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게 무슨 소리야……? 소멸한다니.”
“말 그대로예요. 언노운 님은 곧 소멸할 거예요. 아마도 응답이 없는 이유는 소멸 단계에 이르러서일 테고요.”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본인한테 직접 들었거든요.”
본인한테 직접 들었다면… 설마 누블랑 매장에서 들었다는 건가.
애초에 캐서린과 언노운의 접점이라고는 그때밖에 없었으니 확실했다.
나는 멍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살짝 침을 삼킨 뒤 말을 이었다.
“혹시 피닉스 던전 이후에도 언노운을 계속해서 사용하셨나요?”
“피닉스 던전 이후의 사용……?”
나는 곰곰이 생각해 봤다.
피닉스 던전 이후의 언노운을 사용한 경험.
그러고 보니 클로버와 조우했을 때 언노운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언노운 님은 검을 사용할 때마다 인격이 희미해진다고 하셨어요. 다만 소멸 예정 시기가 1년 안이라고 하셨었는데 아무래도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졌나 보네요.”
“그랬던 건가.”
검을 사용할 때마다 인격이 희미해진다라.
원작에선 찾아볼 수 없는 설정이었다.
‘그래서 계약을 회피했던 거였나.’
나와의 계약을 승낙하지 않던 이유.
물론 지금껏 필요할 때마다 힘을 빌려주던 언노운이었지만, 막상 마음 놓고 사용하게끔 허락하지 않던 이유.
이제야 비로소 알 것만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던 거지?
“그런데 왜 나한테는 숨겼을까.”
“언노운 님은 딱히 소멸을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이셨던 것 같아요. 아마도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건 당신을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하긴.
언노운의 소멸을 알았더라면 지금까지처럼 마음 놓고 언노운을 사용하진 못했을 테지.
그녀는 자신이 소멸될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껏 나를 도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얘기 정돈 나누고 싶은데……. 이젠 방법이 없는 걸까.’
사실 지금의 나는 어느 정도 성장했기에 언노운의 도움 없이도 충분히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제는 더 이상 언노운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렇게 언노운과 이별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굉장히 소중하셨나 봐요. 그 에고 소드.”
“응. 그렇지.”
“보통 에고 소드는 반려검이라고도 부르니까요.”
반려검이라.
반려동물의 검 버전인 건가.
사실 내가 언노운과 알고 지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봤자 두 달 정도.
그 짧은 시간마저도 언노운이 대부분 잠들어 있어서 사실상 같이 있던 시간은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살짝 언노운에게 짜증 났던 적도 더러 있었다.
그야 겉으로 보기엔 그저 귀차니즘 가득한 마검일 뿐이었으니까.
‘그런 속사정이 있었다니.’
진실을 알게 된 지금, 나는 그저 고맙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응? 어떻게?”
“에고 소드는 결국 검에 정신이 깃든 검. 그렇다면 정신계 마법사를 통해서 언노운 님의 의식을 깨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방법은 있다는 건가.”
“아시다시피 골드버그 가문의 재력은 상당해요. 잠들어버린 에고 소드의 의식을 깨울 만한 실력자를 알아볼게요.”
“응, 고마워.”
사실 더 이상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의식을 회복할 방안이 있었더라면 언노운이 쉽게 자신을 포기할 리가 없었다.
다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도움을 주겠다는 캐서린의 말에 나는 살짝 마음이 편안해졌다.
게다가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뛰어난 정신계 마법사, 혹여나 정신계의 권좌라면 그녀의 희미해진 의식을 되찾을 방법을 알고 있을 수도 있었다.
“반드시 에고 소드를 다룰 수 있는 정신계 마법사를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고마워. 든든하네.”
“뿐만 아니라 골드버그 가문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은 얼마든지 얘기하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울 테니까.”
“그건 오늘 일에 대한 빚이야?”
“그것도 맞지만 당신에 대한 빚이 어디 한두 개겠어요?”
정원에 드리우는 은은한 달빛이 캐서린의 금발을 비추었다.
그녀는 괜스레 발로 바닥의 흙을 쓸고 있었다.
“저야말로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지금껏 저를 구해 주신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하긴, 사실상 내가 생명의 은인이긴 하지.”
“본인이 인정하시네요?”
“아무리 그래도 생명의 은인은 맞으니까.”
만약 이 세계에 ‘제로’가 없었더라면.
아니, ‘내’가 없었더라면 캐서린은 틀림없이 마인화로 인해 사살됐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처음 겪은 가장 큰 변화였다.
캐서린은 갑자기 바닥을 쓸던 발을 멈추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그녀의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괜스레 얼굴을 돌렸다.
“…좋아해요.”
“응?”
잘못 들었나.
하지만 제대로 들은 게 맞는 모양이었다.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요. 저한테 계속 그러셨는데.”
“…그랬던 건가.”
사실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확신하지는 않았다.
어찌 됐든 나는 원작의 캐서린을 알고 있었고, 원작의 캐서린은 제이드를 좋아했었으니까. 그런 운명이었으니까.
그녀가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까 하는 문제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고 있는 부분이었다.
“고백은 아니에요. 그냥 의사 표현 정도. 그러니 대답하진 마세요.”
“으응.”
생전 처음 들어 보는 고백.
다만 그 시기와 장소가 애매했다.
어쨌든 나는 이곳에 어쩌다 들어오게 된 다른 세계의 사람.
내게는 아카데미의 멸망을 막아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한가하게 이곳에서 연애나 할 때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에 대한 내 마음도 애매했다.
지금껏 딱히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던 터라 조금 당황스러웠던 참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으세요.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으응…….”
조금 어색해진 분위기를 눈치챈 캐서린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 곧 그녀는 정원의 출구로 나갔다.
나는 그녀가 완전히 나가자 벤치에 등을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좋아…한다라.”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난생처음 받아 본 고백은 조금 마음을 설레게 했다.
* * *
컴컴한 칠흑의 공간.
딸깍거리는 소리와 함께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깨진 전구가 희미한 불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중심에는 욕조가 하나 놓여 있었다.
욕조에 찰랑거리는 검은 물.
욕조 안에는 눈을 감고 있는 나체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의 신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호스가 치렁치렁 연결되어 있었다.
이윽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몸은 좀 괜찮아, 닉스?”
그러자 욕조 안의 남자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앞으로 한두 달 정도면 그 더러운 물에서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아마도…….”
닉스는 대답조차 버거운지 가쁘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붉은 머리칼의 남자, 지크 버밀리온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참 고생이 많다. 7년 동안 이러고 있었으니.”
“빌어먹을 히로빈 영감…….”
“그래도 이제 곧이잖아. 조금만 참으면 되겠네.”
“그래…….”
지크 버밀리온은 닉스의 안쓰러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한번 으쓱하더니 등을 휙 돌렸다.
“그럼, 갈게. 푹 쉬어.”
“알겠다…….”
그리고 지크는 그 어두컴컴한 칠흑의 공간의 출구로 나섰다.
곧 문을 열자 환한 복도가 펼쳐졌다.
그런데 때마침 누군가 그에게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단발의 여자였다.
그녀는 지크의 얼굴을 확인하자 쓰고 있는 안경을 한번 치켜올렸다.
“…상태는?”
“많이 양호해졌어.”
“그럼 이제 얼마 남지 않았겠네.”
“응,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다프네.”
지크는 피곤한 듯 기지개를 한 번 키며 하품을 했다.
그 모습에 다프네라 불린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지크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길었지 7년?”
“응. 무척이나.”
“드디어, 마지막 단계인 거야.”
지크 버밀리온의 말에 다프네 브륀힐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마경 본부 차장실.
누군가 실베르 라인하르트 앞에 서 있었다.
“또 나타났다고?”
“예, 차장님.”
부하 직원의 말에 실베르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알겠어. 곧 출동할게.”
“예. 준비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부하 직원은 신속히 차장실 밖을 나갔다.
실베르는 부하 직원이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하자마자 의자에 등을 기대 늘어졌다.
“최근 들어 마인화가 늘었다라.”
마물에 의한 사건은 협회가 담당하고, 안티 매지션이나 마인 등의 인간에 의한 사건은 마경이 담당한다. 그러나 애초에 마인화 사건은 그리 많지 않아서 마경의 대부분 업무는 안티 매지션의 검거에 치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마인화를 하는 녀석들이 눈에 띄게 부쩍 늘어난 것이다.
“역시… 블랙잭과 관계가 있는 건가.”
일전에 세오린 산에서의 마인화 사건.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제로는 카론 세이피어의 마인화가 블랙잭과 연관이 있었다고 했었다.
다만 카론 세이피어는 그 이후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고 있었기에 본인에게 직접 확인받진 못한 정보였다.
그럼에도 갑자기 발생 빈도가 늘어난 마인화 사례는 충분히 블랙잭을 의심해 볼 만했다.
“어떻게 마기를 조종할 수 있는 거지……?”
분명 녀석들은 의도적으로 마기를 이용해 사람들을 마인화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그 방법이 너무 치밀하여 증거를 잡을 수도, 그렇다고 마인화한 녀석을 잡아다가 심문할 수도 없었다.
“젠장…….”
마경에 근무하는 동안 이토록 무기력한 감정은 처음이었다.
실베르는 살짝 열이 받아 주먹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나갈 채비를 했다.
“일단은 급한 건부터 처리하자.”
그리고 차장실 문밖을 여는 순간, 뜻밖의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엇…….”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실베르를 보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다, 실베르.”
실베르 라인하르트는 남자의 말에 대꾸하지 못한 채,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일주일 후.
드디어 휴교가 끝나고 다시 아카데미가 정상 운영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입학식 날 만큼이나 많은 인파가 입구에 바글바글했다.
“다시 시작되는 건가.”
“이번엔 반드시 수석 자리를 되찾아 주마.”
내 옆에는 함께 아카데미에 도착한 제페토와 캐서린이 있었다.
나는 그런 제페토의 각오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을 때다’
이젠 더이상 수석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장 나에게 주어진 ‘아카데미의 멸망’을 막아 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런 나에게 제페토의 수석 타령은 우스울 수밖에.
‘이제부터는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겠네.’
한차례 있었던 블랙잭의 습격은 막아 냈다.
이제부터는 정말 원작의 틀조차 벗어난, 알 수 없는 내용의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다.
‘뭐, 상관없겠지.’
나는 고개를 저으며 이내 잡생각을 떨쳐냈다.
아카데미 내부로 들어선 우리는 곧바로 강당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또 교장의 교육 집합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부로 들어서자 강당의 단상 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인물은 히로빈 교장이 아니었다.
- 잘 지냈냐, 애송이들아.
팔짱을 끼고 모두를 내려다보는 인물.
그는 다름 아닌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케이든 교수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