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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4화 (5/141)

4화

살면서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은 많았다. 셀 수도 없을 정도로.

하지만 얼굴도 보기 전에 미워진 사람은 처음이었다.

‘여기가 외나무다리도 아닌데 이 인간을 왜 여기서 만난 걸까?’

에스티아는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만날 줄은 몰랐다.

‘햇빛이 눈부시지도 않나. 왜 저렇게 노려봐.’

에스티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마음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얼굴을 힐끔 볼 때마다 이상하게 속이 매슥거렸다. 아무리 자신이 진짜 에스티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가 에스티아한테 한 짓을 생각하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저 얼굴을 보면…….

‘아니야,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반하는 순간 처형이야.’

에스티아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찬물을 얼굴에 부어서라도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공작 전하.”

에스티아는 행여나 목소리가 떨릴까 하여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단주님을 만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곧…….”

“여기로 온다는 말을 들었겠죠. 그래서 있었습니까?”

빠직.

그렇지. 당연히 이런 루트겠지.

“아닙니다. 에팅에게서 전하께서 단주님과 만나신 장소에서 바로 저택으로 돌아가실 거라는 말을 듣고…….”

“거짓말하지 마세요. 바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니, 그니까 돌아갈 거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에스티아는 숨을 훅 내뱉었다.

“서신을 읽었을 텐데요?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가 에스티아를 내려다보며 헛웃음을 쳤다. 에스티아는 그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

“분명 서신을 다 읽었으면 여기에 이렇게 있지도 못하십니다. 당신이 나한테서 사과에 대한 응답을 받고 셰린포드 영애가 당신을 용서해 주기 전까지 내가 다니는 길에 나타나지 말라고…….”

“전하.”

아니, 이 새끼야.

“전하의 사유지라면 모르겠으나 여기는 수도 외곽에 자리한 가게입니다. 전하의 소유지도 아닌데 제가 왜 여기에 나타나면 안 됩니까?”

“…….”

목소리가 떨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말이 술술 나왔다.

“지금 영애가 저한테 화를 낼 입장입니까?”

“에이커 기사에게 아직 제 말을 듣지 못하셨군요.”

“말이라뇨?”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전하께서도 기사를 통해 저한테 말을 전하셨으니, 제 말도 그한테서 들으시죠.”

그의 눈이 커졌다. 에스티아가 에이커에게 화를 냈을 때 메리와 웬트워스의 표정도 딱 저랬다.

“스퀘일러 상단주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겁니다. 제가 전하를 보고 싶었으면 전하의 저택으로 가지 왜 여기로 왔겠습니까?”

“…….”

공격이 성공했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스티아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21세기 20대한테 말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대단한 착각이다.

“영애, 어디 아프십니까?”

진심으로 걱정되어서 묻는다기보다는 ‘네가 제정신이냐?’라는 뉘앙스였다.

“건강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합니다. 아, 물론 끌려 나오느라 온몸에 멍이 들었지만요.”

“그건…….”

“그건 네, 제 잘못 때문이죠.”

에스티아는 똑바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도 질세라 에스티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영애께서 감히 제 말을 끊으시는 겁니까?”

“그럼 전하께서는 감히 공작 영애에게 그런 결례를 범하셨습니까?”

그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네, 이왕 격식 없이 말씀하시는 거, 저도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편지를 읽지 않으시기에 저도 다 읽지 않았고 제 말을 끊으시기에 저도 똑같이 하였습니다. 대공 전하 대 공작 영애가 아니라 저를 그냥 하대하듯이 말씀하셔서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겠다는 영문이다.

“에이커에게 이미 말했지만 한 번 더 말씀 드리지요. 제가 마땅히 전하께 사과를 드려야 하지만 기사를 통해 저한테 사과를 요구하시는 건 저한테 수치를 주시는 일입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말고 나중에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에스티아가 몇 걸음 더 그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날 봐야겠다? 이런 식으로 수를 쓰는 겁니까?”

그가 에스티아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비아냥댔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마음 한 자락 얻어 내고 싶습니까?”

입이 턱 막혔다. 아무리 마음이 없다고 피력해도 통하지 않을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만약 진심 없는 사과를 건네고 싶었으면 여기서 전하를 생각하지 않고 바로 무릎을 꿇었으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오히려 전하를 불편하게 하는 듯하여 하지 않는 거고요.”

나름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을 상대해 왔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이 남자 앞에 있으니 그 모든 경험이 다 부질없는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떨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서 에이커 기사에게도 말했습니다. 진정한 사과를 원하실 때 언제든 저를 부르시라고요. 그렇게 해서 제 진심을 말씀드리겠다고요.”

“영애의 ‘진심’ 말입니까?”

나긋한 목소리가 특정 단어를 교묘하게 비틀었다.

“영애는 저한테 단 한 단어 말고는 진심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게 뭔가요?”

“‘사랑한다’…….”

“…….”

“그 외에는 다 듣기 싫은 고함, 비명, 가식이었습니다.”

에스티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건 책에서도 본 적이 있는 부분이었다. 에버하르트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뒤에서는 그와 연관되는 모든 영애들에게 패악을 부리던 에스티아.

“그러면서 저한테 진정한 사과를 하겠다고요? 영애가 다른 영애에게 행패를 부린 것에 대해 저한테 사과를 전한다니.”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한 번 더 저를 보고 싶은 거라고 말하세요. 그럼 적어도 고민은 해 볼 테니까요.”

에스티아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을 내리눌렀다. 그래도 오랜 시간 소설을 읽은 데다 에스티아로 그래도 2주 정도는 살아서 그런 걸까. 비수에 찔린 듯 마음이 울렁거리고 쓰렸다.

‘벌써 에스티아가 되기라도 한 건가, 내가.’

전생에서 거래처와 미팅할 때, 그들에게 폭언을 당하거나 하면 했던 다짐이 있다. 울면 지는 거다. 여기서 우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겠다.

“고민하지 마세요.”

에스티아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고민하지 마세요, 대공 전하. 그 일을 진정으로 후회하고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 드릴게요. 앞으로 전하와 관련된 모든 영애들에게, 특히 셰린포드 영애에게 다시는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일 테니까요.”

“이번에는 호기심을 유발하는 작전인가요?”

대공이 비릿한 웃음을 입가에 걸었다.

“드디어 영애께서도 다른 전략을 쓰시기 시작한 겁니까?”

잘생긴 얼굴이라도 인성이 덜 되어먹으면 한 대 날리고 싶어진다는 걸 여기서 알았다. 에스티아는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걸 느꼈지만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무엇을요?”

대공이 여유로운 표정을 한 채 에스티아를 내려다보았다.

“저도 전하한테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고, 전하 또한 저한테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인 것을요.”

“……!”

오만한 표정에 미세하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에스티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당할 때는 별일 아니어도 작은 상처가 모여 큰 상처가 되는 것이겠죠. 저한테는 그날이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날이었습니다. 제가 언제까지 그런 수치를 당해야 합니까?”

에스티아가 매섭게 쏘아붙였다. 대공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간 작은 상처든 큰 상처든 기꺼이 견뎌 내시는 줄 알았는데요?”

대공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기가 찼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소설에 나오지 않은 에스티아의 잘못된 행동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생각이 안 된다. 자신은 이제 그 소설의 독자가 아니라 ‘에스티아’니까.

“이겨 내기 싫어졌습니다.”

아무래도 벌써부터 에스티아에게 동화되기 시작한 거 같다. 울음이 목까지 차올랐으니까.

“때때로 져야 하더라고요. 저를 위해서.”

눈이 벌게지고 얼굴은 분노로 달아올랐지만 에스티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공이 그녀를 비웃듯이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꽤 진짜 같군요. 하지만 믿을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면서 코웃음을 쳤다.

“그동안 마음이 떠난 척하면서 얼마나 뒤에서 행패를 부리셨습니까? 저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영애들을 찾아가 패악질을 부리셨지요. 제가 곤란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

“이번에는 또 언제 제 뒤통수를 치실까요. 제가 언제까지 일일이 얼굴도 잘 모르는 영애들을 만나면서 영애와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할까요?”

그가 쉬지도 않고 말을 뱉어 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에스티아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럼 말해 주세요. 제가 더는 수치를 당할 정도로 전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하면 증명할 수 있는지.”

내심 원래 에스티아에게 미안했다. 진짜 에스티아는 이 남자를 포기하고 싶지 않을 테니.

하지만 잘라 내야 한다. 그리고 그러고 싶은 마음을 증명해야 한다.

대공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마치 그녀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그날의 충격이 영애께 꽤 큰 영향을 준 거 같군요. 알겠습니다. 말하도록 하죠.”

두 눈빛이 따스한 햇빛 아래 차갑게 대치했다.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셰린포드 영애에게 영혼이라도 바치시든지요.”

에스티아는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잘못 들었나 했지만 그는 분명 자신을 내려다보고 말하고 있었다.

대공은 에스티아가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제가 메르헨 셰린포드와 약혼할 수 있도록 영애의 마음을 바치라는 말입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에스티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가신들도, 귀족 사회에서도 자꾸 영애의 이름을 거론하니 셰린포드와의 약혼이 제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요.”

신이 정성스레 빚은 듯한 얼굴이 코앞까지 와 있었지만 에스티아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는 저 녹색 눈동자도 보이지 않았다.

“영애가 저한테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해 보이십시오. 그간 이런 식으로 나오고 나서도 바로 그날처럼 저한테 ‘행패’를 부리신 일이 많았으니까요.”

녹색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요하게 붙들었다. 지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에스티아는 점점 숨이 막혀 오는 걸 느꼈다.

“정말 앞으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시겠다면, 또한 그럴 만큼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이 더 이상 없다면. 그간 저한테 모든 걸 쏟으셨으니, 이제 메르헨에게 모든 걸 쏟으십시오. 그녀의 지지자가 되어 주고, 친구가 되어 주세요. 이왕이면 나중에 메르헨의 들러리까지 되어 주시면 더 좋고요.”

몸이 떨렸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마음이 없음을 증명하지 못한다는 언젠가 원작의 결말대로 죽음에 닿을지도 모를 일이니.

“네, 그러겠습니다.”

움찔.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댔다.

“셰린포드 영애의 지지자가 되고, 친구가 되겠습니다. 전하와 셰린포드 영애가 원하시는 결말을 얻으실 수 있도록.”

마음과는 달리 목소리는 차분했다. 에스티아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숨기지 않았다. 뭐가 부끄럽다고. 이제 이 인연을 끝장내려고 그러는 건데.

“그러니 비켜 주시겠어요?”

목이 아파왔지만 에스티아는 꼿꼿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대공은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지만 방금 전의 자신만만한 기운은 사라져 있었다.

이제 남주한테 목매는 서브 여주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인생을 찾아 나가는 주인공만 있을 뿐이지.

대공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지만 순순히 옆으로 비켜섰다. 에스티아는 잽싸게 옆으로 빠져나왔다.

“글레멘드 영애.”

그런 에스티아를 낮은 목소리가 붙잡았다.

“제대로 날을 잡아 보죠. 서로에게 사과할 날 말입니다. 이번에는 기사를 통해서 말고, 직접.”

날카로운 눈빛이 에스티아에게로 향했다.

그때 한번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영애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임이 드러나면…….”

진득한 시선이 자신의 옆얼굴에 닿는 게 느껴졌다.

“글레멘드 가와 진행하고 있는 모든 사업을 중단하겠습니다. 어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영애 때문이라고 세간에 알릴 겁니다.”

간담이 서늘했다. 대공이 하는 말이 진심이라면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악화될 수 있었다. 에스티아는 속내를 감추며 뒤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네, 언제든, 부르시죠.”

그 말을 끝으로 에스티아는 빠르게 창고를 벗어났다.

어떤 시선이 그 등 뒤를 따라붙는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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