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약초 관련 책을 펴고 몇 시간을 들여다보았지만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책 내용이 재미없어서는 아니었다. 다른 게 아니라 아까 산 초입에서 주운 펜던트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불길하지.’
아무리 소설 속이라고 해도 엄연히 하나의 세계이니 모르는 인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했다. 당연했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영애들만 해도 소설 속에서 이름 한 번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이 펜던트의 주인은 달랐다. 무려 에스티아에게 청혼했던 남자가 아닌가!
‘그런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고 진짜! 모든 내용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라고 해도 오스카 후작이 에스티아에게 청혼한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에스티아는 불안해졌다. 지난 몇 주 동안 세운 계획 중에 ‘오스카 후작’은 없었다.
하물며 번듯한 곳에서 마주친 곳도 아니다. 많고 많은 산 중에서 하필 그 산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절대 우연일 리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거기에 있었냐고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이 물건은 언젠가 돌려주기는 해야겠지…….
할 게 많았다. 공작하고 쌓인 감정도 청산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주인공 메르헨에게도 잘 보여야 한다. 거기에다 이 펜던트도 돌려줘야 했다. 어떻게든 그들에게 마음이 없음을 증명해야만 했다. 대공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그를 속이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 하지만 아버지한테서도 벗어나야 하는데.’
에스티아는 메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로셸이 절대 순순히 에스티아를 놔줄 리 없을 거 같다고 했던 말. 사실 지금은 그가 자리를 비워서 계획대로 할 수 있는 거지 만약 그가 저택에 있었다면 결코 쉽지 않았으리라.
아버지임에도 에스티아는 그만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아, 이거 진짜 숨기라도 해야 해?
“아가씨.”
한참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메리가 노크를 하며 에스티아를 불렀다.
“들어와.”
메리는 한 손에 쟁반을 든 채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편지인 듯했다.
“이 늦은 시간에 웬 편지?”
“그게…… 저…….”
메리가 우물쭈물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괜찮아, 말해 봐.”
“편지가 왔는데…….”
“누구길래 그…….”
편지를 들던 에스티아의 손이 멈췄다. 발신인에 너무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에버하르트 바일’
올 게 왔구나.
“이 인간이…….”
“네?”
“아, 아니야. 아주 길기만 해 봐라.”
에스티아는 편지 칼로 편지를 뜯었다. 글씨가 빽빽하다 싶으면 바로 찢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편지는 길지 않았다. 그런데 그래서 도리어 더 열 받았다.
편지의 내용은,
‘저와 사과를 주고받기 전에 먼저 해 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아직 셰린포드 영애에게 사과를 안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일 오후 2시 셰린포드 저택에서 보죠.
영애에게 사과하는 걸 제 눈으로 봐야겠습니다.’
“와…… 진짜…….”
진짜 마음 같아서는 욕을 써서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미 제대로 증명하겠다고 제대로 통보하고 돌아왔기에 무르기에는 늦었다. 오히려 당신에게 마음이 없고, 당신들을 응원하겠다고 제대로 티낼 수 있는 기회였다. 물론 자신의 체면은 묵사발이 될 테지만.
하지만,
‘혹시라도 남주가 날 위협할 때 날 감싸 주는 주연 한 명이 필요하기도 해.’
게다가 그 밑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만약 오시지 않는다면 그때 약초 창고에서 하셨던 말은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에스티아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바에는.
제대로 해 주는 수밖에.
* * *
‘난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해 본 적이 있었나?’
에버하르트와 메르헨은 서로를 미치도록 사랑했다.
하지만 적어도 에버하르트가 메르헨을 그렇게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불안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쩌면 계획이 더 순탄했으리라.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남주는 여주를 미치도록, 정말 이 인간이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로 사랑한다. 당연히 약혼을 밀어붙이는 글레멘드 공작과 그에게 집착하는 에스티아를 없애고 싶은 건 당연하다.
‘아주 거미줄에 묶인 기분이네.’
일부러 귀족 사회에서 무시하는 -사실은 전혀 무시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일을 하면서 ‘약혼자로서’의 자격을 없애는 것까지는 오케이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가지다. 로셸이 정말 그녀를 놔줄 것인가, 그리고 에버하르트는 정말 그에게 마음이 없는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고 죽이지 않을 것인가.
‘일단 공략할 수 있는 상대부터 공략해야 해.’
메르헨, 유일하게 에스티아의 처형 청원에 반대한 인물. 자신을 죽이려 한 인물이지만 동정과 자비를 건넨 우리의 여주인공이었다. 게다가…….
-셰린포드 영애에게 영혼이라도 바치시든지요.
그래, 제대로 해 주지.
안 그래도 메르헨과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못할 것도 없었다.
에스티아는 벌떡 일어섰다. 아침도 안 먹고 생각에 골몰하던 에스티아를 바라보던 메리가 그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아가씨! 드디어 아침을 드실 생각이…….”
“메리!”
“네?”
기억대로라면 메르헨은 몸이 약해 복용하는 약초가 많다고 들었다. 그게 뭔지는 세세하게 몰라도 몸에 좋은 약초를 몇 가지 구해갈 순 있을 것이다.
“셰린포드 영애에게 줄 선물을 준비해야겠어. 이왕 사과하러 가는 김에 성의를 갖춰야지.”
“아가씨, 진짜 가실 생각이세요? 공작 전하께서 그런 편지를 보낸 건…….”
안다. 의도가 뻔하다.
원래 에스티아라면 가장 상처를 받을 상황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거 어쩌나. 지금 자신은 둘의 버진로드 앞에서 폭죽이라도 터트려 줄 판인데.
‘너 아주 잘 걸렸다.’
콧대 높은 남주의 코를 제대로 꺾어 줄 차례였다.
“나 밥 먹을래, 메리.”
“어휴! 잘 생각하셨어요! 아가씨! 바로 갖다 드릴게요!”
메리는 허겁지겁 방에서 나갔다.
전투를 앞두었으니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어야 했다.
그렇게 새삼 마음을 다잡으며 책상 끄트머리에 있는 펜던트가 눈에 들어왔다.
‘라 빅터 오스카’
지금 에스티아의 나이가 20살인데, 웬트워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약 2년여 전에 청혼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때 하필 대공 전하께서 보셔서 아가씨께서 더 힘들어하셨죠.
누가 로판 소설 아니랄까 봐.
‘아니, 근데 그게 또 소설에 나온 건 아니잖아!’
작가 뭐야, 정말.
에스티아는 혀를 찼다. 이 사회가 얼마나 꽉 막힌 사회인데. 다른 남자가 청혼하는 걸 봤다면 더욱 마음에 안 들었을 게 뻔하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청혼도 당연히 거절한 모양인데, 거절한 사람에게 찾아가는 것도 못 할 짓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사용인을 통해 보내는 것도 생각했다.
근데 이상하게 찜찜했다.
‘만약 일부러 내가 볼 수 있게 내 눈앞에 이 펜던트를 놓고 간 거라면?’
우연이라 믿고 싶었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우연이 아니라면.
에스티아는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 펜던트를 손에 들었다.
* * *
노란 장미가 피어난 화려한 정원이 창밖으로 펼쳐졌다. 에스티아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셰린포드 저택이 가까워지는 걸 알아챘다. 에스티아는 메리가 모르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각오를 하고 오긴 했지만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무려 남녀주인공을 만나는 자리인 데다가 어떻게 보면 ‘피의자’로 참석하는 꼴이었다. 무엇보다 비록 자신이 지금 에스티아에 빙의하긴 했지만 남의 잘못을 대신 사과하는 느낌도 들었다. 빙의한 지 겨우 3주 남짓했으니 그럴 만했다.
메리도 당연히 걱정했다. 9살 때부터 대공 전하를 따라다닌 아가씨가 오늘 어떤 꼴을 당할지 눈에 선했다. 메리는 속으로 기도했다.
마차가 멈춰 섰다. 셰린포드 저택의 집사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중후한 집사가 에스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에스티아는 손을 내밀고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하얀색과 노란색이 조화롭게 섞인 온화한 분위기의 저택이었다. 깔끔하고 우아했다. 컸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과연 여주인공의 저택다웠다.
에스티아는 숨을 가다듬으며 집사를 따라갔다. 뒤에서 메리가 총총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에스티아의 오감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저택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점점 주변이 뿌예졌다. 마음 같아서는 ‘알아서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내뱉고 나오고 싶었지만 에스티아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다. 처형당하는 건 당연히, 당연히 사양이다.
“아가씨. 대공 전하. 글레멘드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집사가 문을 열기 전 그들에게 고했다.
“들어오세요.”
수면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청량하고 맑은 목소리였다.
집사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 틈새로 보랏빛 머리를 한 여자가 보이고 옅은 은빛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에스티아는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둘이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걸.
서로를 향해 몸을 튼 자세에서, 다정함이 깃든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완전히 서로에게 스며들었다는걸.
“어서 와요, 글레멘드 영애.”
메르헨이 일어서며 에스티아에게 반갑게 미소 지었다.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어 고혹적으로 빛나는 여인이었다.
반면에 대공은 별다른 인사 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짧은 목례만 했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곧바로 메르헨에게로 향했다. 다정한 눈빛을 보니 그제야 원작에서 보던 남주 같았다. 여주에게 한없이 다정하고 온화하며, 끝없이 사랑을 쏟아붓는. 즉, 다른 사람에게는 냉정해도 내 여자에게는 다정한 바로 그런 남주.
그 속에서 서브 여주는 그저 장식이었을 뿐이다. 어쩌면 남주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중요하지 않았을 사람. 오히려 하루빨리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근데 어쩌지 그건 이제 나도 마찬가지일 거 같은데.’
이 남주야.
에스티아는 속으로 칼을 갈았다. 일단 지금은 조용히 칼날을 벼릴 때다. 에스티아는 메르헨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메르헨은 소설 읽을 때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던 것처럼 고고한 분위기가 흘렀다. 매혹적인 선의 눈과 코, 부드럽게 그려진 붉은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캔버스 위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에 빠질 만하네, 에스티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