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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171화 (171/175)

171화

“그나마 친척이 살아 있어서 다행인 건가.”

가족은 이미 전부 죽은 지 오래였다.

친척이 없었더라면, ‘피’를 매개로 하는 차원 이동은 꿈도 꾸지 못했을 테지.

‘아니, 지금은 돌아갈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마계의 부활이 코앞으로 다가온 이 시점에서, 벌써부터 원래의 세계로 귀환할 생각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이곳에서 닉스 엘가시아를 막기 전까지는 돌아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나저나 놀라울 따름이다.

다프네 브륀힐드가 나에게 해 준 얘기는 전혀 상상도 못 한 내용들이었다.

어쩌면 다프네는 내가 이곳에 와서 그녀와 대화하는 것까지도 전부 계획에 포함시켰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까지 나를 감시하고 있었던 건가?”

“그건 아니야. 단지, 시스템을 통해 간간이 연락했을 뿐. 우리도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진 못했어. 만약 그런 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닉스가 나를 이용해서 제이드를 감시했겠지.”

“그렇군.”

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녀와 지크 버밀리온 입장도 곤란했을 것이다.

닉스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는 몸이 됐지만 그에 맞서야 하는 입장.

심지어 지크 버밀리온은 자신의 힘을 이용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내 검에 베이는 선택을 내렸다.

나는 어느덧 안정을 찾아 고르게 호흡하고 있는 지크 버밀리온을 내려다봤다.

물론 그들의 심정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그런데 당신들은 그렇다 쳐. 그럼 나머지 블랙잭들은 도대체 무슨 의도인 거야?”

“그 녀석들은 닉스와 마찬가지로 마계의 부활을 원하는 녀석들이야. 스스로 닉스를 따르는 거지.”

“어째서?”

“제정신들이 아니니까. 세상이 멸망하길 바라는, 마족들에게 지배되길 바라는 미친놈들인 거야.”

다프네는 녀석들이 마계의 부활을 원하는 이유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었다.

누군가는 철인의 사회를 꿈꾼다고 했다. 마족에게 이 세계의 질서를 맡기고자 하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그저 멸망 그 자체를 바랄 뿐이고, 또 누군가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도 있었다.

개중에는 예전부터 마족 자체를 숭배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이제 궁금증이 해결됐니?”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다프네.

나는 그녀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사실 아직도 헷갈리는 부분은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다프네의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내가 해야 할 일만큼은 더 명백해졌다.

“그럼, 내가 들을 얘기는 끝인 거지.”

“그래. 이제 가 봐, 마계의 부활을 막으러 가야지 ‘이도형’.”

“그 이름으로 부르는 건 아직 일러.”

그야,

“나는 아직 ‘제로’니까.”

모든 것이 끝나면, 어쩌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고 ‘이도형’으로서 살아갈 수도 있었다.

다만, 아직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는 ‘제로’였다.

“좋은 각오네. 그래도 조심해. 괜히 우리가 너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게 아니었으니까. 닉스 녀석은 강해.”

“상관없어.”

지금까지는 이 세계의 흐름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생각했었다.

눈앞에 나타난 시스템 창, 주어지는 보상들.

게다가 편의적으로 움직이는 상황들까지.

그렇게 착각할만한 근거는 충분했다.

다만, 이제는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를 돕던 것은 ‘신’과 같은 거창한 존재가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발악했던 이 세계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자신이 있었다.

“안 질 거거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제이드의 마나가 감지되는 곳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다프네의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이드의 위치는 건물의 지하였다.

시야에 들어오지 않으면 점멸을 사용할 수도 없기에, 나는 건물의 계단을 따라 달려 내려갈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지하의 마지막 층.

“뭐야, 이건.”

처음 그 공간을 확인했을 때의 느낌은 마치 ‘지옥’ 같다는 것이었다.

벽에는 피로 보이는 무언가를 칠해 놓았고, 공간 안을 붉은색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그야말로 새빨간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검은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는 남자와, 그 옆에 묶여 있는 제이드가 보였다.

“뭐지, 네 녀석은.”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에게서는 알 수 없는 꺼림칙함이 느껴졌고, 그의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음산했다.

나는 녀석을 보자마자 녀석이 ‘닉스 엘가시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 도달한 걸 보니 지크 버밀리온은 당한 건가.”

“멋대로 생각하시지.”

녀석과 대화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곧바로 기절해 있는 제이드를 향해 점멸을 사용했다.

팟―

그리고 제이드를 낚아채려 했다.

그런데,

사아아아아아―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검은 기운.

순간 그것을 감지해 내자마자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죽는다’였다.

나는 그 엄청난 살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뺄 수밖에 없었다.

“뭐지……?”

인간이기에 지극히 당연하게 느끼는 공포, 죽음.

녀석은 그저 살기만으로도 상대방에게 죽음에 가까운 공포를 심고 있었다.

아니, 실제로도 몸을 빼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게 분명했다.

“제법 실력 있는 녀석이로군. 그래서 지크 버밀리온이 당한 거려나.”

남자는 히죽 웃었다.

녀석의 얼굴은 검은 로브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섣불리 접근은 위험해.’

본능이 경고했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는 게 맞았다.

그리하여 나는 녀석의 움직임을 살피며 빈틈을 노리기로 했다.

“네 녀석은 누구지? 마경? 협회?”

“아니, 그저 아카데미의 학생일 뿐이다.”

“허… 이곳까지 도달한 게 고작 아카데미의 학생일 뿐이라고?”

나는 녀석의 말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오로지 빈틈을 노리려고 탐색하던 중 녀석의 앞에 있는 커다란 단상을 발견했다.

그 위에는 각각 검은색과 흰색의 빛을 뿜어내는 네모난 무언가가 나란히 얹어져 있었다.

‘저게 ‘큐브’라는 건가.’

역시 녀석들은 모든 큐브를 모은 게 맞았다.

나는 순간 연합 측 사람들이 걱정되었다.

‘설마 전부 당한 건 아니겠지.’

연합 측이 가지고 있어야 할 백의 큐브가 이곳에 있는 것의 의미는 그것뿐이었다.

‘아니, 지금은 여기에 집중할 때야.’

실베르 라인하르트, 노아, 히터 데이즈나, 이자벨 골드버그까지.

모두들 쉽게 당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분명 그들 몰래 빼내어 온 거겠지.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닉스 엘가시아는 또다시 대화를 걸어왔다.

녀석의 태도로 보건대, 아직 마계의 문을 열 준비는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애송이로 보일 뿐인데.”

“시간을 끌겠다는 건가.”

“시간을 끌겠다고? 푸하하핫!”

닉스는 고개를 젖히고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의 시간을 끌어? 여기까지 왔다고 너무 자신만만해하는 거 아니냐.”

“글쎄, 그건 대봐야 알겠지. 닉스 엘가시아.”

“너도 내 이름을 아는 건가. 아니, 애초에 알고 있으니 여기까지 찾아온 건가.”

“그럼, 당연하지. 그 밖에도 너에 대한 많은 걸 알고 있다고.”

나는 말하면서 언노운의 손잡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언노운의 검신에 마나가 충전되기 시작됐다.

이른바 충전형 매직 미사일을 언노운에 결합한 방식이었다.

“네가 7년 전 ‘저주받은 학생들’에게 저주의 마법을 낙인시킨 것, 그리고 네가 엘가시아의 가문이라는 것, 네 목적과 지금 하고 있는 이 행동이 마계의 문을 부활시킨다는 것 전부 다 알고 있지.”

“호오. 꽤나 많은 걸 아는구나.”

좀 더 확실해지려면 최대한 오래 충전하는 게 맞았다.

그리하여 나는 한계까지 언노운에 마나를 주입함과 동시에 녀석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네 녀석의 목적은 역시 ‘마족이 그립다’인 건가?”

“마족이 그립다라.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군.”

“한 번도 본 적 없는 마족에게 그리움을 느끼는 것인가? 애초에 네 녀석은 인간이잖아. 인간 사이에서 자란 거잖아. 어째서 인간을 저버리고 마족에게 가려는 것이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다만, 내 몸에는 마족의 피가 흐른다. 고향에 가고 싶고 동족을 보고 싶은 것은 사람, 나아가 동물의 본능일 뿐이야.”

“그럼 인간은? 네 녀석의 반쪽은 인간이잖아. 게다가 마계를 부활시키면 그 인간들이 어떻게 될지의 결과는 뻔한 거 아니야?”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히죽 미소짓는 닉스 엘가시아.

“마계가 부활한다 해서 인간이 멸망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더 상위 존재에게 지배받을 뿐이야. 체제가 달라지고, 섬기는 이가 달라질 뿐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마족의 가축이 되는 거잖아. 그게 멸망이 아니라고?”

“그럼, 당연하지. 너희들 인간도 소와 돼지와 닭을 비좁은 우리에서 기른다. 그리고 그들을 기계적으로 번식시키고 고기와 각종 부산물들을 탐할 뿐이지. 그렇다고 가축이 멸망하는가? 아니야. 결과적으로 상위 존재에 의해 체계적으로 지배받음으로써 더욱 번영할 뿐이다.”

“번영이라는 말의 의미를 착각하나 본데, 그건 번영이 아니다. 인격의 말살일 뿐이야.”

녀석은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도 이미 자신의 신념과 정의를 굳게 믿고 있었다.

도저히 말로는 설득할 수 없는 상대인 것이다.

물론 애초에 말로 설득할 생각도 없었다.

나는 슬쩍 언노운을 확인했다.

검신에는 고도의 마나가 밀집되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다만, 나는 확실한 한 수를 위해 공격을 잠시 미뤘다.

“인격의 말살이라. 애초에 인격이란 무엇이지? 너희들 인간 스스로가 부여한 자격일 뿐이다. 이 세계에서, 이 우주에서 너희들 인간이란 한 줌의 먼지에 불과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스스로 ‘인격’이라는 지위를 내세우는 거야.”

“그럼 네 녀석의 동료들은? 친구들은, 가족들은? 마족에 의해 가축 취급받아도 상관없다는 거냐?”

“나는 가족이 없다. 친구도 없다. 오로지 내가 ‘동료’라고 부를만한 건 나와 같은 피가 흐르는 자일 뿐이야.”

“제이드는 명백히 네 가족이잖아.”

녀석은 의식을 잃은 제이드의 목덜미를 잡고 흔들어 보였다.

“이 녀석? 뭐 가족이라면 가족이라 볼 수도 있겠네. 그래도 대의를 위하면 어쩔 수 없는 희생일 뿐이야. ‘블랙잭’도 마찬가지. 애초부터 그들은 대의를 위한 장기 말이었을 뿐이다.”

“그런 건가.”

이 녀석은 애초에 더 이상 이 세계에 미련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계를 저버리고, 마계의 부활을 택하려는 것이겠지.

“그런데 너, 확실한 거냐?”

“무슨 말이지?”

“마족들이 너를 인정해 줄 거라 생각해?”

“…뭐?”

“과연 마계의 문이 열린다고 해서 그곳에 네 자리가 있을까. 마족이 봤을 때는 너도 똑같이 우리에서 자란 ‘가축 따위’일 텐데.”

“뭐라는 거냐!”

녀석은 흥분해서 제이드를 놓고는 발로 땅을 쿵쿵 밟았다.

나는 녀석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콰과과과과과앙!

녀석을 향해 검기가 완충된 언노운을 그대로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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