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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8화 (9/141)

8화

“초대해 줘서 감사합니다, 셰린포드 영애.”

에스티아가 애써 대공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자 질세라 차가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제 시각에 오셨군요?”

비꼬는 투에 에스티아는 결국 고개를 돌려 대공을 노려보았다. 에버하르트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메르헨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영애,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앉으세요.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합니다. 따뜻하게 맞아 주셔서.”

에스티아는 최대한 선하게 보이도록 미소 지었다. 그러자 메르헨이 그 미소가 낯선 듯 어색하게 웃었다.

에스티아가 앉은 뒤 메르헨과 에스티아는 한동안 날씨나 사교계의 소식 등등 상투적인 대화들을 이어 갔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고 바랐지만 에스티아는 애써 티를 내지 않았다.

둘이 얘기하는 동안 대공은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그게 편하면서도 불편했다. 폭풍전야 같달까.

“전하한테서 들었어요. 저한테 할 얘기가 있으시다고요?”

메르헨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드디어 올 게 왔다. 에스티아를 힐끔 대공을 바라보았다. 대공의 표정은 서늘하고 고요했다. 에스티아는 시선을 돌려 메르헨의 눈을 바라보았다.

“셰린포드 영애.”

에스티아는 속으로 ‘할 수 있다’를 여러 번 외치고 말을 이었다.

“사과할게요, 죄송해요. 영애 앞에서 그런 결례를 보였던 거. 그리고 그전에도 영애한테 상처를 주고 불편하게 한 거요.”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고요하게 방 안을 울렸다. 메르헨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마 메르헨 입장에서는 순순히 사과한 것도 놀랄 일이지만 에버하르트에게 생떼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도 쇼킹할 것이다.

반면에 대공은 동요하지 않고 에스티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역시 전생의 사회생활 짬바가 어디 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에스티아는 소설 속 내용을 천천히 더듬어 갔다.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전 영애에게, 그리고 전하께 상처를 주기 위해 그런 말과 행동을 하였습니다. 저한테 큰 실망을 하신 걸로 알아요. 그래서 당분간 자중하고 사교계에 나서지 않을 생각입니다.”

“네? 그럴 수가…….”

메르헨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했다.

“자중이 아니라 다른 취미 생활을 즐기는 게 아니라요?”

에스티아의 예상과는 달리 메르헨의 옆자리에서 목소리가 날아왔다. 에스티아 입가가 살짝 떨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전하?”

“말 그대로입니다. 요즘 상단에 계속 출입하신다고 들었는데 그게 자중하시는 겁니까?”

대공이 다리를 꼰 채로 거만하게 말했다. 맘 같아서는 저 다리를 차 버리고 싶었다.

“오랜 시간 고민하여 내린 결정입니다. 다른 곳에서 활동을 하는 게 영애와 전하께 어떤 폐를 끼치는 것인지요?”

짙은 청색 눈동자와 옅은 녹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혔다.

“셰린포드 영애, 지금 제 사과가 못 미더우시리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제 사과가 진심이라는 건 앞으로 증명할게요.”

“글레멘드 영애…….”

메르헨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마 이런 모습의 에스티아는 처음 보았으리라.

“영애께서 괜찮으시다면 영애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 사교계에는 당분간 나서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애의 옆에서 영애의 힘이 되고 싶어요. 무엇보다 저는 이제 더는 대공 전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에스티아는 그 말을 하며 대공을 힐끔 바라보았다. 대공의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메르헨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왜…… 그렇게까지 마음이 바뀌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메르헨은 긴장한 듯 찻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맞잡았다.

“사실…… 저도 뚜렷하게 이유를 모르겠어요. 다만 더는…… 대가 없는 헌신은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대가 없는 헌신’. 그 부분에서 대공의 표정이 얼핏 변한 것도 같지만 에스티아는 눈치채지 못했다.

“믿기지 않으시리라는 걸 알아요. 영애께서도, 전하께서도 그렇겠지요. 그러니 더는 제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에스티아의 눈동자가 에버하르트 쪽으로 향했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과거의 에스티아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의 그녀는 이제 저 눈을 무서워하고 싶지 않았다.

“첫 시작으로, 건강에 좋은 몇 가지 약초를 들고 왔어요. 알레르기 사례가 거의 없는 약초로 가져왔으니까 한번 우려 드셔 보세요. 물론 그전에 맞는 약초인지 한번 확인해 보시고요.”

“제가 검사해 보겠습니다. 혹시 모르니까.”

대공이 메르헨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전하.”

메르헨의 눈가가 감동받은 듯 촉촉해졌다.

‘놀고 있네.’

에스티아는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메르헨에게 악감정은 없지만 저 대공은 진짜 꼴 보기도 싫었다.

“글레멘드 영애, 제대로 된 약초를 들고 온 게 맞겠지요?”

대공이 싸한 목소리로 에스티아에게 물었다. 누가 기죽을쏘냐. 에스티아는 에버하르트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대답했다.

“철저하게 검증하고 가져온 약초입니다. 혹시 문제가 생긴다면 저를 문책하셔도 좋습니다.”

에스티아의 단호한 태도에 대공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럼 두 분이서 시간 보내세요. 저는 이만 자리를 비키겠습니다.”

에스티아가 메르헨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르헨이 깜짝 놀라 에스티아를 따라 일어섰다.

“영애! 그러지 말고 같이 좀 더 이야기를 하다 가요.”

메르헨이 아쉽다는 듯이 두 손을 맞잡았다. 그걸 본 에스티아는 다짐했다. 대공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면 제대로 하겠다고.

“아닙니다, 영애. 몸이 많이 안 좋다고 들었어요. 제가 있으면 편하게 있지 못하시잖아요. 푹 쉬세요. 여름 감기가 제일 무서운 거 아시잖아요.”

에스티아가 고개를 저으며 장난스러운 투로 말하다가 손뼉을 짝 쳤다.

“아, 참! 깜빡한 게 있어요! 더 줄 게 있어요.”

에스티아는 핸드백을 열어 안을 뒤적거렸다. 큰 핸드백을 들고 와서 그런지 메르헨에게 주려고 가져온 물건이 눈에 보이질 않았다.

‘아, 어디 있지…….’

에스티아는 한 손으로 핸드백을 든 채로 안을 뒤졌다. 몸을 점점 더 숙여 안을 보려던 찰나, 손에서 핸드백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앗! 죄송해요!”

아씨,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에스티아가 허겁지겁 안의 물건을 주우려는데 옆으로 불쑥 큰 손이 튀어나왔다.

“?”

바닥에 무릎을 굽은 에스티아는 갑작스러운 그림자에 깜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대공이 얼어붙은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어떤 물건을 손에 든 채로 그 물건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오스카 후작의 펜던트였다.

에스티아는 빙의 후 바일 대공을 겨우 두 번 봤을 뿐이지만 지금 그의 표정이 자주 볼 수 있는 표정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금이 간 가면은 그의 감정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아…… 감사합니다. 전하.”

에스티아는 머뭇머뭇 에버하르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달라는 의미로 손바닥 위로 향했는데도 대공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에스티아가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메르헨에게 보내자 그녀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공작 전하, 왜 그러시는지요?”

메르헨이 하얀 손을 대공의 손목에 올렸다. 그런데도 대공은 반응이 없었다. 결국 에스티아가 다시 나섰다.

“전하, 제 것인데요. 주시겠습니까?”

에스티아가 공손한 태도로 다시 손을 뻗었다. 그제야 에버하르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 눈빛에 에스티아가 움찔했다. 칼날을 품은 눈빛이었다.

“이게 영애의 것이라고요?”

에스티아는 몸을 굳혔다. 어떻게든 원하는 대답을 듣겠다는 집요한 눈동자였다.

“정…… 정확히는 제 건 아니고 어떤 분한테 전해 드려야 하는 물건입니다. 주세요.”

에버하르트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 움직임에 따라 에스티아도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왜 들고 다니시는지 모르겠군요.”

대공이 글자를 짓이기는 듯이 말을 내뱉으며 에스티아에게 펜던트를 건넸다. 손끝에 닿은 손가락이 차가웠다.

“감사합니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말에는 답하지 않은 채로 펜던트를 가방에 넣었다. 그러고는 원래 꺼내려던 물건을 메르헨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셰린포드 영애, 향초에요. 잠을 잘 오게 한다고 해서 제가 자주 썼던 제품이에요. 영애한테도 좋을 거 같아서요.”

메르헨이 신가하다는 눈빛을 하며 향초를 받았다.

“고마워요, 글레멘드 영애. 정말 잘 쓸게요.”

메르헨의 미소가 햇살처럼 따스했다. 왜 이 남자가 그녀를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았다. 왜 미치도록 사랑하게 되는지도.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멀리 안 나오셔도 돼요. 푹 쉬세요, 영애.”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에스티아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꽤 아름다운 미소 지으려고 했음에도 에스티아는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꼈다. 결국 자신의 그 어떤 것도 그녀보다 나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뭐야, 벌써 에스티아에 동화되기라도 한 건가.’

에스티아는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려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전 정말 가 볼게요. 그럼…….”

“대신 제가 배웅을 해 드리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대공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전하께서요?”

메르헨이 두 손을 모으고 에버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예, 글레멘드 영애를 혼자 보내시면 마음이 안 좋으실 거 아닙니까. 그렇다고 영애께서 찬 바람을 맞으실 수는 없으니 제가 배웅해 드리고 오겠습니다.”

에스티아한테 말할 때와는 달리 다정하고 자상한 목소리였다.

‘찬 바람은 무슨 찬 바람이야. 여름인데.’

에스티아는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럼 가시죠, 글레멘드 영애.”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에스티아는 메르헨에게 목례를 하고는 에버하르트와 걸음을 옮겼다.

저택이 크고 웅장한 만큼 복도도 넓고 길었다. 게다가 집사는 그들보다 한참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즉, 거의 둘이서만 걷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에스티아는 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해도 들은 체도 안 할 거 같아 가만히 있었는데 예상과 달리 대공 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다.

“시작은 꽤 믿을 만하군요. 영애치고는 인내심을 꽤 발휘하시는 듯합니다.”

말본새 보소. 에스티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때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전하께 더는 마음이 없다는 걸 증명하겠다고요.”

에스티아가 꼿꼿하게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겨우 이걸로 제가 방심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앞으로 영애께서 증명해야 할 일은 많을 테니까. 정확히는 그간 일을 정말 반성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요.”

현실이었으면 한 대치고 보석금 내면 되는데 신분제 사회라서 그럴 수 없다는 게 한스러웠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정말…… 전하한테 더는 미련이 없습니다. 인연을 끝내고 싶어요.”

화가 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격한 말이 나왔다. 에스티아는 저 말에 움찔했지만 애써 무표정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 그러시군요.”

누가 들어도 믿지 않는 투였다.

“안 그러면 제가 왜 사과하러 왔겠어요. 영애와 둘이 있을 상황이 못 미더워서 오신 걸 알면서도 말이에요.”

“다행히 눈치는 안 변하셨군요.”

세계관을 막론하고 지위가 세면 말을 함부로 하는 건 어느 세계나 똑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제가 말했죠?”

“…….”

“영애께서는 단 한 단어 빼고는 다 거짓말뿐이었다고. 이런 식으로 말하고 모 귀족 영애를 때리고 헛소문을 퍼뜨린 적이 한두 번입니까?”

“그러니까.”

에스티아가 걸음을 멈췄다. 대공이 덩달아 우뚝 멈춰 섰다.

“앞으로 지켜보시라고요.”

사실인지, 아닌지.

날을 품은 청색 눈빛이 대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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