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 *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와 다른 상쾌한 몸으로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어제 수련을 해서 그런 건가?”
확실히 호흡법을 깨친 이후에 뭔가 신체에 변화가 생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단순한 호흡법으로 눈에 띄는 효과를 볼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이전과의 차이가 확연했다.
이윽고 나는 아침을 먹으러 방문을 나섰다.
그런데 마침 대청마루에 나온 달시 세이피어와 마주치게 되었다.
“잘 잤어?”
생긋 미소를 짓는 달시 세이피어.
나는 그녀에게 살며시 손을 흔들었다.
“응. 그러고 보니 어젠 뭐 했어? 안 보이던데.”
어제 아침부터 녀석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식사도 세이피어의 두 꼬맹이와 함께했을 뿐이었다.
“미안. 좀 바빠서.”
“바빠? 무슨 일인데?”
이 마을에서 당주의 역할이 딱히 있을까 싶었다.
게다가 그 당주가 바로 저 달시 세이피어이기에 더더욱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본가 사람들이나 마을 사람들이랑 면담을 좀 하느라고. 아쉽지만 내부 사정이야.”
“…마을 사람들이랑 면담? 설마 방계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의 갈등 말하는 거야?”
“어? 알고 있었어?”
이미 알고 있으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달시 세이피어.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녀석… 제대로 일하고 있었잖아?’
이내 달시가 살짝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난 이 마을에서 자란 게 아니었잖아. 당주가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마을에 좀 사정이 있더라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배시시 미소를 보이는 달시.
나는 뭔가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뭐야……. 괜한 걱정이었네.’
역시 달시는 갈등에 부딪히면 가만히 있을 녀석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알던 평소의 그녀라면 아예 막무가내로 강하게 나섰을 법도 한데, 뒤에서 개별로 면담을 하고 다닌다니.
나름 마을의 문제에 세심하게 접근하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근육 바보는 아니었네.’
달시가 아무 생각 없으리라 판단한 것은 크나큰 오해였다.
저 녀석, 몸집은 작아 보이고 하는 짓도 단순하지만 나름대로 당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엄지를 치켜올렸다.
“응원할게.”
“응. 당분간은 조금 바쁘니까, 없어도 이해해 주라.”
“알았어.”
그러더니 달시는 또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갈등을 하루빨리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느라 많이 바쁜 것으로 보였다.
‘다행이네.’
애초에 이 마을에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만, 한편으로는 켕기는 부분이 남아 있던 나였다.
그런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달시의 모습을 보니 내가 더 뿌듯했다.
“그럼, 힘내 볼까.”
오늘도 레온 선생과의 선약이 있었다.
그리하여 한껏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한걸음에 레온 선생이 기다리고 있을 폭포로 달려 나갔다.
레온 선생은 폭포수 주변에 놓인 커다란 바위 위에서 명상을 취하고 있었다.
“저 왔습니다.”
“오셨습니까.”
서서히 눈을 뜨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레온 선생.
그 모습이 마치 산신령과도 같아 보였다.
“어제 몸은 좀 괜찮으셨습니까?”
“아, 예. 별일은 없었습니다.”
“처음인데도 장시간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면 종종 그런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런데 사실 많이 놀랐습니다. 원래 무아지경의 경지는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하……. 그런가요.”
또다시 시작된 칭찬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다만, 레온 선생의 말은 빈말이 아닌 듯싶었다.
“정말로 뛰어난 재능입니다. 그 정도의 정신력은 수련으로 되는 영역이 아니라 타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타고났다고요?”
그 타고났다는 정신력은 ‘나’의 정신력인 걸까, ‘제로’의 정신력인 걸까.
살짝 헷갈리는 부분이었다.
‘어쨌든 정신력이 좋은 건 마찬가지니까.’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만 해도 스타팅 포인트를 잘못 잡은 줄만 알았다.
검술 훈련 때가 사실 그랬었다.
제로는 애초에 운동 신경이 제로였기에, 검을 다루는 데까지 꽤나 애를 먹었었으니까.
근육을 혹사하고 치유 마법으로 재생하는 고강도의 훈련이 없었더라면 이 정도까지 올 수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제로는 계열 마법과 고유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적성 제로’.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뭐, 어느 정도 시스템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 뿌듯함이 느껴졌다.
“오늘 할 것은 이제 어제의 연장선입니다. 어제는 ‘비움’을 배우지 않았습니까?”
“예, 그렇죠.”
“오늘은 ‘집중’을 배워 볼 것입니다.”
“집중…이라.”
“어제처럼 폭포수 아래에 정좌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의를 탈의하고 폭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레온 선생이 입을 열었다.
“머리를 백지상태로 비운 뒤에, 그 흰 도화지 위에 점을 하나 찍는 겁니다. 다만, 이 과정은 아무리 정신력이 높다 하더라도 다소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머리를 비운다.
그리고 그 위에 점을 찍는다.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애초에 머리를 비우는 순간 의식이 희미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또다시 점을 하나 찍으라니.
모순과도 같은 행동이었다.
다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렵다 뿐이지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그리하여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며 호흡과 정신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 *
일주일 후.
나는 눈앞에 놓인 바위를 향해 목검을 겨눈 뒤 호흡을 내쉬었다.
“휴우우…….”
그리고 이어지는 가벼운 내려찍기.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목검의 무딘 검날이 바위를 내려찍었다.
툭!
이어지는 바위에서 나오는 빈약한 소리.
그리고,
쩌저적!
거의 자동차 바퀴만 한 바위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짝― 짝―
“성공하셨군요, 제로 님.”
레온 선생은 그런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보통의 생도라면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걸리는 일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가요.”
레온 선생의 이어지는 칭찬에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대단하다라…….’
보통의 사람이 한 달 걸릴 일을 일주일 만에 해치웠다.
천재라기엔 살짝 못 미치는, 그러나 평범하다기엔 매우 뛰어난.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그 이상의 재능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이 호흡법이라는 게 대단하네.’
사실 반쯤 의심하고 있었다.
검 끝에 정신을 집중한다고 해서 목검으로 바위를 가를 수 있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물론 이곳 폭포의 바위들은 확실히 밀도가 약해 망치만 있어도 충분히 깰 수 있는 돌들이긴 했다.
다만, 그럼에도 단순히 목검을 내려치는 것만으로 바위를 두 동강 낼 수 있는 것은, 그것에 성공한 스스로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온몸에 느껴지는 감각부터가 달라졌단 말이지.’
불과 일주일 정도 수련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현재의 내 감각. 촉각, 미각, 후각 등 온몸의 신경이 기존보다 예민해져 있었다.
오감의 민감도가 체감될 정도면 정말 눈에 띄는 변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호흡법이라는 게 정말 엄청나네요.”
“다 제로 님의 습득 능력이 탁월한 덕분입니다.”
“아닙니다. 좋은 스승 밑에서 배운 덕분이죠.”
어쩌다 보니 서로 칭찬하는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양측 다 빈말은 아니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사람에게 배웠으면 단기간에 이 정도로 성장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것은 세이피어 가문의 무술의 대가 레온 스승 덕이었다.
“이제 제가 가르칠 것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습니다.”
“예? 벌써요?”
“이미 제로 님은 충분히 훌륭한 스승을 두셨습니다. 저는 무(武)의 기반을 닦는 것을 도왔을 뿐, 무의 길로 가는 나머지 여정은 그 스승님께 맡기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아무튼 덕분에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도 오랜만에 뛰어난 무인을 만나 즐거웠습니다.”
끝까지 예를 표하는 레온 선생.
나는 그에게 정성껏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무인이라…….’
확실히 이번 일주일간 무의 기반은 자리 잡았다.
문제는 그래도 결국 신체적으로는 평범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세이피어 가문의 아티팩트를 얻으면 무술을 활용할 수 있으려나.’
애초에 세이피어 가문은 강화계의 가문.
영웅의 아티팩트도 또한 강화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젠 진짜로 서둘러 아티팩트를 찾아야겠네.’
그동안도 틈틈이 찾고는 있었으나 결국 찾지 못했었다.
다만, 이제는 어디 있는지 대략 짐작이 갔다.
‘세이피어 가문의 영지에서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장소. 아티팩트는 아마도 그곳에 있을지도.’
그곳은 바로 이 세오린 산의 마력을 억제하는 ‘마력 봉인의 동굴’이었다.
* * *
그날 저녁.
달빛이 환히 들어오는 널찍한 창고 안에 사람 열댓 명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눈썹이 찢어진 사내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확실한 거겠지, 꼬맹아.”
“그럼요. 이번이 적기입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힘을 강탈하고 주도권을 잡을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서두르는 것은 좋지 않다.
다만, 우연히 당주가 다니던 아카데미가 휴교했고, 그리하여 그녀가 가문의 영지로 복귀한 지금.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 보름달이 있었고, 마침 ‘블루 문’이기도 했다.
블루 문, 보름달이 두 번 연속 뜨는 날.
3년 만에 돌아오는 이러한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래서 계획을 10년 동안 준비하고 있었다고?”
“예. …선생과 함께 준비했습니다. 저희의 원래 목표는 사실 전 당주였습니다만, 전 당주가 급하게 ‘계승’을 하는 바람에 시기를 놓쳤습니다. 그래도 이번엔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선생도 함께한다라.”
카론의 앞에 있는 사람들, 세이피어 가문 방계 사람들은 그 말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세이피어 가문에서 명성 있는 양반이 가문의 전복을 도모하고, 게다가 10년 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이리라.
카론은 그런 그들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다들 내일의 계획에 동참하시는 겁니다?”
그러자 그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갑자기 분주해진 바깥의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으응……? 뭐 하는 거지?”
이윽고 방문을 열고 보이는 것은 한껏 차려입은 세이피어가의 두 꼬맹이였다.
마치 그들은 한복 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딱 봐도 평상시와는 다른 복장, 게다가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는 다른 가문의 사람들까지.
왠지 모르게 명절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오늘은 3년에 한 번 하는 청월제예요!”
지나가다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포비가 웃으며 대답했다.
“청월제?”
“네! 오늘 블루 문이잖아요.”
“블루 문……?”
내가 되묻자 데이몬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 버릇없이 고개를 저었다.
“푸른 보름달이 이틀 연속으로 뜨는 날이잖아.”
“엥? 푸른 보름달이 뜬다고?”
분명 내가 아는 블루 문은 그저 시기상 한 달에 보름달이 두 번 뜨는 것뿐.
그런데 푸른 보름달이라니.
그것도 이틀 연속이라니.
“역시 판타지 세계인 건가.”
그러한 감상과 함께 세오린 산의 청월제는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