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역시 뭔가 있는 건가.”
이곳은 영웅 ‘골드버그’의 저택.
그리고 ‘파르’는 영웅의 아티팩트 ‘골드버그의 회중시계’를 통해 소환할 수 있는 사역마. 둘 사이의 관계가 우연이라기에는 뭔가 절묘했다.
다만, 확신을 가지기에는 근거가 부족했다.
애초에 연관성이라고는 단지 영웅 골드버그 동상에 호박 대가리가 포함되었다는 것뿐. 눈앞의 호박 대가리 동상이 ‘파르’라고 단정 짓기엔 무리가 있었다.
모든 잭 오 랜턴이 호박 대가리처럼 생긴 것은 당연하니까.
“그냥 잭 오 랜턴일 뿐이려나.”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처음 파르를 봤을 때 제페토가 어디선가 본 듯하다는 식의 말을 했던 적이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이 동상을 봤던 거겠지.
“응?”
골드버그 동상의 발밑 부분에는 호박뿐만 아니라 비슷한 크기의 눈사람이 조금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아니, 온전한 눈사람이라기엔 머리뿐이긴 했다.
코 대신 당근이 꽂혀 있고 마치 신사 같은 중절모를 쓰고 있는 그런 눈사람의 머리.
“저건…….”
내가 그 귀엽게 생긴 눈사람을 자세히 보려던 찰나,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목소리의 방향으로 뒤를 돌아보자 캐서린 골드버그가 사뿐사뿐 다가오고 있었다.
“응. 사실 어제 오면서 잠을 좀 많이 자서.”
어제의 검은 잠옷 차림과 다르게 오늘의 캐서린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게다가 귀걸이며 팔찌며 뭔가 세련된 장신구들을 잔뜩 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상당히 꾸몄네.”
“그래 보여요?”
살며시 미소짓는 캐서린.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어울리는데?”
“다행이네요.”
“그러고 보면 마인화 이후에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이곳에 왔던 초반이나 원작 ‘아카마’에서의 캐서린 골드버그는 짜증이 많고 안하무인인 녀석이었다. 그런데 마인화 이후로의 캐서린은 뭔가 성숙해진 느낌이다.
분위기 자체도 단아한 느낌이고, 기품이 느껴졌다.
“그거 칭찬이겠죠.”
“당연히 칭찬이지. 물론 원래 성격 쪽이 워낙 별로였던 것도 있겠지만. 아무튼 확실히 좋아졌어.”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 해 주실래요.”
그런데 대화 주제가 캐서린의 마인화 얘기로 흘러가다 보니, 문득 궁금해진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마인화가 된 거였어?”
그때 당시에야 이유가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애초에 캐서린의 마인화는 원작 ‘아카마’에서도 나오는 이벤트였고 게임에서도 딱히 설명해 주진 않았으니까. 그저 시나리오의 전개를 위한 이벤트쯤으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카론 세이피어는 분명 블랙잭에게서 마기를 받아들였다 했었잖아.’
그렇다면 캐서린의 마인화에도 ‘블랙잭’이 연관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요……. 그때 당시의 기억은 희미하네요.”
“기억한다 하지 않았었나.”
“그건 특정 상황만요.”
“무슨 상황?”
“…당신을 마주했을 때. 그때만 살짝 기억할 뿐이에요. 그 밖에 마인화를 시작한 날부터 이후 일주일 동안은 기억나지 않네요. 사실 안 그래도 랑켄 교수님께서 여러 번 물어보셨는데도 대답하지 못했어요. 아마 그때 당시에는 그저 본능에 의해 움직였던 것 같아요.”
기억이 없다라.
‘결국 알 방법은 없다는 거네. 뭐, 좋은 게 좋은 거려나.’
어쨌든 쓸만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으나, 캐서린의 마인화를 성공적으로 해제시켰었다는 거에 다시금 뿌듯해졌다.
캐서린의 마인화가 정말 블랙잭과 관련돼 있던 거라면 더더욱.
“그런데 아침부터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요?”
“그냥 집 구경. 아, 맞다. 혹시 용암 던전에서 봤던 내 사역마 기억나?”
“네. 그 구름같이 생긴 사역마와 호박처럼 생긴 사역마 말하는 거 맞죠.”
“응. 내 사역마 저거랑 비슷하지 않아?”
나는 손가락으로 골드버그 동상 발밑에 위치한 황금색 호박 대가리를 가리켰다.
캐서린은 그것을 확인한 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닮았네요.”
“저것도 영웅 골드버그 님의 사역마가 맞는 거지?”
“제가 알기론 저기 보이는 거대한 정령왕은 피너클러스 님의 사역마가 확실해요. 그런데 나머지는 잘 모르겠네요. 말했다시피 가문 얘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그러고 보니 캐서린은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았다.
나는 캐서린의 말에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다시 한번 동상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턱을 쓰다듬으며 유심히 동상을 관찰했다.
‘정령왕, 그리고 호박 대가리와 눈사람 대가리라.’
미묘한 조합이지만 어쨌든 파르와 호박 대가리의 외형이 유사한 것은 우연일 수 있었다. ‘골드버그의 회중시계’의 능력과 영웅 골드버그에 연관성이 있다고 단정 짓기에는 다소 근거가 부족한 것이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으려나.’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파르가 나중에 합류한 것처럼, 아직 이 ‘골드버그의 회중시계’는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살짝 기대감이 생겼다.
“무슨 생각을 그리해요?”
“아, 미안.”
다시 캐서린에게로 시선을 돌리자 캐서린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민망해진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 슬슬 아침 먹을 시간인가? 골드버그의 조식이 과연 어느 정도일지 매우 기대되는 부분이네.”
“잠시, 그전에 말씀드릴 게 있어요.”
“응? 뭔데?”
캐서린은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저희 부모님을 뵙기 전에 먼저 주의 드릴 게 있어서요.”
“주의라니?”
“아시다시피 저희 가문은 평민을 배척하는 분위기잖아요. 그래서요.”
“…초대받은 거 아니었나.”
아무리 골드버그 가문의 평민 멸시가 심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캐서린, 제페토 남매와 친분이 있기에 괜찮은 줄 알았다.
“물론 손님의 자격으로 머무는 건 맞아요. 아버지께서도 딱히 시비를 걸어 오거나 하진 않을 거예요. 다만 다소 까칠하게 나올 가능성도 있다는 거죠.”
“그렇게까지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라는 건가. 그런데 애초에 나 골드버그 가문의 은인인 거 아니야?”
“…그건 맞지만, 아무래도 마인화 사건을 가문에 알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알고 있는 건 제페토 오라버니뿐이에요.”
“그래도 부모님께는 말씀드리는 게 좋잖아.”
“오라버니가 결단코 반대했어요.”
그런가.
마인화가 아무리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중죄라고는 하지만 가족에게는 알릴 법도 한데.
그렇다는 얘기는 더더욱 가족과의 관계가 유하지만은 않다는 거겠지.
“그래도 그런 분위기라면 조금 그런데. 어쨌든 초대받은 거잖아.”
“그 부분은 죄송해요. 다만 아버지께 당신을 소개시켜 드리고 싶었어요.”
“소개시켜 드리고 싶었다고?”
“세상에는 훌륭한 평민도 있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렇단 말이지.”
캐서린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나를 좋게 봐준다는 말이니까. 게다가 아직 캐서린의 아버지는 뵙지도 않았다. 아직 뭔가 벌어지지도 않았는데 걱정부터 하는 것은 호들갑이었다.
“그럼, 가요.”
먼저 앞장서서 아침 식사 장소로 안내하는 캐서린.
나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그 뒤를 따라 걸었다.
* * *
“우와아아.”
메인 홀의 휘황찬란한 장식과 조명들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침실의 복도나 정원만 해도 훌륭한 상태였지만, 식사를 마련해 놓은 홀은 더더욱 눈길을 끌었다.
“역시 골드버그 가문인 건가.”
고작 4인 가족이 평상시에 식사를 하는 공간이라기엔 지나치게 화려했다.
게다가 시중을 드는 하인들의 수가 언뜻 보기만 해도 수십 명이 넘는 듯했다.
“앉으세요.”
“으응.”
나는 캐서린의 안내에 따라 홀 중앙의 테이블에 착석했다.
거의 50명은 족히 앉을만한 정도 길이의 테이블.
그 위에는 진수성찬이 펼쳐져 있었다.
내가 테이블 위의 음식에 감탄하고 있는 사이,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아암…….”
슬쩍 확인하니 제페토였다.
“좋은 아침.”
나는 그런 제페토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제페토는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살짝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뭐야 네놈이 왜 여깄는 거지……?”
“잠이 덜 깼어? 어제도 복도에서 봤잖아.”
“그, 그렇지 참. 골드버그의 저택에 네놈이 있는 꼴이 상당히 어색하구나.”
곰돌이 잠옷을 입고 있는 제페토는 얼떨떨해하며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은근슬쩍 캐서린에게 눈짓을 보냈다.
“괜찮은 거겠지. 캐서린……?”
“걱정 마세요.”
둘의 속삭이는 대화 내용, 역시나 그들의 아버지 율리안 골드버그에 대한 걱정인 듯했다.
“그나저나 아버…님은 언제 오셔?”
나는 순간 호칭에 어색함을 느꼈다.
사실 ‘아버님’이란 호칭이 친구의 아버지를 부르기에 적절한 표현임에도, 뭔가 ‘아버님’이란 호칭의 울림이 상견례 자리의 느낌을 주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그다지 의식하지 않던 것이 괜스레 신경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둘은 그것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이제 곧 오실 거예요.”
살짝 긴장한 제페토와는 달리 캐서린은 차분했다.
그리고 캐서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어딘가 무겁고 진중한 느낌의 목소리.
나는 그 소리의 주인이 골드버그가의 가주, 율리안 골드버그임을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의자에서 정중히 일어나서 율리안 골드버그를 마주했다.
율리안의 옆에는 그의 부인, 골드버그 남매의 어머니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캐서린, 제페토의 아카데미 동급생, 제로라고 합니다.”
“자네가 제로인가.”
낮게 깔리는 목소리에선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만큼 내 앞의 사내 율리안 골드버그는 매우 포스 있는 남자였다.
다만 예상했던 거와는 달리 율리안의 반응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앉게나.”
여전히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그 내용에서 적대심은 느껴지지 않았다.
제페토의 호들갑에 살짝 쫄아 있던 나는 그제야 조금 안심하고 자리에 앉았다.
“들지.”
율리안의 말을 신호로 모두는 식사를 시작했다.
우아하고 경건한 골드버그 가의 식사 시간.
홀에는 가끔씩 들려오는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에 부딪히는 짤그락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 조용한 분위기에 나는 눈치껏 눈앞에 펼쳐진 호화로운 진수성찬을 하나씩 맛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침묵을 깬 건 율리안 골드버그였다.
“아카데미의 수석이라 했었지.”
율리안이 말을 걸어 올 거라고 예상 못 한 나는,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반 박자 늦게 대답하게 되었다.
“예.”
“무슨 계열인가?”
갑작스레 물어오는 질문.
조금 당황스러워졌다.
그야 나는 계열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무속성 마법사였으니까.
‘솔직하게 말해야 하나.’
살짝 고민한 나는 이윽고 있는 그대로 대답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어느 정도의 과장은 포함되어 있었다.
“모든 계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계열 마법을 전부 사용할 수 있다고?”
지금껏 무미건조했던 율리안의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갔다.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으로 다른 계열의 마법은 10% 정도밖에 사용 못하는 게 상식이다. 그건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인 불변의 법칙이었다.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니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계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다만, 어차피 영웅의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다른 계열 마법도 사용할 수 있는 건 맞으니까.
“그런가. 과연 캐서린이 괜히 장담했던 게 아니라는 건가.”
율리안은 딱히 내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뭔가를 납득한 눈치였다.
아무래도 칼루스 아카데미의 수석이 계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모든 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천재라는 것이 더 믿기 쉬울 테니까.
율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굳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내 허리 부근에 도착했다.
그런데,
콰아앙!
갑자기 율리안이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더니 테이블을 크게 내리쳤다.
“네 녀석이 왜 그걸 가지고 있는 거지?!”
나는 갑작스레 바뀐 분위기에 어리둥절하다가 내 허리춤에 시선이 갔다.
그리고 율리안이 흥분한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야 내 허리춤에는 골드버그 가문의 가보, ‘골드버그의 회중시계’가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