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차가운 공기가 흘렀다. 집무실 안에는 지독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건 기사가 지독히도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고 결코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나보고 사과를 하라더군. 맞나, 에이커?”
서늘한 목소리가 기사의 귀를 찔렀다. 기사가 몸을 움찔 떨었다.
“예…….”
헛웃음이 들렸다. 기사는 그 소리가 마치 해고를 통보하는 거 같아 오금이 저렸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일까.”
긴 손가락이 책상을 탁탁 쳤다. 에이커는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세게 나오신 거는 처음인지라 저도 도통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찌릿-
날카롭게 벼린 시선이 그에게 날아들었다. 에이커는 차라리 해고되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에스티아와 있었던 일을 보고하기 위해 바일 저택으로 다시 왔을 때, 대공은 부재중이었다. 덕분에 지금 이렇게 밤늦게 그에게 보고 중이었다.
“모르겠다는 말을 전하려고 내 앞에 서 있나?”
서늘한 목소리였다.
“굴복시키라고 보내 놓았더니 굴복당하고 와?”
“죄송합니다!!”
에이커는 허겁지겁 무릎을 꿇었다. 이런 일을 겪을 바에는 다시 한번 그 영애에게 수모를 당하는 게 나았다.
대공은 감정 없는 눈동자로 에이커를 바라보았다. 창고에서 들었던 옅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셰린포드 영애의 지지자가 되고, 친구가 되겠습니다. 전하와 셰린포드 영애가 원하시는 결말을 얻으실 수 있도록. 그러니 비켜 주시겠어요?
거짓말.
대공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와인 잔을 들었다.
“메르헨 영애는?”
“다행히 열은 내리셨다고 합니다. 점심을 드신 후에는 셰린포드 공작 부인과 산책도 하셨다고 합니다.”
에이커가 여전히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로 말했다.
“글레멘드 영애가 그녀 털끝도 건들지 못하게 해.”
연기든 아니든 에스티아가 그와 메르헨에게 사과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그의 마음속에는 에스티아를 향한 깊은 불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약속을 해놓고 메르헨에게 곧바로 해코지할지도 몰랐으니.
낮은 음성이 엎드려뻗치고 있는 에이커에게 닿았다.
“예! 알겠습니다!”
그 자세로 있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지만 에이커는 힘차게 대답했다.
“물러가.”
그 말에 에이커가 바로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였다.
물러가는 몸짓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에이커가 곧 문을 닫고 사라졌다.
대공은 잔 속의 와인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에스티아 글레멘드는 딱 와인 같은 느낌이었다. 마셔 버릴 수도 있고 바닥에 부어 버릴 수도 있는.
그런데 이번에는 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그를 자극한다.
대공은 매혹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번엔 전략을 잘못 잡았어.”
대공은 잔을 들었다. 그리고 허리까지 닿는 청검색 머리카락과 그를 바라보던 눈동자를 떠올렸다.
“비켜 주시겠어요?”
대공은 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발악할지 제대로 구경할 참이었다.
대공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단숨에 와인을 들이켰다.
* * *
에스티아는 대공과의 만남을 잠시 기억 저편으로 밀어 넣고 저택 사용인들과 상단의 사람들과 함께 약초를 찾아 산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셰린포드에서는 메르헨이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방문을 나중에 해 달라고 편지를 전해 왔다. 그리고 대공은 그때 만남 이후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도리어 더 세심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더군다나 아버지 로셸은 때마침 집사와 수행원들과 다른 제국에 가 있었고 덕분에 저택에서는 그녀를 통제할 사람이 없었다.
당연히 사교계에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 누구도 아닌 글레멘드 영애가 심마니가 되었다니.
하지만 에스티아는 상관없었다. 바로 그런 걸 노린 거였으니까. 그가 원하는 증명의 수단에는 ‘귀족 영애’로서의 그녀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도 있을 테니.
게다가 전생과 비교해 봐도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다.
상단 사람들과 약초를 캐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다 보면 전생에서 가족들과 등산을 마치고 맛있는 삼계탕을 먹으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맛있어.”
에스티아가 싸 온 쿠키를 먹으며 밝게 웃었다. 웬트워스는 그런 주인이 어이없으면서도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가씨가 살짝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며칠 동안 지켜보니 에스티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어차피 사교계에 참석해 보았자 다른 영애들의 비웃음만 당할 게 뻔했다. 주인이 그런 꼴을 당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함께 산을 타는 게 나았다.
‘그런데 진짜 대공 전하를 포기하신 걸까?’
다만 한 가지 미심쩍은 건 에스티아가 정말 그를 포기했냐는 것이다. 고작 일주일 정도 지났다고 10년 가까이 좋아했던 남자를 잊는다고?
원래라면 말도 안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달라지셨어.’
메리도 에스티아가 변한 거 같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웬트워스는 어느 날 스리슬쩍 변했다고 에스티아를 떠본 적이 있으나 에스티아는 ‘그런가?’라고 둘러댈 뿐이었다.
“그나저나 메리는 참 체력이 안 좋네. 이틀 정도 산 탔다고 움직이지도 못하다니.”
“그거야 아가씨가 체력이 좋으신 거죠. 워낙 어렸을 때부터 여기저기 쏘다니셨잖아요.”
웬트워스는 잠시 의문을 누르고 웃으며 에스티아에게 말했다. 에스티아는 웬트워스에게 초코 쿠키를 하나 건넸다.
“그러길 잘했잖아! 이것 봐. 어렸을 때부터 체력 단련한 덕에 상단 상인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내가.”
에스티아는 뿌듯한 듯 쿠키를 씹으며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나저나 미리 재배해 놓은 약초들에 비하면 요즘 버지니아 약초는 크기가 작긴 하네.”
에스티아가 물통에서 물을 마시며 말했다.
“그래도 상단주님 말 들어 보면 이것도 그렇게 나쁜 경우는 아니더군요. 괜찮을 겁니다, 아가씨.”
웬트워스가 쿠키를 한 입 물었다. 달달한 맛이 입 안에서 퍼져 나갔다.
“하…… 난 역시 이 체질이야.”
“네?”
웬트워스가 에스티아의 말에 쿠키를 씹는 걸 멈췄다.
“난 이렇게 움직이는 게 좋아. 속이 뻥 뚫리는 거 같아.”
같이 있으면 숨이 막히는 대공과 있는 것보다 훨씬 편했다.
에스티아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맑은 공기가 폐로 들어왔다.
에스티아는 지금이 좋았다. 굶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주변 사람들하고 잘 지내는 거. 전에는 절대 불가능할 거라고 믿었던 일상.
‘물론 평범한 일상은 아니지만.’
에스티아는 바닐라 쿠키를 크게 한입 물었다.
“지금 몇 시야, 웬트워스?”
“지금 5시 정도이니 이제 저녁 드시러 가시죠. 7시 넘으면 슬슬 해도 지니 혹시 모를 마물들과의 만남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내려가야 합니다.”
웬트워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장갑을 벗고는 에스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티아가 그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상인들하고는 산 초입에서 5시 반 정도에 만나기로 했으니 천천히 내려가시죠, 아가씨.”
웬트워스가 남은 음식을 바스켓에 챙겼다. 에스티아가 그의 뒤를 따라 종종거리며 내려갔다.
그동안 푸른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혼자라면 언감생심이었겠지만 산에 빠삭한 웬트워스와 상인들과 함께하니 걱정이 없었다.
상인들은 가식이 없었다. 평등 사회에서 살아온 에스티아는 텃세 부리는 귀족 영애들보다 상인들이 편했다. 요 며칠간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영애들과 인사를 나눌 때마다 에스티아는 속이 울렁거렸다.
-어머, 글레멘드 영애! 오랜만이에요. 이렇게 얼굴 볼 줄은 몰랐어요.
-오랜만에 뵈어요, 테이트 영애.
-네……. 근데 괜찮으신가요? 이렇게 밖으로 나오셔도? 다른 게 아니라 영애가 걱정되어서요.
영애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에스티아에게 물었다.
-바일 대공 전하께서 영애를 아직 용서 안 하시지 않았나요?
그런 물음을 며칠간 열 번은 들었다. 에스티아는 속이 울렁거리는 걸 느꼈다.
거리를 좀 구경하려던 걸 멈추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약초를 캐러 다닐 때보다도 더 진이 빠졌다. 에스티아는 가식이라면 지긋지긋했다.
“웬트워스.”
“네?”
웬트워스가 살짝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내 수행원으로 일한 지 얼마나 되었지?”
“벌써 12년 되었죠, 아가씨.”
웬트워스는 힘차게 내려가면서도 틈틈이 에스티아를 돌아보는 걸 잊지 않았다.
‘그래, 이 사람들에게 잘하면 됐지.’
“대공 전하도 아마 그때 처음 만나셨…… 아…….”
웬트워스가 말을 내뱉다가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게 여기서도 느껴졌다.
“괜찮아, 웬트워스. 눈치 보지 마.”
“하지만…….”
“그 사람 언급에 상처받을 만큼 마음이 있진 않아, 이제.”
“…….”
“그래도 걱정해 줘서 고마워.”
에스티아는 웬트워스의 걸음 속도에 따라 맞추며 말했다. 웬트워스는 머쓱하면서도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은 듯했다.
“아가씨 생각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더 해 드릴 수 있어요.”
에스티아는 웬트워스를 따라 미소 지었다. 어느새 산 초입에 거의 다 와 갔다. 에스티아는 정산에 도달한 것만큼의 희열을 느꼈다.
“우와, 다 왔…… 응?”
에스티아는 걷는 속도를 높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그녀 따라 웬트워스도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저기, 저 사람 보여?”
에스티아가 웬트워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그녀의 말에 웬트워스가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산 초입에 어떤 남자가 서 있었다. 게다가 비도 오지 않는데 우산을 들고.
“남자인 거 같은데…… 아가씨, 제 뒤에 서십시오.”
웬트워스가 에스티아를 뒤로 당겼다. 에스티아는 그의 등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상했다. 아직 날이 많이 어둡지도 않은데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우산 그늘 때문에 가려져서 그런가.
“불량배는 아닌 거 같습니다. 차림새가 귀족분이십니다.”
“우와, 웬트워스, 너 눈도 좋다. 이 거리에서 그게 보여?”
“제가 괜히 아버지 따라 약초를 캐고 다녔겠습니까. 저희 아버지가 베테랑 상인이었는데요.”
웬트워스는 가볍게 말하면서도 전방을 주시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거기 누구십니까?”
웬트워스가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웬트워스의 목소리에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입술과 창백한 턱이 보였다. 그리고 연보라빛 눈동자도.
에스티아는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남자의 눈이 정확하게 그녀를 보고 있었다.
웬트워스가 남자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할 때, 남자가 등을 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그대로 굳어 있는 사이에 남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제야 웬트워스와 에스티아는 안심하고 초입으로 향했다.
“누구지……?”
“그러게요. 이 시간에 사용인도 없이 산으로 오다니요. 이상하네요, 딱 봐도 귀족분이셨는데.”
웬트워스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에스티아는 입술을 내밀고 생각에 잠기다가 발에 무언가가 밟히는 걸 느끼고 아래를 바라보았다. 나뭇가지와 다른 느낌이다 싶었더니 역시 다른 것이었다. 근데 좀 많이 다른 것이었다.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뭐지?”
에스티아가 땅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들었다.
“펜던트네요. 아까 그 귀족분이 흘리신 게 아닐는지요.”
“그런가.”
에스티아는 펜던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펜던트에는 방패와 방패를 둘러싸고 있는 덩굴 꽃이 새겨져 있었다.
“잠깐만요, 아가씨.”
“왜?”
“이거 역시 가문의 문양입니다.”
“그런데?”
에스티아가 가볍게 물었다가 웬트워스의 표정을 보고 덩달아 진지해졌다.
“왜, 어디 건데.”
“이거 그 가문의 문양입니다. 그…….”
웬트워스가 문양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스카 가문의 문양입니다.”
“오스카 가문?”
뭐야, 소설 속에 그런 인물도 있었어?
생소한 이름이었다.
“네, 라 빅터 오스카 후작이요.”
웬트워스가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전에 아가씨한테 청혼했던 분 말입니다.”
웬트워스의 눈이 어두워졌다. 에스티아의 눈이 사탕처럼 커졌다.
뭐야! 원작에 안 나온 내용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