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하…….”
에스티아는 문에 등을 기댔다. 창고를 빠져나온 뒤 허겁지겁 달려온 에팅이 그녀를 상단주의 방으로 안내했다. 지금 그녀는 상단주의 방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상단주가 오기 전이어서 에스티아는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하지만 눈물이 떨어지진 않았다. 겨우 이런 일 때문에 울 수는 없었다. 그것도 저런 사람 때문에.
그는 대놓고 그녀를 조롱했다. 이유인즉슨, 그를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만 그렇게 해놓고 뒤에서 여러 영애한테 행패 부리며 그를 곤란하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그러니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심이면 메르헨에게 헌신하라 이거네. 그렇지 않으면 정말 지옥으로 보내 버리겠다는 거고.’
에스티아는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에스티아가 그동안 어떤 취급을 받아왔을지 눈에 선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그를 놓지 못해서 자신에게 닿지 않는 마음 끝자락을 잡아당기고 있었겠지.
에스티아는 문에서 등을 떼 창가로 다가갔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지만 종종 상단의 것으로 보이는 마차가 왔다 갔다 했다. 에스티아는 멍하니 마차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소설을 읽어 알고 있었다. 사교계 파티에서 그한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그의 어깨를 치고, 뺨을 때리고. 메르헨에게도 욕설을 퍼붓고 궁극에는 그녀의 차에 몰래 독을 타 그녀를 죽이려고 한다.
“그러니 모르는 거 아니라고 나도…….”
에스티아가 창가에서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에스티아의 인사를 무시하고 파티에서 대놓고 그녀에게 면박을 주고, 편지에 답을 하지 않은 건 그였다.
에스티아가 잘못을 많이 했다고 해도 결국은.
‘난 너 편이야, 에스티…… 아니, 아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돌리며 정정했다.
‘난 내 편이야.’
에스티아는 두 손을 꼭 맞잡았다.
물론 당분간 메르헨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려면 에버하르트보다 메르헨을 노리는 게 나았다. 원작대로라면 그녀가 유일하게 에스티아의 청원을 반대한 인물이니까.
더군다나 그녀에게 독을 먹이는 건 지금으로 따지면 미래 시점인 데다가, 소설을 보면 이상하게 에스티아는 메르헨보다 에버하르트에게 더 많은 폭언과 폭력을 퍼부었다. 하물며 다른 영애에게는 패악질을 부리는 거랑 비교해 보면 그나마 덜했다. 물론 양심 고백을 하자면 어디까지나 ‘그나마’이다, ‘그나마’.
‘보통 여주한테 더 패악질 부리지 않나……?’
원래 작가 쓰는 스타일이 그래서였던 걸지는 모르겠지만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와 메르헨이 함께 있으면 대개 메르헨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설사 단둘이서 마주칠 때조차도. 그래서 메르헨이 동정표로 에스티아의 처형을 반대한 걸까?
‘한 놈만 패는 스타일인가?’
그래도 이상한데. 에스티아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에스티아가 ‘왜’ 그랬냐를 따지기보다 에버하르트와 멀어지는 동시에 메르헨의 신뢰를 얻는 게 중요했다. 자신의 죽음은 자신을 향한 남주의 증오에서 출발했으니까. 동시에 청원에 협조한 로셸이 자신을 경멸하면서도 버릴 수 없는 카드로 여기게끔 만들어야 했다.
‘아주 다 나 때문에 안달복달하게 만들 거야.’
에스티아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켰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에스티아 아가씨?”
그때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에스티아가 화들짝 놀라며 팔을 내렸다.
“에스티아 아가씨, 이게 얼마 만입니까.”
노인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노인이 바로 상단주 스퀘일러라는 걸 알아차렸다.
“상단주님.”
에스티아가 밝게 웃었다. 다시 따뜻한 미소를 보니 마음이 뭉클해졌다.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스퀘일러의 눈동자도 에스티아처럼 촉촉해져 있었다.
* * *
“이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스퀘일러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에스티아에게 말했다. 온화하고 따뜻한 목소리였다.
‘메리에게 대충 얘기를 듣긴 했지만 더 신사 같은 분이네.’
에스티아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혼자 뾰로통해졌다.
‘그 대공 전하보다 훨씬 나아.’
“아가씨?”
에스티아가 아무 말이 없자 스퀘일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해요. 아시겠지만 갑자기 그분을 만나는 바람에…….”
“바일 대공 전하 말씀이시지요?”
스퀘일러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가 소문을 들었을까 걱정했던 에스티아는 안심했다. 들었다 할지라도 그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난 앞으로도 단주님 라인이에요.’
에스티아가 속으로 뿌듯하게 중얼거렸다.
“네, 에팅이 단주님과 만난 장소에서 바로 저택으로 돌아갈 거라고 하셔서 오실 줄은 몰랐어요.”
“예, 에팅의 말이 맞습니다. 바로 출발할 거라 하시더니 집사와 잠깐 얘기를 나누더니 다시 여기로 오겠다고 하시더군요.”
스퀘일러가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여기로 오겠다고 했다고?
“텔레파시라도 배우나.”
“네?”
“아, 아니에요.”
에스티아는 억지로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나저나 정말 이 비루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스퀘일러가 염치없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휴, 전 길바닥이어도 괜찮아요.”
에스티아가 싱긋 웃었다.
“하하하, 아가씨는 5년 만에 뵈어도 여전하시군요.”
스퀘일러가 허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가식이 없으신 분인데 도대체 어디가 변했다는 건지.”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제대로 찾아왔다 싶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상단주님,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해요. 비용은 제대로 치를게요.”
“예? 아가씨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걸 보니 무척 중요한 의뢰이신가 보군요.”
스퀘일러의 표정이 단번에 진지해졌다.
“무엇입니까?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스퀘일러는 단호하지만 따뜻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버지니아 약초 비축분을 마련해 두었으면 해요.”
“버지니아 약초를요?”
스퀘일러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리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요청이었는데도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니 역시 연륜이 있는 상단주다웠다.
“네, 지금은 풍족하지만 미리 약초를 찾아서 관리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신전으로부터 요근래에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는데요, 아가씨?”
역시 예상했던 지적이 날아왔다. 에스티아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어차피 어떤 소리를 해 봤자 설득력이 없다. 신관이 아니니 비가 올 거라고 확신시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이유를 대자니 그게 먹힐 거라는 보장도 없다.
“맞아요, 저도 메리한테서 들었습니다. 당분간 비가 오지 않을 거라고요.”
에스티아가 앞에 놓인 차를 한 입 마셨다.
“다만 영지의 농부들한테 물어보니 날씨가 흐릴 때가 많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고 합니다. 비가 오면 농부들한테는 좋지만 버지니아 약초한테는 좋지 않죠. 게다가…….”
에스티아는 스퀘일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난 며칠간 열심히 알아낸 정보를 공유할 차례였다.
“요 며칠 동안 사람을 통해 알아보니 현재 유통되고 있는 약초 중 절반에 달하는 양이 불량이라더군요. 아무래도 몇몇 상단이 유통 과정에서 정상 약초를 빼돌리는 거 같습니다.”
사실 솔직하게 긴 우기가 와서 수급에 곤란하다고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신뢰를 받기 어려우니 추가로 명분이 있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 얻은 것이 ‘불량 약초’였다.
에스티아의 말에 스퀘일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공작가의 정보이니 정확하겠죠. 다만 6월에서 7월은 약초가 다른 시기보다 천천히 자라는 시기입니다. 다른 때보다 많은 수량을 건지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날씨가 더워서 산을 옮겨 다니며 찾기도 힘들고요.”
“네, 그래서 제가 투자하려고 합니다.”
“네?”
스퀘일러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물렀다. 에스티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상단에 정식으로 투자하고자 합니다, 상단주님.”
에스티아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 정식으로 대대적으로 투자를 하게 되면 정상 약초를 구하는 데 더 수월할 거고, 상단의 위상은 더 높아지겠죠. 정 불안하시거든, 한 가지 제안을 드리려고 합니다.”
에스티아가 스퀘일러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상단에 손해가 발생하게 된다면 비용의 10배에 달하는 금액을 드리겠습니다.”
“아가씨…….”
스퀘일러가 얼떨떨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몇십 년의 경력자라도 이런 제안은 처음 들어 봤을 것이다.
“설령 손해 보실 가능성은 적더라도 너무 아가씨한테 손해인 거래입니다.”
스퀘일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건 그때 되어 봐야 아는 것이죠. 저는 자신 있습니다.”
“호…….”
스퀘일러의 눈이 번쩍거렸다. 상단주의 눈빛이었다.
“대신 제 제안으로 인해 수익을 보게 되신다면 약초의 유통 업무를 저에게 맡겨 주셨으면 합니다.”
“예? 돈이 아니라요?”
스퀘일러가 놀란 듯 물었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눈치챘다. 이번에는 진짜로 놀란 게 아니라 에스티아를 시험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네, 저는 돈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에스티아는 아까 본 에버하르트 바일을 떠올렸다.
“명예가 필요합니다. 공작 영애라는 타이틀 외에 저를 지켜 줄 무기가 필요해요. 전 지긋지긋한 가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스퀘일러는 이제 딱 봐도 호기심이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래에 확실히 흥미가 생긴 듯했다. 에스티아는 더욱 자신감이 차는 걸 느꼈다.
“물론 전 유통 업무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상단주님께서 절 지도해 주셨으면 해요.”
“즉, 제자로 들여 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면 저한테는 더없는 영광일 것입니다.”
에스티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한 사정이 있으신 거겠죠.”
스퀘일러가 다시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좋습니다. 다만 말씀하신 불량 약초를 수치화한 자료를 저한테 보여 주셨으면 합니다.”
“당연히 가져왔습니다.”
에스티아는 오는 내내 꼭 손에 들고 있었던 서류 가방에서 서류 뭉치를 꺼내 스퀘일러에게 건넸다. 스퀘일러는 그 서류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버지니아 약초는 정확히는 축출 과정이 중요합니다. 워낙 강렬한 약초이니 약초 하나에 백 명을 먹일 수 있으니까요.”
스퀘일러가 머릿속으로 계획표를 그리듯 양손 검지를 까딱거렸다.
“너무 많은 수량은 거질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일단 이 시기의 약초의 상태를 대략적으로 보고 얼마나 캘지를 정확히 정하도록 하죠.”
“단주님!”
에스티아가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자신을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기뻤다.
‘뭐야, 에스티아가 절대 헛산 게 아니었네.’
“그럼 바로 계약하시죠!”
“아고 잠깐만요, 아가씨.”
스퀘일러가 손녀를 대하는 할아버지처럼 웃으며 말했다.
“일단 숨 좀 고르시죠. 저와 만나자마자 일 얘기부터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랬죠. 헤헤.”
전생의 친할아버지를 만난 듯한 느낌에 에스티아가 애처럼 웃었다. 대공과의 기억이 좀 흐려지는 듯했다.
누군가한테 그녀의 기억이 더 짙어지는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