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격양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는 율리안 골드버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던 찰나 쭈뼛쭈뼛 눈치만 보던 제페토가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제, 제가 줬습니다. 아버지.”
“네가 줬다고? 어째서 가문의 가보를 평민 따위에게 넘긴 것이지?!”
‘평민 따위라니. 듣는 평민 무안한데.’
솔직히 조금 억울했다.
어쨌든 ‘골드버그의 회중시계’는 캐서린을 구하고 난 뒤 제페토에게 보답으로 받은 선물이었다.
이런 취급을 받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다만 제페토와 캐서린의 처지도 있기에 일단은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아버지께서 저 회중시계를 물려주실 때 그러셨잖습니까. 가문이 돈으로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빚을 졌을 때, 그 빚을 이 가보로 대신 갚으라고. 골드버그 가문은 저 녀석에게 큰 빚을 졌고, 그래서 회중시계를 저 녀석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큰 빚을 졌다고? 무슨 연유로?”
“그, 그건…….”
제페토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그야 캐서린이 마기를 흡수하여 마인이 됐었다는 사실은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껏 두 남매가 괜히 숨겨 왔던 게 아니다.
그런데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캐서린이 우물쭈물하는 제페토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제로는 저를 구해 줬습니다.”
“구해 줬다라.”
“예. 죽을뻔한 제 목숨을 구한 은인입니다.”
“마, 맞습니다. 아버지. 그리하여 제가 캐서린의 목숨값을 대신하여 골드버그의 회중시계를 선물한 것입니다. 그 정도면 가문의 빚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두 남매의 말에 율리안은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는 듯 보였다.
조금 진정된 분위기에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설득한 건가.’
어쨌든 나는 초대받은 입장이었고 애초에 캐서린을 구한 골드버그 가문의 은인이었다. 그런데 이런 취급을 받는다니.
조금 불편한 기색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율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었다.
“…목숨을 구걸한 것이더냐. 죽느니만도 못한 짓을 했구나.”
“예?”
제페토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그러나 율리안의 말은 실언이 아닌 모양이었다.
“고작 평민 따위에게 가문의 가보를 넘겨줄 정도의 목숨값이면 죽는 게 낫다. 가문의 긍지를 꺾을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버리는 게 더 명예롭다. 내 교육이 고작 이 정도였던 것이란 말이냐?”
말에 뼈가 있는 율리안의 말에 제페토는 더이상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율리안은 조용히 혀를 찼다.
“평민 따위와 어울리다니. 너희들의 사촌 이자벨처럼은 되지 말라고 내 누누이 말했건만. 쯧쯧…….”
이자벨은 또 누구지.
머릿속에 살짝 의문이 들었지만 그다지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율리안 골드버그의 말이 무례를 넘어서 도를 지나친 수준이라는 것.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계속 듣고 있자니 기분이 좀 묘한데요.”
갑작스레 내가 일어나 입을 열자 홀이 고요해졌다.
나는 그대로 율리안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한 채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본인의 딸에게 ‘죽는 게 낫다’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외부인 주제에 함부로 끼어들지 마라.”
“외부인이라니요.”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제가 왜 외부인입니까? 애초에 저는 당신의 딸을 구한 은인입니다. 그런데 이런 취급이 맞습니까?”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저에 대한 모욕은 그렇다 치죠. 저도 어느 정도 골드버그 가문의 분위기는 감안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자신의 딸에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맞는 겁니까?”
율리안은 한쪽 눈썹을 치켜든 채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말마따나 애초에 당신의 교육이 그 정도였던 겁니다.”
“뭐라고?!”
차분한 분노를 자아내던 율리안이 내 마지막 문단에 터진 모양이었다.
그는 이내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평민 따위가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만 같은 느낌.
괜히 골드버그 가문의 가주가 아닌 듯, 그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는 매우 강렬했다.
제페토는 그 모습에 당황하여 매우 겁먹은 모습이었고, 율리안 골드버그의 부인은 그의 한쪽 팔을 잡고 말리고 있었다.
폭발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
그 분위기를 깨고 캐서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은인에게 가문의 가보로 보답한 것이 그리 못마땅하신가요. 아버지.”
“닥쳐라!”
“그렇다면 이건 어떠신지요. 그가 골드버그 가문의 가보를 소지할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 아버지와의 대련으로 판가름내는 겁니다.”
대련이라고?
나는 뜬금없는 캐서린의 발언에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살며시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걱정 말라는 듯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다.”
한참을 골몰히 생각하던 율리안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단, 절대 봐주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다. 불구가 돼도 설사 죽는다 하더라도, 책임은 지지 않을 것이야. 그래도 괜찮겠지?”
율리안은 감정을 가라앉히고 아까보다 차분해진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겉으로만 차분해졌을 뿐, 눈빛 속에는 아까보다 강렬한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하는 수 없지.’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련으로 증명하도록 하죠.”
“따라오거라.”
이윽고 율리안이 등을 돌리더니 홀 밖의 어딘가로 향했다.
나 또한 그를 따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캐서린이 내 팔목을 살며시 잡았다.
“걱정 마요. 당신이 이길 거예요.”
“설마 여기까지 전부 계획한 건 아니겠지……?”
내 말에 캐서린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웬일로 눈치채셨네요. 그럼, 가서 저 거만한 아버지의 콧대를 꺾어 주세요.”
“…알았어.”
나는 캐서린에게 뭐라 항변하려 했지만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니 따질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그녀의 아버지인 율리안 골드버그를 꺾는 모습을 매우 기대하는 듯했다.
‘그나저나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지만 상대는 골드버그 가문의 가주인데.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모르긴 몰라도 골드버그 가문의 가주라면 현역 마법사들보다도 훨씬 강할 게 분명했다.
그나마 ‘소환계의 권좌’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행이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나는 한숨을 한 번 돌리고는 어느새 멀어진 율리안 골드버그의 뒤를 쫓았다.
* * *
율리안 골드버그가 안내한 곳은 커다란 공터였다.
‘아니 무슨 저택 안에 이 정도의 공간이 있는 거야.’
웬만한 축구 경기장보다도 훨씬 넓어 보이는 끝이 보이지 않는 공간.
다만 그 넓은 공간에 비해 보이는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휑해서 용도를 알 수 없는 장소였다.
“멀리 떨어지거라.”
율리안은 손짓으로 거리를 벌리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하여 나는,
팟―!
점멸을 사용해서 순식간에 100m 이상의 거리를 벌렸다.
“흐음. 꽤나 재미있는 마법을 사용하는군.”
율리안은 여전히 차가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목숨을 걸 각오는 되어 있겠지.”
목숨을 걸 각오라.
솔직히 잘 모르겠다.
초대받아서 이곳에 온 내가 어째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입장이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나는 자신이 없을 뿐이었다.
질 자신이.
“예. 준비됐습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멀리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제페토와 캐서린이 보였다.
캐서린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내가 이길 것을 굳게 믿고 있다는 건가.’
나는 그녀의 여유로운 모습에 씨익 미소를 보여 화답했다.
“그럼, 시작하지.”
율리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기가 달라졌다.
잔뜩 가라앉은 듯한 무거운 분위기.
그리고 율리안 골드버그가 주문을 외웠다.
「프리미티우스 기간테스(primitívus Gigantes)!」
쿠우우웅―!
주문과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 것은 무려 까마득한 크기의 거인이었다.
10m, 아니 20m 그 이상으로 보이는 어마어마한 크기.
“…이래서 저택에 이만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던 건가.”
나는 그 웅장한 모습에 살짝 감탄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러면서 곧바로 주문을 외웠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주문과 동시에 오른손에 응집하는 고출력의 마나.
나는 한껏 여유를 부리면서 가만히 매직 미사일을 충전했다.
그런 내 모습을 상대는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지 않았다.
이윽고 거인의 오른손이 내 머리 위를 덮었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파열음이 공터 가득 울렸다.
그러나 나는 이미 점멸로 회피한 지 오래였다.
“그 정도 속도로는 어림도 없지.”
거인의 움직임도 몸집에 걸맞지 않게 충분히 민첩했으나, 아무리 빨라 봤자 점멸의 속도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나는 살짝 당황한 듯한 율리안의 모습을 힐끔 흘겼다.
‘저거 너무 무방비인 거 아닌가.’
율리안 골드버그는 딱히 몸을 숨기지 않았다.
그저 거인의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전투를 지켜볼 뿐이었다.
사실 지금 당장 점멸로 율리안의 뒤로 이동해서 고출력 매직 미사일을 한 방 먹인다면 상황은 바로 종료였다.
그러나 그런 식의 방법은 딱히 끌리지 않았다.
“그건 너무 쉽잖아.”
나는 콧김을 뿜어 대는 20m의 거인을 올려다봤다.
녀석은 또다시 나를 향해 손바닥을 찍어 눌렀다.
팟―!
나는 점멸을 이용해 가볍게 피해 줬다.
애초에 녀석은 몸집을 뛰어넘는 속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점멸의 속도마저 따라올 수는 없었다.
“이왕 하는 거 저 녀석을 소환 해제시켜 줘야겠지.”
소환계 마법사를 상대할 때의 정공법은 소환사를 노리는 것.
다만 그렇게 한다면 대련은 승리하겠지만 그걸로는 뭔가 부족했다.
소환계 영웅의 가문, 골드버그 가주의 사역마를 압도적인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
그리하여 율리안 골드버그가 패배를 완전히 인정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번 대련에서의 내 목적이었다.
“인정하게 만들겠어.”
어느덧 내 오른손에는 최대 출력의 매직 미사일이 충전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점멸을 사용해 거인의 머리 위에 올라탔다.
“이거나 먹으시지!!”
콰아아아아앙-!
순식간에 거인의 머리통에 꽂힌 최대 출력의 매직 미사일.
엄청난 폭발음이 공터를 울렸다.
나름 피해가 들어갔는지 거인이 비명을 질러댔다.
꿰에에에에엑―!
거인은 비명과 동시에 머리 위에 올라탄 나를 부여잡기 위해 민첩하게 손을 움직였다.
“이크.”
나는 재빨리 점멸을 사용해서 다시 지면 아래로 내려왔다.
“역시 이 정도로는 안 되는 건가.”
신장이 20m인 만큼 방어력도 상당히 높아 보였다.
게다가 저것을 소환한 자는 소환계 영웅의 가문 골드버그의 가주, 율리안 골드버그.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단순히 방어력으로만 비교하자면 웬만한 군주급 마물을 훨씬 뛰어넘는 강력함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노운님?”
나는 살며시 언노운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안 계시나요.”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언노운이 응답하지 않는 듯싶었다.
이전처럼 초콜릿을 언급하더라도 별 반응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다만, 지금은 언노운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럼, 한번 최대치로 가 볼까.”
그동안은 고출력 매직 미사일에 많이 의존했었다.
그야 여러 번 주문을 시전하는 것보다 하나에 응집해 공격하는 것이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렇게 여유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한계가 있는 ‘캐스팅 차지’보다는 수제 매직 미사일이 더 효과적이었다.
나는 곧바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
잠시 후.
내 머리 위에는 하늘을 가려 버릴 정도로 빽빽하게 소환된 수천 개의 매직 미사일이 부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