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꼭 흑사병 같은 전염병만이 사람들을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 게 아니다. 우리가 버틸 수 있게 만드는 힘을 어떤 존재가 무너트릴 때도 우리는 언제든 어둠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마법사의 마나를 보호해 주는 약초가 품귀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면 제국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 틈을 타 제국 지배하의 다른 왕국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실제로 소설에서는 그렇게 전개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셰린포드 가문은 전쟁에 참여하고 메르헨의 아버지 칼 셰린포드는 그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
그 비극을 빌미로 두 주인공이 가까워진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랑에 꼭 비극이 필요한가?
“비극 없이도 지지고 볶고 할 수 있지 뭐.”
“네? 뭐라고요, 아가씨?”
메리가 에스티아를 따라 걷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야, 그냥 혼잣말.”
에스티아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셰린포드 가문이 후작에서 공작 가문으로 지위가 올랐으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약초가 귀해지면서 마나가 부족해진 상태에서 전쟁에 참가했으니 셰린포드 공작 또한 방심했을 것이다.
‘남주에게 잘 보일 가능성이 희박하다면 여주에게라도 잘 보여야지!’
에스티아는 건물 입구 앞에 서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메르헨, 내가 너의 아버지를 살려 주겠다 이거야!’
마력을 보호해 주는 약초가 원활하게 수급이 되면 칼 셰린포드가 전쟁에 나갈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제국 마법사들의 힘이 유지되어 국방력이 계속 안정화 될 테니.
무엇보다 비가 쏟아져 약초 수급에 수많은 가문에서 곤란을 겪을 때, 메르헨에게 도움을 주면 앞으로가 좀 더 안전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다.
에스티아는 메리가 문을 열어 주기도 전에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당하다는 듯이 서 있던 메리는 허겁지겁 에스티아를 따라 들어갔다.
카운터에는 금발의 어린 소년이 신문을 펼쳐 들고 이파리를 씹고 있었다.
사업을 하며 유행을 파악하고자 억지로 인터넷 신문이나 조금씩 보던 자신과는 달랐다.
“혹시…… 상단주님 계시나요?”
에스티아가 소년을 향해 물었다.
소년은 귀족 아가씨처럼 보이는 여자가 갑작스럽게 존댓말을 하자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뉘십니까?”
“글레멘드 아가씨이십니다. 예를 갖추세요.”
메리가 다급히 에스티아의 앞에 서며 말했다. 소년은 에스티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황급히 신문을 내려놓았다.
“아! 에스티아 아가씨시군요! 실례했습니다. 전 스퀘일러 상점이자 상단에서 일하는 에팅이라고 합니다. 일한 지는 6개월 정도 되었습니다.”
소년이 카운터에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짙은 갈색 머리에 검은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아직 풋풋한 느낌이 남아 있어 귀여운 인상이었다.
“이리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그저 상단주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 견습생이니 편하게 말씀 낮추십시오.”
에팅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에스티아는 친절한 미소에 마주 웃으며 “그래” 하고 대답했다. 아직 귀족 어투가 익숙하지 않았지만 어색하게 높임말을 써 봤자 도리어 이상하게 보일 거 같았다.
“에팅, 다른 게 아니라 상단주님을 뵈러 왔어. 안에 계실까?”
“아! 상단주님은 지금 근처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계십니다.”
“근처에서? 왜 사무실에서 하지 않으시고?”
“사무실이 누추하다고 단주님께서 다른 곳을 제안하셨습니다.”
에팅이 해사하게 웃었다.
“손님이 꽤 귀한 분이신가 봐?”
에스티아가 카운터 뒤에 나열된 약초들을 보며 물었다.
“예……그게…….”
환하게 웃던 에팅이 갑자기 에스티아의 눈치를 보았다.
“왜? 곤란하면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그게……못 말할 부분은 아니긴 한데…….”
에팅이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그제야 에스티아는 묘한 불길함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에팅.”
“예!?”
혹시 그 새끼야?
라고 할 뻔한 걸 에스티아는 겨우 참았다.
“혹시…….”
“예……. 그 바일 대공 전하와 만나고 계십니다.”
에팅이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엊그제 일이 벌써 소문이 쫙 퍼진 모양이었다. 역시 세계와 상관없이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게다가 사교계에서 자극적인 소문은 즐기기 좋은 가십거리일 테니 더 빨리빨리 입에서 입으로 옮겼으리라.
에스티아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지만 애써 티를 내지 않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혹시 여기로 다시 오시진 않겠지?”
“예, 바쁘신 분이니 아마 계시던 곳에서 바로 출발하실 겁니다.”
에스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가게 안이 다시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천장에는 넝쿨 같은 것이 엉켜 있었고 가게 안 곳곳에는 화분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지저분하다는 느낌이 들기는커녕 포근한 느낌을 더해 주었다. 공기 속으로 약초와 식물이 뿜어내는 향기가 흘러 다녔다.
“혹시 이곳에 약초 창고 같은 곳이 있을까?”
“버지니아 약초는 관리를 잘해야 해서 창고가 좀 떨어진 곳에 있지만, 해열제로 쓰이는 로트 약초는 안쪽 창고에서 바로 보실 수 있으세요.”
버지니아 약초는 아무래도 마나를 보호해 주는 필수 약품이다 보니 역시 통제된 곳에서 관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응, 그럼 로트 약초 창고로 가 보고 싶어. 괜찮을까?”
“상단주님한테 아가씨는 귀한 고객이라고 들었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귀한 고객? 잠깐 소설에 그런 내용이 있었나? 이거 아주 주인공 중심으로만 썼구먼! 조연은 뭐 사람도 아니야?
에스티아는 속으로 씩씩거렸다. 메리는 그런 에스티아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그녀와 함께 에팅을 따라갔다.
그들이 창고로 향하고 있을 때, 상단주는 자신의 가게로 돌아오고 있었다.
* * *
창고 안은 포근했다. 에팅은 로트 약초는 어떤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약초라 관리가 편하다는 말과 함께 창고를 나갔다. 에스티아가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물러난 걸 보면 눈치가 굉장히 빠른 아이 같았다. 에스티아는 벌써 에팅이 마음에 들었다.
“흠, 냄새 좋아.”
에스티아는 눈을 감고 약초의 향을 음미했다. 허브와 비슷한 향이 에스티아에게로 흘러왔다.
창고는 선반이 서재처럼 두 줄로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위에 약초가 햇빛을 받으며 쉬고 있었다. 다 똑같은 생김새임에도 에스티아는 하나하나 눈여겨보며 관찰했다. 이곳을 파악하기 위해 집에서 역사서를 읽을 때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었지만 이곳에서의 즐거움은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책에서는 자세히 안 나와 있지만 버지니아 약초가 귀해진다면 다른 약초 또한 사재기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에스티아는 약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로트 약초도 미리 비축분을 쌓아 둬야겠다고 생각했다. 버지니아가 부족해져서 마법사들의 힘이 약해지고, 나라의 국력이 위협받게 된다면 지금 그녀의 인생도 수렁에 빠질 것이다.
에스티아는 평화로운 곳에서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고 싶었다. 귀족들의 허례허식 속이 아니라.
‘다만 마냥 무능력한 귀족 영애로 전락할 수는 없어.’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약초들을 차근차근 살폈다.
아무리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약초라고는 하지만 햇빛이 잘 들게 한 걸 보면 온화한 곳에서 더욱 잘 자라는 약초라는 걸 알 수 있다.
직접 보니 책으로만 읽을 때보다 훨씬 와 닿았다. 에스티아는 약초의 잎을 들어 향을 맡았다. 부드러운 미소가 절로 그녀의 입가에 걸렸다. 마음속에서 뭔가가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번 삶은 자신의 재능을 살리며 하고 싶은 걸 하며 살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몰랐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새로운 시작.
에스티아는 향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향에 빠져 있다 보니 누군가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맨날 이곳에만 있다면 너무너무 행복할 거 같아.’
큰 보폭이 점점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지금 이 사회가 상인 일을 얼마나 천박하게 여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회가 그런 사람 없이 굴러갈 수는 없다는 걸 내가 보여 주마.’
에스티아는 속으로 다짐했다. 여전히 약초의 향에 취한 채로.
물론 흙냄새가 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좋은 흙냄…… 잠깐, 이거 뭔가 냄새가 다른데.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고약한 냄새는 아닌데 여기에는 결코 없던 냄새였다.
에스티아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었다. 누가 있었다.
에스티아의 입가가 떨렸다. 원체 다른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지라 낯선 이의 존재가 놀랍기만 했다.
남자는 지긋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약초보다는 옅은, 잔디보다는 짙은 눈동자였다. 에스티아는 그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너무 맑은 눈이라 그 속에서 푸른 바람이라도 불 거 같았다.
저런 눈을 본 적이 있었던가? 시간을 정지시키기고, 영혼을 끌어당기는 눈.
에스티아는 숨 쉬는 걸 멈추고 있는 것도 모르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남자의 은발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워낙 밝은색이라 백발처럼 보이긴 했지만, 백발이어도 저렇게 아름다운 백발이라면.
‘아름답다.’
에스티아는 감탄했다. 잘 빚어 놓은 조각 같았다.
에스티아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에게 말을 건네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그를 보았다. 낯이 익었고 누군가가 떠오르는 거 같았다.
근데 지금은 저 남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기보다 그저 저 남자를 바라보고 싶었다.
에스티아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남자에게 고정됐다. 남자의 눈이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 역시 푸른 잔디 위로 바람이 부는 거 같은…….’
에스티아가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흠칫했다.
‘아니, 잠깐 저건 폭풍인데?’
에스티아는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여? 누구여!?
다시 보니 덩치가 커도 너무 크다. 에스티아보다 위로 얼굴 두 개는 더 있었다.
‘지가 무슨 팔 척 귀신이야? 키는 왜 저렇게 크고, 왜 저렇게 날 노려본데?’
아니, 잠깐. 순간 머릿속에서 누군가의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에스티아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남자가 그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말도 안 되는 우연 타령을 할 겁니까. 아니면 접신이라도 한 겁니까?”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닿았다.
뭔 소리야. 에스티아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그를 노려보았다.
“서신을 읽었다면 집 밖으로는 못 나올 텐데.”
남자가 입가에 비소를 띄우며 비아냥거렸다.
에스티아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잠시 외모에 홀려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을 외면하고 있었다. 백은발에 옅은 녹색눈.
그 남자였다. 과거는 물론 지금 이 순간조차 그녀에게 큰 수치를 주고 싶은 사람.
기사를 통해 사과하라고 강요하며, 갓 빙의한 그녀에게 모욕감을 준 사람.
만나기 전부터 미웠던,
에버하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