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115화 (115/175)

115화

* * *

청월제는 기본적으로 한국의 명절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분주하게 준비하던 세이피어 가문은 곧 연병장에 제사상 비스름한 걸 차려 놓은 뒤 ‘달맞이’라는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낮에는 달이 오기를 기리는 ‘달맞이’.

그리고 저녁에 블루 문이 뜨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청월제가 시작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연병장에는 한복과도 비슷한 복장을 차려입은 세이피어 가문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식을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곱게 차려입고 단상에 서 있는 달시 세이피어를 힐끔 바라보고는 옆에 앉아 있는 포비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그런데 청월제에 마을 사람들은 참석 안 해?”

“네. 청월제는 세이피어 가문만의 행사니까요.”

“그렇구나.”

곧 시작되는 달시의 연설.

그리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생도들의 무술 시범회.

가문 사람들의 민요 비슷한 노래 합창.

대략 행사는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행사를 구경하고 있던 나는, 문득 앉아 있는 사람들 중에서 회색 머리의 카론을 발견했다.

그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행사를 관람하고 있었다.

‘이곳의 갈등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네.’

지난 일주일간 달시는 여러모로 노력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과 대면하고, 설득하고 또 들어와서는 당주실에 처박혀 고민하고.

당주로서 책임을 지며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던 것이다.

결국 훌륭한 리더십은 모두를 변화시키는 법.

나는 달시의 노력이 언젠가는 이 마을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 굳게 믿었다.

또한 노력하는 달시를 마음속으로 깊이 응원했다.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네.’

카론도 제법 한복이 잘 어울렸다.

역시 직계의 사람이든, 방계의 사람이든, 누구나 같은 옷을 입으면 다 똑같은 법인 듯했다.

이윽고 식이 끝나고 식사 시간이 찾아왔다.

청월제를 맞이하여 차려진 갖가지 명절 음식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단연 ‘송편’이었다.

“송편이 있었네? 그런데…….”

내가 생각했던 송편과는 조금 달랐다.

물론 모양과 맛은 원래 알던 것과 같았지만, 무엇보다 색이 파란색이었다.

“청월제라 그런 건가?”

나는 송편을 하나 입에 넣고는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블루 문이라.”

3년에 한 번 푸른 달이 뜬다는 ‘블루 문’.

나는 그 푸른 달을 영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새로웠다.

* * *

어느덧 해가 질 무렵.

카론은 어딘가로 분주히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은 세오린 마을의 주민들이 모두 모여 있는 마을 회관이었다.

‘블루 문’의 시기에 세이피어 가문들이 모여서 명절 행사를 즐기는 만큼, 세오린 마을 사람들도 으레 이 시기가 되면 모여서 그들 딴에 명절을 보내는 게 관례였다.

이윽고 마을 회관 앞에 도착한 카론.

밖으로는 왁자지껄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풉.”

나름 정겨워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카론은 실소를 내뱉더니, 이내 그곳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갔다.

끼이이이익.

기름칠이 필요한지 비명을 질러 대는 문의 경첩.

그와 함께 카론의 얼굴을 발견한 마을 사람들 사이엔 순간 정적이 흘렀다.

그러더니 그중에서 산적 같은 사내가 이내 호통을 쳤다.

“이 머저리 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온 거냐?”

카론은 그런 사내의 얼굴을 보며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열을 받은 사내는 팔뚝을 걷더니 성큼성큼 달려가 멱살을 부여잡았다.

“너 이 자식, 죽고 싶은 게냐? 귀족 따위가 어딜 감히 기어들어 와?!”

카론은 이윽고 고개를 살며시 돌려 마을 사람들의 얼굴을 훑었다.

비웃는 사람.

경멸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람.

욕지거리를 내뱉는 사람.

하나같이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었다.

다만, 아직은 쓸모가 있었다.

“제안이 있어서 왔습니다.”

“네놈 따위가 감히 무슨 제안을 한다는…….”

“세이피어 가문을 무너뜨린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뭐? 그게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냐!!”

“저는, 아니 저희는, 오늘 세이피어 가문을 무너뜨릴 생각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카론.

그 뚱딴지같은 소리에 사내는 더욱더 거세게 카론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개 같은 소리 집어치워라. 아가리를 놀리면 통할 줄 알았냐? 넌 오늘 뒤졌다.”

그런데 그때.

카론은 갑자기 뒷주머니에 꽂혀 있던 무언가를 스으윽 내밀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것은 마을 주민 중 가장 나이가 있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것은……?”

“예. 맞습니다. ‘전 당주’의 부적입니다.”

그것은 전 당주가 항상 지니고 다니던 부적.

그러나 당주가 죽기 전 분실되었던 유품이었다.

부적의 분실로 인해 몇 달 전 마을에서도 수색이 진행됐었고, 그렇기에 마을 사람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제가 죽였습니다. 전 당주.”

“뭐, 뭐라고?!”

담담하게 내뱉은 카론의 말.

그러나 그 충격은 상당했기에 마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 당주님을 죽였다고? 저 녀석이?!”

“설마. 그냥 저 머저리 자식이 되지도 않는 가짜를 들고 와서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아니, 그런데 부적을 보아하니 진짜인 거 같기도 한데……?”

카론은 마을 사람들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멱살이 잡힌 채로 부적을 높이 들었다.

그러고는 부적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찢어 버렸다.

찌이이익.

힘없이 찢어지는 부적.

그와 함께 세이피어 가문의 상징을 알리는 푸른빛이 잠시 일렁이더니 사라졌다.

“이젠 믿으시겠습니까?”

이내 그것을 확인한 산적은 잡고 있던 멱살을 슬며시 놓았다.

“그,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그걸 우리에게 말하는 이유가 뭐냐! 전 당주를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넌 제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텐데?”

“오늘, 저희 방계 소속의 사람들은 세이피어 가문을 무너뜨릴 예정입니다.”

“세이피어를 무너뜨린다고?!”

또다시 술렁이기 시작한 사람들.

여유를 찾은 카론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미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꽤 많은 수의 방계 사람이 이번 일에 동참했지요. 아마도 모반은 성공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하여 저는 여러분들에게 여쭙고 싶습니다.”

카론은 옷매무새를 한 번 다듬고 이내 마을 사람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귀족들을, 세이피어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동참하시겠습니까?”

일순간 마을 회관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사람들이 서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사실 현재 마을 사람들의 당주에 대한 불만은 극도로 과열된 상태였다.

마침 최근 들어 어린 당주가 마을 사람들 하나하나를 붙잡고 방계 사람들을 건들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하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당주는 마을의 이장과 되지도 않는 약속을 하며 세이피어 가문을 건들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들로서는 어린 당주가 꼴 보기 싫었지만, 그럼에도 이 세오린 산의 주인이었기에 일단은 참고 있던 와중이었다.

그런데 그 ‘세이피어 가문’을 무너뜨리자니.

귀족 중에서도 제일이라 불리는 영웅의 가문 중 하나를 본인들의 손으로 짓밟을 수 있는 기회라니.

슬슬 마을 사람들의 눈이 하나둘씩 돌변하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에 이 산의 귀족 녀석들을 아예 뿌리 뽑자는 거야?”

“그 나대는 어린 당주 계집을 짓밟을 수 있다고?”

“하자! 세이피어 가문을 무너뜨리자!!”

“우리가 이 산의 주인이 되자!!”

뒤에서 숙덕거리는 그들의 반응에 이윽고 산적같이 생긴 사내는 카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놈의 계획에 근거는 있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그 역겨운 세이피어 가문들을 이번 기회에 무너뜨리고 여러분들이 이 세오린 산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카론의 말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세이피어 가문을 무너뜨리자!!”

“귀족 녀석들을 뿌리 뽑아 버리자!!”

사내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네놈의 계획이 어떻게 된다는 거지?”

“여러분들의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없을 겁니다. 단지 중림사 밑에서 농성을 해 주시면 됩니다. 시선만 끌어 달라는 거죠. 그럼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사내와 마을 사람들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카론은 미소를 지었다.

‘멍청한 녀석들.’

이미 마을 사람들은 귀족을 무너뜨리자며 저마다 흥분하고 있었다.

‘벌레 같은 녀석들.’

전부 똑같았다.

귀족이든 평민이든, 혹은 그 어떠한 사람이든.

이 세계는 전부 멸망해야 마땅한 것이다.

* * *

이윽고 밤이 되었고, 하늘에는 푸른 달이 떠 있었다.

그와 함께 세오린 산 깊은 곳에 위치한 달맞이 절벽에는 청월제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당주를 포함한 사람들은 대부분 중림사에서 내려오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그곳에 일찍이 도착해서 술상을 펼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노엘 세이피어와 레온 세이피어 형제였다.

“한잔 받으시죠, 형님.”

“좋다.”

둘은 술잔을 기울이며 본격적인 청월제가 시작되기 전 기분을 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세이피어의 가문 사람 중 하나가 다급히 달맞이 절벽으로 달려왔다.

“큰일입니다!”

“무슨 일이더냐?”

레온 선생이 넌지시 묻자, 곧 남자가 말을 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신속히 그들을 상대할 인원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인원들을 데리고 가도 좋다. 곧 청월제가 시작되니 신속히 처리하거라.”

“예! 알겠습니다!”

노엘의 말에 이윽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청월제를 준비하던 인원들을 끌고 갔다.

조용해진 달맞이 절벽.

그곳에 남은 것은 노엘, 레온 형제뿐이었다.

노엘은 또다시 술잔을 따랐다.

“쯧쯧, 또 무슨 일일는지.”

“괜찮다. 그들의 불만이야 언젠가는 터질 예정이었으니까.”

레온은 술잔을 들고는 지그시 술 내음을 맡았다.

“달이 밝지 않습니까, 형님.”

“그렇구나.”

둘은 또다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 * *

“진짜 푸른 달이잖아?”

하늘에는 보란 듯이 푸른 달이 떠 있었다.

“역시 현실은 아닌가 보네.”

물론 애초에 마법사들과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고작 푸른 달 따위로 신기해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어쨌든 느낌이 신선했다.

마법이야 일상에서는 접할 수 없던 것이지만, 달은 원래 세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아무튼 이제 곧 청월제가 시작하는 건가.”

나는 세이피어의 두 꼬마를 데리고 청월제가 열리는 장소, 달맞이 절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가던 길의 앞쪽에서 대여섯 명의 인원들이 웅성웅성 대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발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섰다.

곧 빠른 속도로 우리를 지나쳐 가는 세이피어 가문의 사람들.

역시 다들 세이피어 가문 출신들이라서 그런지 발이 빨랐다.

“뭐지……?”

나는 그런 그들의 아닌 밤중 뜀박질에 의구심이 들었다.

“이제 곧 청월제가 시작하는데 어딜 가는 걸까요?”

“이상해.”

두 꼬마 녀석도 고개를 갸웃거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때,

크아아아아악!!

달맞이 절벽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

“뭐야?!”

나는 재빨리 꼬마들을 감싸 안고는 절벽 쪽 방향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분명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확실했다. 비명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이 필요했다.

다만, 그곳에 이 꼬마들을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무릎을 꿇고 두 꼬마와 시선을 마주했다.

“너희들. 여기서 꼼짝하지 않고 숨어 있어 줄 수 있을까?”

“왜요?”

“달맞이 절벽 쪽에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난 거 같아서 확인하고 올게. 그동안 여기서 기다려 줄 수 있니?”

“분명, 괴물들이 쳐들어온 걸 거야!”

“뭐? 괴물들이 쳐들어왔다고?! 어떡해요, 용사님!!”

나는 잠시 대답하지 않고 두 꼬마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울먹이는 표정을 하고 있는 꼬마들.

역시 이 녀석들을 위험한 곳에 데려갈 수는 없었다.

“응, 맞아. 아주 아주 나쁜 녀석들이 쳐들어온 거야. 아무래도 내가 가 봐야 할 거 같거든. 그러니까 이곳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 줄 수 있을까. 너희들에게도 임무를 내려 줄게.”

“임무요……?”

“괴물들이 근방을 돌아다닐 수도 있으니까. 너희들의 임무는 내가 올 때까지 괴물들의 눈을 피해 이곳에 숨어 있는 거야. 할 수 있을까?”

나는 적당히 숨을만한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곧장 대답하지 않은 채 눈만 깜빡이는 포비와 데이몬.

이윽고 먼저 입을 연 것은 데이몬이었다.

“…응.”

“그럼, 다녀올게.”

그런데 포비가 내 옷깃을 잡고 당겼다.

“다시 오실 거예요, 용사님……?”

나는 그런 포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말했잖아. 용사는 약속 지킨다고.”

내 말에 이내 나무 뒤로 숨는 꼬마들.

안전한 곳에 숨은 녀석들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달맞이 절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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