에 귀족들이 잘못한 것은 맞지 않느냐.’, ‘그러니 우리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들의 분노를 받아 줘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요.”
“…….”
어이가 없었다.
애초에 마을 사람들의 주 타기팅은 세이피어 가문 방계 소속 사람들.
그들은 그 예전 귀족들이 기득권을 행사하고 평민을 무시하던 시절의 사람들이 아니다.
더더욱 가문의 직계에서조차도 밀린 방계일 뿐이다.
그런데 본인들이 갖지도 않은 기득권과 하지도 않은 업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니.
이래서야 연대 책임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카론이 갑자기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말을 덧붙였다.
“웃긴 건 뭔지 알아요? 그러면서 전 당주님은 마을 사람들에게 그러셨어요. 그래도 직계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고.”
“…그게 사실이야?”
“네.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마을 사람들도 그걸 인지하고 현 당주 앞에서는 눈치 보고 있는 거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인가.
아무리 전 당주가 달시의 아버지라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명백히 지금 세오린 산의 귀족과 평민 간의 기이한 관계를 만든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하여 카론이 나를 꺼리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그의 입장에서는 현 당주와의 친구인 나를 당연히 좋게 볼 수 없겠지.
카론은 침묵하는 나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고는 뒤로 돌아서 물에 젖은 옷을 짜낼 뿐이었다.
그런데,
“응?”
카론의 등 뒤에는 거의 사람 얼굴만 한 검은 원이 있었다.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는 마치 한자 같은 문자들이 새겨 있었다.
“보셨나요?”
뒤를 보며 흘끔 묻는 카론.
“등에 문신……?”
“그건 문신이 아니에요. 저주의 삭월이죠.”
히죽 미소를 짓는 카론.
그러나 그의 표정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다.
“그것은 ‘저주의 삭월’이라 불리는 세이피어 가문의 저주 낙인이에요.”
“…저주의 낙인이라고?”
“예. 이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세오린 산에서 유일하게 발동되는 저주의 낙인이랍니다.”
저주의 낙인.
게다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세오린 산에서 유일하게 발동되는 마법이라니.
나는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조금 혼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