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똑.
똑.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물방울은 바닥의 웅덩이에 떨어져 잔잔한 소리를 자아냈다.
그 규칙적인 소음에, 제이드는 살며시 눈을 떴다.
“여기는…….”
제이드는 뒤늦게 의식을 잃기 전 기억을 떠올렸다.
처음 보는 낯선 장소, 자신은 분명 이곳으로 납치된 것이다.
“흡…….”
순간 빠르게 판단을 내린 제이드는 온몸에 마나를 방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발악해도 마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곳에 묶어 둔 뒤 무언가 술수를 부린 게 분명했다.
제이드는 다시금 자신이 묶여 있는 장소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똑― 똑―
떨어지는 물소리만 들릴 뿐, 공간은 고요했고 작은 빛조차 칠흑 같은 어둠에 먹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 고요한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용없어. 이미 네 마나는 생명의 마나 빼곤 전부 흡수당했거든. 현재 네 몸은 이른바 빈껍데기나 다를 바 없다고.”
“당신, 누구야!”
제이드는 텅 빈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상대는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윽고 제이드는 그 상대의 정체를 알 것만 같았다.
“닉스… 당신 닉스 엘가시아지?!”
“호오. 나를 알고 있던 건가.”
남자는 놀랍다는 듯 감탄을 자아냈다.
그러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맞아. 내가 바로 네 형, 닉스 엘가시아야.”
대답과 동시에 컴컴한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무언가가 빛을 발산했다.
하나는 밝은 백색의 빛을, 또 하나는 어두운 빛을.
광원은 마치 네모난 큐브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 강렬한 빛에 제이드는 잠시 눈을 찌푸렸다.
이윽고 빛에 적응되자 보이는 것은 두 개의 큐브를 들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나를 알고 있다는 건, 앞으로 뭘 할지도 알고 있다는 거겠지.”
씨익 미소 짓는 남자, 아니 닉스 엘가시아.
“그럼,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 *
한편 신전의 예배당.
“지크 버밀리온.”
나는 눈앞의 빨간 머리의 사내의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지금껏 스쳐 지나가는 식으로 여러 번 들었던 이름.
그리고 처음 조우했을 때 나에게 커다란 절망을 안겨 줬던 녀석.
그런 지크 버밀리온이 지금 눈앞에 서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어째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어째서 루비 버밀리온과 버밀리온 가문을 저버렸는지.
닉스 엘가시아의 목적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대체 당신네들의 목적은 무엇인지.
그러나 아무리 궁금한 것이 산더미라 하더라도 지금은 시간이 부족했다.
당장 눈앞의 남자를 베어 내지 않는다면, 이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속전속결로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양손으로 쥔 ‘엘가시아의 검’, 아니 언노운의 검신에 이글거리는 검기.
아무리 녀석이 공간 조작을 능숙하게 행하더라도, 결국 언노운에 베이면 큰 대미지를 입을 것이라 생각했다.
팟―
사아아악!
점멸 이후의 깔끔하고 신속한 베기.
그러나 언노운은 이미 지크 버밀리온이 사라지고 난 자리의 잔영을 베어 낼 뿐이었다.
‘역시나 호락호락하진 않네.’
녀석의 고유 마법 내지는 글리치 마법은 ‘공간 조작’.
게다가 나보다도 한 차원 위의 공간 조작인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한 번만 유효타를 먹인다면.’
나는 빈틈을 노리기 위해 잠시 숨을 죽이고 지크 버밀리온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어느새 꽤나 거리를 벌린 지크 버밀리온은 나를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너무 성급한 거 아니야? 이거 이거 선배 대접이 영 아닌데.”
“닥쳐라. 네놈이랑 농담 따 먹기 할 시간은 없으니까.”
“역시나 마계의 부활을 신경 쓰는 건가. 너무 걱정하진 마. 아직 여유는 있어. 마계의 부활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거야. 물론.”
어깨를 으쓱하는 지크 버밀리온.
“그 시간 안에 나를 짓밟고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자신만만이네.”
나는 녀석의 도발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녀석이 얼마나 강하든, 얼마나 공간 조작에 능하든, 애초부터 관계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 세계에 오고 나서, 지금까지의 모든 전투는 상대방의 사정과 능력을 봐 가면서 해 왔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적이 있으니 베어 낼 뿐.
오직 그뿐이었다.
다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조금 큰 벽을 맞닥뜨린 것 같다는 생각도 한편으로 들었다.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잠깐의 틈만 있어도 점멸 이후의 베기로 녀석에게 유효타를 먹일 수 있겠지만, 녀석의 속도는 상상 이상이었다.
‘지구전으로 가야 되는 건가.’
아니, 그러한 방식은 지금으로선 최악이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시간을 질질 끌 수는 없었다.
애초에 녀석의 공간 조작에 한계가 있을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결국 무언가 해야 하는데.’
나는 살며시 왼손 검지에 껴 있는 ‘아메드의 반지’를 매만졌다.
몇 시간 전에 사용한 터라 아직은 쿨타임이지만, 무리를 한다면 한 번은 더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좀 더 확실한 타이밍을 노려야겠지.’
아메드의 반지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나아가 ‘그린월드의 사탕’이나 ‘세이피어의 부적’도 가급적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지크 버밀리온’을 쓰러트린다 하더라도, 앞으로 또 어떤 적이 남아 있을지 몰랐다. 따라서 지금 당장으로서는 리스크를 짊어지는 싸움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공세를 멈추고, 상대방의 움직임을 주시하기로 했다.
그러자 지크 버밀리온 쪽에서 먼저 대화를 걸어왔다.
“나는 너를 꽤나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나를 보고 싶었다고? 왜지?”
내 반문에 지크 버밀리온은 그저 피식 미소 지을 뿐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녀석의 대답을 기다렸다.
“아카데미에 침입했을 때, 막아 낸 게 너지?”
하트, 클로버, 스페이드, 다이아몬드.
그 네 녀석을 말하는 건가.
녀석은 내 침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세오린 산에 숨겨 둔 실험체를 처리한 것도 너고.”
이번에는 카론 세이피어의 얘기.
“아스틴 클라우스를 처리한 것도 너고.”
이번엔 그 도플갱어의 마법을 사용하는 녀석을 말하는 듯했다.
“그런 너를 내가 모를 리 없지.”
“꽤나 나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나 봐.”
“그럼 당연하지. 루비와도 친구 사이였지 아마?”
“네 녀석은 이미 가족을 저버린 지 오래잖아. 이제 와서 오빠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아직 버밀리온이고 앞으로도 버밀리온이야. 그래서, 루비는 지금 뭐 하고 있어?”
“네 녀석의 동료랑 한바탕하고 있다.”
내 대답에 지크 버밀리온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내 히죽 웃는 걸 보니 기분 탓일 수도 있을 것이다.
“피터랑 교전 중인 건가. 뭐, 루비야 워낙 똑 부러진 아이니까. 쉽게 당하진 않겠지.”
“동생을 걱정하기라도 하는 건가?”
지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그의 주변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촤아악!
지크는 눈앞의 허공에 손을 뻗었고, 검붉은 안개에서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검이었다. 그리고 지크는 그 장검을 두 손으로 쥐었다.
“슬슬 시간이 촉박할 거 같으니 승부를 내자고.”
지크 버밀리온의 무기는 검인 듯했다.
어찌 보면 공간 조작 계열 마법사들은 대부분 검을 사용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애초에 저 녀석은 아텔라 버밀리온의 후손이었지.’
그렇다면 마법사가 검을 쓴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경계해야 했다.
팟―
녀석이 움직이기 전에 나는 먼저 점멸을 사용해 거리를 좁혔다.니
그리고 녀석을 향해 언노운을 크게 휘둘렀다.
채애앵!
지크 버밀리온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들고 있는 검붉은 검으로 언노운의 검날을 여유롭게 막아 냈다.
“차원류 검술이라고 들어는 봤나?”
“차원류 검술이라고?”
물론 알고 있었다.
이미 아텔라 교수님이 사용한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공간 자체를 베어 내는 검술.
그 어떤 방패로도 막을 수 없는 필살의 검술.
지크 버밀리온은 맞댄 검을 밀치고 크게 거리를 벌렸다.
그러고는,
촤아아아아악!
내가 있던 자리를 향해 허공을 베었다.
팟―
나는 점멸을 사용해서 회피를 시도했다.
그리고 곧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에 블랙홀이 생성된 것이다.
그 블랙홀은 말 그대로 공간을 베어 낸 뒤 남은 상처 같아 보였다.
“휴우. 그걸 피하네. 단 1mm라도 베인다면 그대로 공간 채로 삭제되는 건데 말이야.”
역시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쩌면 방금의 일격은 아텔라 교수님이 보여 줬던 것보다도 더욱 강한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역시 방법은 한 방을 노리는 수밖에.’
스치면 치명타였다.
결국 믿을 건 ‘아메드의 반지’가 시간을 정지시키는 그 찰나의 순간뿐이었다.
“이래서야 승부가 나지 않잖아.”
이죽대며 도발하는 지크 버밀리온.
나는 그에 화답했다.
“아니.”
그리고 서서히 언노운을 든 뒤, 녀석에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번 한 번에 끝낸다.”
지크 버밀리온은 다시금 공간을 벨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나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점멸을 사용하지 않고 녀석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어이 너, 너무 무리하는데.”
지크 버밀리온은 아까와는 다른 자세를 취했다.
분명, 전방위를 베려는 움직임.
혹시라도 내가 뒤쪽으로 점멸을 사용할까 봐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올곧이 앞을 향해 달렸다.
“뭐야, 피할 생각이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녀석은 그대로 나를 향해 검을 베어 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점멸을 아꼈다.
그리고, 내 눈앞으로 블랙홀이 번지기 시작한 찰나.
탁―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순간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코앞에 보이는 생성되다 만 블랙홀.
아마, ‘아메드의 반지’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저 블랙홀에 잡아먹혔을 것이다.
나는 빠르게 녀석의 머리로 점멸을 사용한 뒤,
“하아아아압!”
그대로 언노운을 녀석의 머리 위부터 쑤셔 박았다.
다만 블랙홀을 피해 움직이느라 살짝 빗나가서 그런지, 검날은 녀석의 오른 어깨를 베어 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충분했다.
오른팔을 잃은 그는 더 이상 검을 들지 못했다.
“아아아아악!”
곧 얼어붙은 시간이 다시금 흐르고, 녀석은 비명을 질러 대며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나는 녀석의 등을 밟아 눕혔다.
“공간 조작 마법의 약점.”
그것은 바로,
“상대방과 접촉 시 사용할 수 없다는 것.”
이미 눈치껏 파악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내 발이 지크 버밀리온의 등을 밟고 있으니 녀석은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언노운을 빼어 들어 녀석의 등을 찔렀다.
“크아아아아악!”
지크 버밀리온은 또다시 비명을 질러 댔다.
그를 감싸던 검붉은 마나도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미 상당한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때,
“잠깐! 멈춰!”
누군가가 다급한 목소리로 달려왔다.
“이제 그만하면 됐잖아!”
하얀 가운을 입은 안경 쓴 여자였다.
나는 여전히 지크 버밀리온을 밟은 채로 여자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달려오던 여자의 몸에서 검은 마나가 뭉게뭉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띠링―
[!경고!]
[&%$#^]
[오류#$%^^&]
[#$%정지#@^&$]
[#$%@#%%불가능#[email protected]$]
눈앞에 알 수 없는 의미의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