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우우웅―
일렁이는 검은 소용돌이와 함께 지크 버밀리온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기절한 남자를 어깨에 둘러메고 있었다.
그 모습을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리바이 솔로몬이었다.
“뭐야. 빠르잖아.”
“결계가 이미 파괴되어 있어서 식은 죽 먹기였지.”
“그 남자가 열쇠인 건가?”
“맞아. 이제 열쇠는 구했으니 신속히 본부로 복귀하자.”
“잠시만, 아직 다이애나가 교전 중인데?”
리바이는 아직도 교전 중인 다이애나를 향해 턱짓했다.
아직도 히로빈 교장 무리들과 다이애나, 그리고 아텔라 버밀리온은 전투가 한창이었다.
지크는 잠시 그 싸움을 지켜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남아서 시간을 벌어야겠지.”
“다이애나를 두고 가자는 거야?”
“어차피 너희들 사역마도 있잖아. 별일은 없겠지, 다만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음. 그래.”
이윽고 앉아 있던 리바이와 베르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총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피터도 잠에서 깨어났는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모두 준비된 것을 확인한 지크 버밀리온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우우웅―
그리고 나타난 검은색의 소용돌이.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췄다.
* * *
“둘이서만 보낼 수는 없지.”
나와 캐서린의 얘기를 들었는지, 제페토 골드버그가 끼어들었다.
“나도 가겠다.”
“너도 간다고……?”
“제3의 카페 때의 의리가 있지. 제이드를 구하러 갈 때 내가 빠질 수는 없는 거다.”
제페토는 넌지시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상태로는 혼자 가면 개죽음일 뿐. 같이 가는 게 좋을 거 같은데.”
“…그래 알겠어.”
나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제페토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혼자 적진에 쳐들어가서 제이드를 구해 내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건 맞았다.
‘그나저나 저 녀석, 이제 나를 인정하는 건가.’
지금껏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자의식 과잉이던 제페토 골드버그.
그런 녀석이 끝내는 나를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평민인 제이드를 걱정하다니.
‘저 녀석도 많이 변했네.’
나는 그런 제페토에게 미소를 보였다.
그런데 돕겠다는 사람은 제페토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도 갈게.”
조용히 내 앞으로 다가온 달시 세이피어.
평소의 밝고 명랑했던 녀석이 지금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너라면 매우 큰 전력이 될 테니까.”
달시가 가지고 있는 ‘계승의 힘’을 사용한다면 그녀는 사실상 권좌급 전력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도 될까.”
이어서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루비 버밀리온.
그리고,
“저도 갈게요. 저도 제이드를 구하는 데 동참하고 싶어요.”
샬롯 아메드까지 끼어들었다.
나는 그런 둘의 얼굴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둘은 조금 위험한데.’
마인화 이후에 영체화 사역마를 다루게 된 캐서린 골드버그.
아카데미에서 제이드 다음으로 강한 제페토 골드버그.
그리고 여차하면 ‘계승’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달시 세이피어까지.
이 셋은 함께해도 문제없을 전력이었다.
그러나 루비 버밀리온과 샬롯 아메드는 조금 애매했다.
아무리 둘이 영웅의 가문 출신들이라지만 앞서 말한 셋에 비해 힘이 부족한 감이 있어 불안함은 있었다.
지금부터 갈 곳은 블랙잭의 본거지.
그곳에 간다면 상대해야 하는 것은 블랙잭, ‘저주받은 학생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기를 흡수하여 ‘글리치’ 마법이라는 상상 이상의 마법까지 사용하는 녀석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둘의 합류를 허락했다.
“고마워. 같이 가자.”
어찌 됐든 지금은 조금의 전력이라도 아쉬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제이드까지 납치된 이상, 마계의 부활은 당장 지금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렇게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는 이들의 도움까지도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들은 더 이상 ‘애들’이 아니었다.
적어도 이 전쟁에 목숨을 걸 각오를 한 ‘전사’들이었다.
‘영웅의 가문이잖아. 믿어야겠지.’
둘은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다면 협회나 마경의 최고위 자리까지도 올라갈 재능이 있었다.
나는 녀석들의 그 ‘재능’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 너희들끼리 어떻게 이동할 생각이지? 내 등에 업혀라.
그것은 바로 그린 드래곤으로 변한 에메릴 그린월드였다.
그녀 또한 영웅의 가문이자, 히로빈 교장의 고손녀.
무엇보다도 그녀 자체만으로도 빠르게 이동할 수단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하자.”
- 잠깐.
그런데 그때, 누워 있던 랑켄 슈타이너가 나를 불러 세웠다.
- 가기 전에 가까이 와 봐라.
내가 가까이 다가서자 랑켄 슈타이너는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의 손끝에서 남색의 마나가 방출되어 내 몸을 감쌌다.
- 크으윽.
잔뜩 고통스러워하는 랑켄 슈타이너.
동시에 내 몸에서는 점차 마나가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설마…….”
- 내 생명의 마나를 나눠 주었다. 물론, 네 녀석의 방대한 마나량에는 못 미치겠지만, 아마 이동 중에 어느 정도는 마나가 회복될 거다. 내 마나는 그런 성격의 마나거든.
생명의 마나를 나눠 주다니.
나는 멀뚱히 랑켄 슈타이너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 그래, 부디 친구를 구하길 바란다.
그리고 랑켄 슈타이너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온몸의 마나가 회복을 위해 강제로 수면 상태를 활성화시킨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돌아서서 모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물질계 영웅의 가문 버밀리온의 루비 버밀리온.
소환계 영웅의 가문 골드버그의 제페토, 캐서린 골드버그.
변신계 영웅의 가문 그린월드의 에메릴 그린월드.
강화계 영웅의 가문 세이피어의 달시 세이피어.
원소계 영웅의 가문 아메드의 샬롯 아메드까지.
제이드를 구하기 위한, 나아가 세계를 구하기 위한 최후의 멤버가 모두 준비된 것이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나서는 게 아카데미의 학생들이라니.’
그러나 그만큼 인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협회와 마경은 마법부와의 전쟁이 한창이었고, 아카데미 외부의 히로빈 교장님 쪽도 아까 감지 마법으로 확인했을 때 여전히 교전 중이었다.
결국 이 인원으로 적의 본진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아니지, 이 녀석들은 ‘고작’ 아카데미의 학생들이 아니잖아.’
이들은 하나같이 영웅의 가문 출신들.
따라서 다들 하나같이 실력자들이었다.
애초에 200년 전 마계 대전의 영웅들도 그다지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니었다.
아마도 마계 대전 당시 히로빈 그린월드와 피너클러스 골드버그는 이들과 비슷한 나이대였을 것이다.
“다들, 준비된 거지.”
나는 모두를 한명 한명씩 돌아보았고,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빨리 출발하지.
에메릴 그린월드의 재촉에 우리는 일제히 그린 드래곤의 등 위에 올라탔다.
그린 드래곤의 등 위는 사람 여섯 명이 타도 충분할 정도로 넓었다.
모두가 탑승하자 날개를 펄럭이기 시작한 그린 드래곤.
그리고 순식간에 드래곤이 상공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 좌표는 어디지?
“북서쪽으로 가면 돼.”
- 알겠다. 다들 꽉 잡아라. 전속력으로 간다.
그리고 순식간에 날아가기 시작하는 그린 드래곤.
드래곤의 등 위에는 안장이나 좌석이 없었기에, 모두는 심하게 흔들리는 드래곤의 등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안간힘을 썼다.
“잠시만! 내가 마법을 걸어 줄게.”
주문을 외우는 루비 버밀리온.
동시에 그린 드래곤의 등 위에 작은 인력이 생성되었고, 덕분에 모두는 편안하게 앉아 있을 여유가 생겼다.
안정이 되자, 팔짱을 끼며 폼을 잡고 있던 제페토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제이드를 데려간 녀석의 정체가 뭐지?”
“…그건 우리 오빠야. 지크 버밀리온.”
“아…….”
루비 버밀리온은 조금 침울한 목소리로 얘기했고, 제페토는 매우 당황스러워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너희들, 다들 ‘저주받은 학생’ 얘기는 알고 있지? 제이드를 납치한 루비의 오빠, 지크 버밀리온을 포함한 ‘저주받은 학생’들이 이제부터 우리가 상대할 녀석들이야.”
“저주받은 학생들?”
“방학 전에 아카데미를 습격했던 녀석들 있잖아. 블랙잭. 그 블랙잭이라는 조직을 만든 게 바로 ‘저주받은 학생들’이야.”
루비 버밀리온을 제외한 대부분은 처음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당연히도 이는 관계자가 아니면 모를 내용이었으니까.
“녀석들의 목적은 마계를 부활시키려는 거야. 그래서 제이드를 납치한 거고.”
“마계를 부활시킨다고……?”
“그런데 왜 제이드를 납치해 간 거죠?”
그때, 제이드의 얘기가 나오자 조용히 있던 샬롯 아메드가 질문했다.
나는 얘기가 조금 복잡해질 거 같아서 조금 단순하게 설명하기로 했다.
“제이드가 엘가시아의 가문이거든. 그리고 엘가시아의 가문의 핏줄이 바로 ‘마계를 부활시키는 열쇠’인 거야.”
“제이드가 엘가시아 가문이었다고?! 게다가 마계를 부활시키는 열쇠?”
도통 모르겠다는 듯이 반문하는 제페토.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녀석들의 반응을 보니, 새삼 지금까지 이 일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것은 나뿐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화롭게 아카데미 생활을 하던 이들은 이제서야 진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어찌 됐든 간에 이미 제이드는 블랙잭의 손에 넘어갔잖아요. 그럼 곧 ‘마계의 부활’이라는 게 시작된다는 건가요.”
캐서린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담담히 물었다.
나는 그녀를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모르겠어. 어찌 됐든 ‘열쇠’는 넘어갔지만, ‘문’은 연합이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아직 늦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 그저 지금 당장으로서는 녀석들이 마계를 부활시키기 전에 우리가 도착하길 바라는 수밖에.”
어쩌면 이미 녀석들은 큐브를 손에 얻었을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마계의 부활이 이미 진행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래야지.’
녀석들의 본진으로 습격하여 마계의 부활을 저지시키는 것.
지금 당장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게다가 제이드의 마나도 아직 끊기지 않았고.’
눈을 감으면 제이드의 마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미 감지 마법을 통째로 제이드에게 연결시켜 놨기 때문에 다른 대상에게 감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대신, 제이드 한 명의 마나 정보는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이드의 마나가 보인다는 뜻은, 아직 마계의 부활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저 빛이 꺼지지 않기를 바래야지.’
그것은 마계의 문이 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고, 친구인 제이드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린 드래곤은 매우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애초에 녀석들의 본거지 자체도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곧 녀석들의 본진 근처로 접근할 수 있었다.
“거의 다 도착한 거 같아. 조금만 힘내 줘 에메릴.”
녀석들의 본거지에 가까이 오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마나도 랑켄 슈타이너의 마법으로 어느 정도는 회복되어 있었기에 컨디션도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타아아아앙!
난데없이 울려 퍼지는 총성, 총성이라기엔 마치 대포 소리와도 같은 격발음이 울려 퍼졌고.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린 드래곤이 순식간에 지면으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