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초인종이 울렸다. 에스티아는 눈을 감고 차를 마시다 수행원 웬트워스의 노크에 눈을 떴다.
에스티아는 2주 동안 소설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해 보았다. 그래서 지금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원작대로라면 에스티아는 그녀의 사과를 받으러 온 바일 가문의 기사에게 무릎을 꿇는다. 에버하르트를 만나게 해 달라고.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직접 하겠다고.
“아가씨…….”
메리는 두 손을 떨었다. 눈앞에 닥친 일이 공포스러운 듯한 표정이었다. 그 옆에는 수행원 웬트워스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가씨의 사과를 받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합니다.”
에스티아는 손에 묻은 빵가루를 탁탁 털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탁 들었다.
자존감이 무너지는 게 무서운 일이지, 잘못한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게 뭐 그리 별일이라고.
에스티아는 메리가 문을 열기도 전에 직접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공작 사용인들이 우왕좌왕하는 게 느껴졌다. 웬트워스와 메리는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날씨가 무척 좋은 하루였다. 긴 우기가 오기 전의 마지막 선물이라는 듯이, 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와 복도 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웬트워스가 에스티아의 눈치를 보며 문을 열었다. 육중한 문이 열리면서 제복을 멋지게 갖춰 입은 기사가 나타났다.
그는 거만한 표정을 지은 채로 글레멘드 저택에 들어섰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에스티아에게 인사했다. 손등에 입을 맞추는 예 따위는 갖추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바일 가문의 기사 에이커라고 합니다.”
에스티아는 그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자부심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저런 사람에게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었으니 당연히 먹혔을 리가 없다.
“전하께서 아가씨에게 서신을 전하셨습니다. 아가씨의 사과를 요구하는 서신입니다.”
에이커가 비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두 손으로 에스티아에게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그걸 수행원인 웬트워스가 받아 에스티아에게 건넸다. 에스티아는 두루마리를 받아 조심스레 펼쳤다.
두루마리에는 수려한 필체로 그의 말이 적혀 있었다. 어쩜 필체도 이럴까. 에스티아는 숨을 내뱉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글레멘드 영애에게.
서신을 보내는 목적은 이미 기사에게 전해 들었을 테니 인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이틀 전, 저와 셰린포드 영애에게 큰 결례를 범하신 걸 기억하실 겁니다.
셰린포드 영애에게는 폭언을 퍼붓고 저한테는 폭력을 행사하셨죠.’
인사는 생략해? 폭언과 폭력? 지는!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서신을 계속 읽어 갔다.
‘셰린포드 영애는 추후에 제 약혼녀가 될 사람입니다. 그런 분한테 영애께서 감히 함부로 말을 내뱉으시다니요. 셰린포드 영애가 충격으로 쓰러지신 건 아십니까?
저와 제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셨으니, 저는 영애께 공식적인 사과를 요청합니다.
제가 원하는 사과의 절차를 말씀드립니다. 먼저 글레멘드 저택을 방문한 기사 에이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하십시오. 저한테 한다고 생각하시면서요. 둘째…….’
에스티아는 서신을 탁 덮었다. 그 소리에 하녀 메리와 수행원 웬트워스는 물론이고 에이커가 놀란 표정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다 읽었습니다.”
에스티아는 서신을 메리에게 건넸다. 에이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분명 밑에 내용이 더 있을 텐데요, 아가씨? 정말 다 읽으신 겁니까?”
“다는 안 읽었고, 사과 절차 첫 번째 부분까지 읽었습니다.”
에스티아의 얼굴은 겉보기에는 평화로웠지만 그녀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본인한테 직접 사과하는 것도 아니었다. 왕이 사신을 통해 서신을 보낼 때 귀족이 예를 갖추듯, 그녀 또한 그의 기사에게 그러길 바라는 것이다.
대놓고 수치를 주려고 한 것이다. 그것도 그녀의 사용인들 앞에서.
에이커가 화가 난 듯 에스티아에게 한 걸음 다가오려고 했다. 그러기 전에 에스티아가 먼저 선수를 쳤다.
“사과드립니다.”
“…….”
에이커의 동작이 멈췄다. 에스티아가 고개를 숙였다.
“상투적인 말인 건 알지만 두 분을 괴롭게 하려고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무례를 저지른 것은 맞으니 사과하겠습니다. 바일 대공 전하께 전해 주십시오. 죄송합니다.”
메리와 웬트워스가 고개를 돌렸다. 에이커도 대놓고 웃진 못하지만 우쭐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서신을 더 읽으십시오, 아가씨. 아직 내용이 더 남았…….”
“다만.”
에스티아가 고개를 들고 에이커의 말을 잘랐다.
“무례는 먼저 대공 전하께서 범하셨으니 저도 기사님께 대공 전하의 사과를 요구해야겠습니다.”
“예?”
에이커의 입가가 떨렸다. 메리와 웬트워스도 화들짝 놀라며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순순히 사과할 줄 알았어?
“글레멘드의 영애이자 유일한 상속자로서 바일 대공 전하께 아룁니다. 기사 에이커는 똑바로 들으세요.”
에스티아는 매서운 눈빛으로 에이커를 노려보았다. 에이커는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당최 그게 무슨 소리인지…….”
“에이커 기사!”
에스티아가 큰소리로 외쳤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에이커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감히 공작 영애인 나에게 이 무슨 무례입니까! 예의를 갖추어 전하께 전할 말을 들으세요.”
보통 이런 말은 귀족 아가씨가 아닌 사용인이 하는 말이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귀족 영애로서 제대로 기선 제압을 하고 싶었다.
에스티아는 곁눈질로 사용인들로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하는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가씨.”
기사가 주먹을 꽉 쥔 채로 에스티아에게 허리를 숙였다.
“기사의 무례는 이 정도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나도 사과하였으니 나도 전하께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에스티아는 에이커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에이커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런 상황을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식은땀마저 흘리고 있었다.
“분명 나는 어제 전하의 멱살을 잡고, 셰린포드 영애에게 험한 말을 퍼부었습니다. 저의 잘못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전하께 한 짓은 방금 기사님께 사과를 드렸고, 영애께는 제가 직접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에스티아는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커가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귀족과 귀족 사이에 주고받은 서신에 먼저 무성의하게 대한 건 전하이십니다.”
물론 에스티아가 스토커처럼 그에게 편지를 보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소설 내용대로라면 그는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제대로 된 답장을 한 적이 없었다.
“먼저 공작가의 영애에게 제대로 예를 표하지 않은 건 전하이시니 저는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이 사과만 받는다면 다시는 대공 전하께 개인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가문에서 보내는 편지 또한 가급적 자제를 할 것이고요.”
에스티아는 그의 눈에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다만 저에게 축객령을 내릴 때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신 것, 정식으로 예를 갖추고 사과를 받으시는 게 아니라 기사를 보내 저에게 수치를 주시려고 한 것, 그리고 감히…….”
에스티아는 에이커 앞으로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에이커의 얼굴에서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작가의 영애에게 기사가 함부로 대하게끔, 지도를 제대로 하지 않으신 것도. 저는 사과를 받아야겠습니다. 다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통해서 사과를 하는 건 사양합니다. 제가 직접 뵙겠다고 전해 주세요. 저도 직접 사과를 받아야겠으니까요.”
“아…… 아가씨…….”
에이커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그녀를 불렀다. 에스티아는 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이것도 기억하라고 전하십시오. 전하와 셰린포드 영애는 정식으로 약혼한 사이가 아니라고. 전하의 약혼녀가 될 후보 중에는 저도 있다고요. 그러니 감히 저를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요.”
에스티아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설령 셰린포드 영애와 약혼을 하시더라도 저를 함부로 대할 권리는 없으시다고요.”
에스티아는 뒤를 돌아 자신의 방과 연결된 2층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메리! 지금 상단에 갈 거야. 웬트워스, 오후 4시쯤에 셰린포드 가에 방문하고 싶다고 전해. 어제 일로 정식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다고.”
“예.”
메리와 웬트워스는 동시에 대답했다. 둘은 이 상황이 어안이 벙벙했지만 적어도 늘 비참하게 취급당하던 자기 아가씨가 당차게 나오니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에이커 기사.”
“네?”
“어쨌든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전하가 원하시는 시기에 절 불러 달라고 전하세요. 제대로 사과를 드리고, 제대로 사과를 받겠다고요. 그러니 보내신 ‘편지는 읽지 않겠다’라고요.”
에스티아는 멍하게 서 있는 에이커를 등지고 계단을 올랐다.
사실 이 정도로 저 기사에게 단호하게 대처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녀를 무시하는 무례한 태도를 참을 수 없었다.
또한, 더는 을이 아니라는 걸 그 오만한 대공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동안 에스티아는 사랑 앞에서 철저히 을이었을 테니.
‘그 사람도 편지를 안 읽었는데, 굳이 내가 끝까지 읽을 필요가 없지.’
에스티아가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그 뒤로, 메리가 허겁지겁 에스티아를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메리가 기쁜 듯하면서도 걱정된다는 얼굴로 에스티아에게 물었다.
“안 괜찮을 건, 뭐야.”
에스티아는 메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세계에 빙의하고 처음 본 사람이 메리이다 보니 벌써 그녀에게 정이 갔다. 더군다나 그녀는 어쩌면 거의 유일하게 에스티아를 아낀 사람일 테니.
“괜찮으시다니 다행이에요.”
메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다만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아이더 영애의 티 파티에 안 가셔도 되겠어요? 어제 급하게 아가씨를 초대했던데요.”
“어차피 소문 듣고 날 개망신 주려고 초대한 걸 텐데 뭐. 그런 데나 갈 바에는 정말 실용적인 일을 하고, 당사자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게 나아.”
그리고 이번에 그녀가 공략할 대상은 에버하르트 바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약혼녀이지!
* * *
마차가 비포장된 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에스티아는 멀미가 나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바람을 타고 꽃잎들이 날아왔다.
아침에 그 수모를 당하긴 했지만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에스티아는 눈을 감고 바람을 감미했다.
사실 왜 아직도 제가 에스티아에게 빙의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연했다. 아직 2주밖에 지나지 않은 데다 워낙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조금이라도 돌이킬 수 있을 때 빙의한 게 천만다행이었다. 이왕 에스티아의 삶을 갖게 되었으니 최선을 다해 그녀의 인생을 최고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도 그녀가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물론 돌아왔을 때 무척이나 곤혹스러울 테지만. 하하.
“아가씨, 상단에 거의 도착했어요.”
메리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그 말에 에스티아가 눈을 떴다. 마을 구석에 다다른 곳에는 작은 건물이 있었다. 에스티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건물은 작았지만 연한 녹색으로 칠해져 전체적으로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창으로 향긋한 냄새가 퍼져 오면서 약초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상단 느낌이 물씬 났다.
“이곳의 상단주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했지?”
“네, 작은 상단이지만 양심적인 거래로 호평이 많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가주님도 자주 거래를 하시는 거고요.”
메리가 싱긋 웃었다.
“상단주님은 거의 구십이 다 되셨지만 아직도 정정하세요. 아가씨를 오랜만에 만나면 기뻐하시겠네요.”
메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부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에 내린 에스티아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시작해 보려고 한다.
에스티아는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래, 난 살아남을 테니까, 댁은 사랑이나 하셔!’
당신이 사랑에 눈이 멀었을 때 나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남을 테니까!
에스티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메리와 함께 건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