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하늘에서는 끊임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앞을 봐도, 옆을 봐도, 사방을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소복이 쌓인 흰 눈 뿐이었다.
“이게 윈터 아메드의 던전이라는 건가.”
“안 추우세요?”
그 와중에 나부터 걱정하는 샬롯 아메드.
그러더니 그녀는 곧바로 마법을 시전하여 반딧불이 같은 빛을 하나 생성했다.
이내 빛은 내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그와 동시에 온기가 느껴졌다.
“어때요, 좀 낫죠?”
“으응. 그런데 그것보다 더 효과적인 게 있는데.”
나는 곧바로 골드버그의 회중시계에 마나를 불어 넣었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내는 매기와 파르.
- 끼룩!
- 파르.
매기는 바닥에 깔려 있는 푹신한 눈을 보더니 그곳에 몸을 비벼 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눈에 동질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나는 녀석을 내버려 둔 채 파르에게 명령을 내렸다.
“파르, 우리한테 느껴지는 열기를 증폭해 줄 수 있어?”
- 파르.
파르는 대답과 함께 잠시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원래보다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곧 온몸에 열기가 느껴졌다.
이 정도라면 빙결 던전 바깥보다 더 따뜻할지도 모르겠다.
“우와아. 역시 대단하시네요.”
“이 정도야 뭐. 그것보다 어디로 가야 하려나.”
용암 던전에서는 탑이 우뚝 솟아 있었기에 비교적 쉽게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봐도 봐도 소복이 쌓인 눈뿐이었다.
“아무래도 북쪽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요?”
“북쪽? 이유가 뭔데?”
“그냥 느낌이요. 대개 빙결계 마법사들은 북쪽을 좋아하잖아요.”
“그런 게 있었어?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북쪽 방향이 어딘지 알고 가야 하나.”
“그건 저도 잘…….”
그런데 그때, 한창 눈 바닥을 구르고 있던 매기가 갑자기 끼룩거리는 소리와 함께 우리를 불렀다.
“…뭐야, 따라오라고?”
- 끼룩!
그렇지 참.
매기는 길잡이라고도 불리는 도깨비불, 위습이었다.
따라서 녀석을 믿고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좋아, 그럼 안내해 줘.”
그렇게 나와 샬롯은 매기의 뒤를 따라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걸어도 걸어도 아메드의 가보는커녕, 마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눈보라가 치는 적막한 설원이었다.
다만, 다행인 점은 계속해서 불타오르는 파르 덕분에 적어도 추위로 고생할 일은 없다는 점이었다.
“응? 저게 뭐지?”
한참을 걷던 우리는 수북이 쌓인 눈더미 속에 튀어나온 무언가를 발견했다.
눈밭에 삐죽 솟아 나온 기다란 무언가.
사람 키를 훨씬 뛰어넘는 무언가가 마치 바닥에 수염이라도 난 듯 살랑살랑 움직이고 있었다.
“일단은 마물일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
“네.”
나는 일단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그 살랑살랑 움직이는 무언가를 향해 매직 미사일을 날렸다.
퍼어엉!
유유히 날아가 기다란 무언가를 건드린 매직 미사일.
그러자 그 근방 지면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 아래에서 튀어나온 것들은,
“뭐야… 벌레잖아?”
초대형 바퀴벌레들이었다.
거의 웬만한 대형 버스 크기의 바퀴벌레들.
방금 전 눈 위로 튀어나온 기다란 것의 정체는 바로 저 녀석들의 더듬이였던 것이다.
“꺄아아아! 징그러워요!”
샬롯은 그 거대 바퀴벌레들을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사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바퀴벌레만 해도 징그럽기 마련인데, 초대형 바퀴벌레라니.
녀석들의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더듬이와 굴러가는 눈동자가 적나라하게 보여 더욱 혐오스러웠다.
녀석들은 이내 우리를 발견하더니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징그러워도 어쩔 수 없겠는데. 일단 처리하고 봐야지. 파르! 매기!”
- 끼루욱!
- 파르.
파르와 매기는 곧바로 변신해서 달려드는 바퀴벌레를 막아 세웠다.
그리고 나도 곧 녀석들을 지원하기 위해 매직 미사일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눈을 감고 있던 샬롯도 입술을 질끈 물고는 가세했다.
“빠, 빨리 해치워 버리죠!”
곧바로 주문을 외우는 샬롯.
「루멘 페티티오(lūmen petítĭo)!!」
주문과 동시에 일직선으로 날아간 섬광은 그대로 바퀴벌레를 관통시켰다.
“역시 꽤 하잖아.”
빛의 원소는 원소계 중에서도, 아니 모든 계열 마법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화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원소계 영웅의 가문, 아메드 가문 장녀의 섬광 마법이라니.
저 거대 바퀴벌레 녀석들이 아무리 단단한 내구도를 가지고 있어 봐야 샬롯의 화력에는 버틸 수 없었다.
샬롯의 마법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마치 집안에 튀어나온 바퀴벌레를 잡기 위해 에프킬라를 난사하듯, 샬롯은 무자비하게 섬광을 쏘아 댔다.
그리하여 나는 그 모습을 감탄하며 감상하게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잔인한 거 아닐까.”
“그래 봤자 벌레잖아요!”
“그렇긴 하지.”
어째서 빙결계 던전에 거대 바퀴벌레들이 살고 있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나와 샬롯에게 그다지 어려운 던전은 아닌 듯싶었다.
그렇게 바퀴벌레 무리들을 모조리 정리하는 것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으으, 너무 징그러웠어요.”
“징그러운 거치고는 상당히 잘 싸우던데.”
“당연하잖아요. 최대한 빨리 눈앞에서 없애고 싶었던걸요.”
“그러고 보니 캐서린이 소환하는 쥐도 상당히 싫어했던가.”
“맞아요. 실은 그래서 대인전 수업 때 조금 힘들긴 했어요.”
어쩌면 저런 면 때문에 더더욱 샬롯과 캐서린이 앙숙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부분은 캐서린의 일방적인 감정이겠지만, 어쨌든 잘 안 맞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닌 듯싶었다.
그렇게 거대 바퀴벌레를 처리한 뒤, 우리는 또다시 매기의 안내를 받아 걷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슬슬 불안한데.”
사실 이렇게 북쪽으로 걷기만 했는데 알고 보니 막상 제대로 된 방향이 아니라면 낭패였다.
벌써 몇 시간 째 걷기만 했는데도 여전히 설원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매우 넓은 던전이었기에, 돌아가려면 꽤나 시간이 소모될 게 분명했다.
다만 운이 좋게도 북쪽으로 향한 것은 정답인 듯싶었다.
“저기 봐요.”
“응?”
샬롯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어느덧 설원의 끝부분에 도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설원 다음으로 펼쳐진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빙판이었다.
“제대로 오긴 한 거 같네. 어쨌든 필드가 바뀌었다는 건 긍정적인 의미겠지?”
“그런 거 같아요. 그나저나 빙판이 참 예쁘지 않아요?”
“나만 저 빙판이 불안한 건 아니겠지.”
빙판은 제대로 된 두께를 파악할 수 없었다.
게다가 빙판 아래로는 깊고 어두운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제발 깨지지 않았으면.”
나는 불안감에 살짝 소름이 돋아 몸서리를 친 뒤, 빙판 위에 발을 올렸다.
나름 심해 공포증 비슷한 것이 있는지라, 이 얼음이 깨지고 난 뒤 저 얼어붙은 바닷속으로 빠지는 상상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안 좋은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 법이었다.
빙판 위를 한참 걷던 우리는 곧 발밑에 드리우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얼음의 색이 갑자기 변했네요.”
“설마……. 아니겠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빙판 아래의 거대한 그림자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존재감을 뽐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나는 곧바로 매기를 불러 근두운 모드를 요청했다.
“매기!”
- 끼루욱!
그리고 그 순간,
콰아아아앙!
거대한 범고래가 빙판을 뚫고 나오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나. 쉽게 가는 법은 없네.”
나는 당황하지 않고 근두운으로 변한 매기 위에 탑승했다.
그러고는 제자리에서 얼어붙어 있는 샬롯의 손을 잡고 그대로 하늘로 상승했다.
“아슬아슬했네.”
범고래는 한번 하늘로 솟구치더니 다시금 빙판을 깨고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좀 더 고도를 높여야 할 텐데. 가능하겠어?”
- 끼, 끼룩…….
“안된다는 건가.”
애초에 이 근두운 모드는 한 사람이 적정 인원인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계속해서 눈이 내리니 더더욱 힘을 쓰기 어려운 거겠지.
나는 빙판 아래에서 유유히 움직이며 다시금 공격의 기회를 노리려 하는 범고래를 예의 주시했다.
“그래 봤자 범고래지.”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 대응하기 위해 주문을 시전했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
순식간에 불어나는 매직 미사일들.
그리고 곧 수천 개가 모이자 나는 손을 튕겨 매직 미사일 폭격을 날리려고 했다.
그러나 샬롯이 저지했다.
“잠시만요!”
“응?”
“저 범고래를 공격하실 건가요?”
“당연하지. 저 녀석이 먼저 공격해 왔잖아.”
“그… 한번 봐주시면 안 될까요.”
“왜?”
샬롯은 나를 보며 우물쭈물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귀엽잖아요.”
“…뭐?!”
“어떻게 저 귀여운 범고래를 공격할 수 있어요!”
“…아니 방금 전까지 저 녀석이 우리를 죽이려 했잖아.”
“그래도 인간인 우리가 한번 넘어가 줘요!”
“…….”
나는 샬롯의 주장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범고래의 공격에 깊게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알았다고.”
나는 곧 매직 미사일을 취소한 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고는,
팟―!
‘버밀리온의 로브’를 발동시켜 근두운 채로 순간 이동했다.
도약했던 범고래는 갑자기 우리의 모습이 사라지자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우와아아! 이런 것도 가능했어요?”
“이건 마나 소모가 커서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래도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사실 굳이 이곳의 마물을 잡고 갈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이벤트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마정석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저 빠르게 ‘아메드의 아티팩트’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면 그만이긴 했다.
“그나저나 바퀴벌레는 학살해 놓고 범고래는 또 죽이지 말자니.”
“범고래는 귀엽잖아요.”
“그건 맞긴 한데… 너무한 거 아니야?”
“당연한 거예요. 생각을 해 봐요. 모기가 고양이의 외모를 가지고 있더라면 쉽게 죽일 수 있겠어요? 모기니까 잡을 수 있는 거예요.”
“모기는 사람을 공격하잖아.”
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샬롯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아뇨. 그래도 고양이처럼 생긴 모기라면 죽이기 쉽지 않을걸요?”
“…….”
하긴, 모기보다도 더 위협적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들개는 개라는 이유로 죽이지 못하니까.
결국 사람 외 생물한테도 적용되는 빌어먹을 외모 지상주의라는 거다.
다만, 나는 샬롯의 태도에 살짝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얘가 이런 면이 있었나.’
사람은 좋은데 어딘가 이상한 느낌.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샬롯의 새로운 면이었다.
‘그래도 뭐, 애는 착하니까.’
사실 귀여운 생물을 죽이지 못하는 건 따지고 보면 죄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적인 사고방식일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나타나는 동물형 마물들을 죽이지 않은 채 넘어갔다.
딱히 내가 불살 주의인 것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샬롯에 대한 배려였다.
애초에 이 여정에 동행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입장이었으니까 최대한 비위를 맞춰 주는 게 맞았다.
그리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걸어가던 우리는, 결국 얼음으로 된 궁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딱 봐도 저기에 ‘아메드의 아티팩트’가 있겠네.”
그런데 그 궁전 앞을 지키는 문지기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 않았다.
“저건…….”
다름 아닌 눈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