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전생에서는 가난했다. 부모님은 어디서 뭘 하는지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사회에서는 돈, 빽 없다고 무시당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한 후에는 학벌과 배경이 별로라고 무시당했다. 외로웠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다르다. 공작가의 영애일 뿐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녀를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왜 그녀의 가치를 몰라주는 사람한테 목을 매야 할까?
“믿지도 않으실 거면, 증명은 왜 하라고 하시는 건가요?”
에스티아는 저도 모르게 비릿하게 미소 지으며 쏘아붙였다. 여유로웠던 대공의 표정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닌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 차라리 제가 사라져 주면, 그러면 믿으실 건가요?”
“하.”
대공은 기가 막히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영애가요? 사라진다고요?”
대공이 깔끔하게 넘긴 머리를 새삼 쓸어 넘겼다.
“그랬다 쳐도 로셸 공작을 핑계로 다시 돌아올 거 아니신가요?”
아.
에스티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 보니 넘어야 할 산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 네, 알겠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럼 믿지 마세요. 제가 믿게 만들어 드릴 테니까.”
너만 바라보는 호구는 이제 없다는 걸 반드시 증명해 보이마.
“그러고 보니 그런 말씀을 하셨죠?”
에스티아는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대공이 그녀의 움직임을 지그시 지켜보았다.
에스티아는 대공의 바로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하지 않는데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전하께 더 이상 헌신하기 싫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메르헨 셰린포드에게 영혼을 바치라고.”
대공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래서요?”
“그래서.”
에스티아가 그의 말을 따라 하며 덧붙였다.
“바치겠다고요, 영혼. 더는 전하 때문에 수치 당하지 않기 위해.”
“…….”
대공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곰곰이 곱씹는 듯했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니 말씀만 하세요. 다음엔 제가 뭘 해야 믿으시겠어요? 제가 뭘 할까요?”
태도가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몸은 평등 사회의 맛을 보고 온 사람이었다.
“짝사랑은 이제 지긋지긋하다는 걸, 저는 저를 사랑해 주는 남자를 찾고 있다는 걸 앞으로 제대로 보여 드릴게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다른 곳을 바라보며 표정 관리하던 대공이 고개를 홱 돌렸다.
뭐긴 뭐야! 디 엔드라고!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끝’이라는 말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그를 진정으로 납득시킨 다음에 할 것이다. 시원하게.
대공의 얼굴이 가까워졌지만 에스티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이어진 대공의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그것도 증명의 일환이었습니까?”
“그거라뇨?”
“펜던트 말입니다.”
응? 펜던트?
갑작스러운 펜던트 언급에 에스티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게 뭔 소리야? 갑자기 웬 펜던트?’
에스티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반면에 대공은 어떻게든 해치우겠다는 맹렬한 눈빛이었다.
‘아니, 그니까 왜 그런 눈빛을 나한테 보내느냐고!’
“그러니까 일부러 떨어트렸냐고 묻는 건가요?”
다른 남자의 펜던트를?
“어디서 주운 겁니까?”
대공은 에스티아의 말에는 답하지 않고 쏘아 붙였다.
에스티아는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이긴 했지만 응접실 때와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더 진심이 깃든 목소리였다.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내심 당황했지만 에스티아는 매섭게 맞받아쳤다. 사실 솔직히 얘기하기도 애매했다.
“그게 말이에요, 제가 약초를 캐다가 돌아오는데 산 초입에 어떤 귀족분이 서 있지 않겠어요? 누군가 해서 가까이 다가가는데 이미 사라져 있더군요. 바닥에는 펜던트가 떨어져 있었고요! 문양을 보니 오스카 가문의 문양이더군요. 하필 저한테 청혼하신 분이 그걸 흘렸지 뭐예요!”
……라고 얘기하면, 믿어 줄 리가 없겠지. 주변 호위도 없이 그 남자가 혼자 거기에 서 있었다고 하면 안 믿을 게 뻔했다.
“그냥…… 어디서 마주쳤는데 떨어트리셨더라고요. 가져다 드리려고 챙겼…….”
“가져다준다고요?”
에스티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약간 격앙된 목소리였다. 미간도 약간 찌푸려져 있었다.
“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마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는 싫다는 그건 아니겠지? 그거면 당신 죽는다, 진짜.
에스티아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뱉을 뻔하다가 겨우 삼켰다.
“그럼 이만 갈까요?”
에스티아가 먼저 걸음을 옮기려다가 대공의 말에 붙잡혔다.
“지금 가시는 겁니까?”
묘하게 가시가 돋친 목소리였다. 에스티아는 도통 그의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오스카 후작가로요.”
에버하르트가 또박또박 말을 뱉으며 에스티아를 향해 가까이 다가왔다. 그 덕에 에스티아는 고개를 다시 빳빳이 들어야 했다.
‘왜 이래 진짜.’
역시 응접실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여유롭고 거만했던 대공은 사라지고 날카롭고 예민한 남자가 서 있었다.
에스티아는 그의 어깨 너머를 힐끔 바라보았다. 셰린포드가의 집사가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하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글레멘드 영애.”
에스티아가 다른 데로 정신을 쏟자 대공이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듯 그녀를 불렀다.
“오스카 후작가로 지금 가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에스티아는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도대체 무슨 답을 원하고 묻는 걸까? 오스카 후작이 그녀에게 청혼하는 걸 봤다고 했으니, 에스티아가 비굴하게 고개를 젓길 원하는 걸까?
근데 그거야말로 아직 마음이 있다는 걸로 보이지 않나.
그래서 에스티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가려고 합니다.”
“…….”
“빨리 드리고 싶어서요.”
“…….”
“어차피 미룰 필요도 없고요.”
“…….”
아씨 진짜! 어쩌라고! 마음 같아서는 그냥 뛰쳐나가고 싶었다.
표정도 뭐가 잔뜩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 가겠다고 대답하는 것도 이상하니, 거리라도 둘 겸 이렇게 하는 게 맞다고 에스티아는 판단했다.
“그럼 이제 진짜 갈까요?”
에스티아는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그런데 이대로 상황이 끝날 거라는 에스티아의 예상과는 달리 대공은 그녀가 물러간 만큼 다시 다가왔다.
‘이거 진짜 나 갖기는 싫지만 남한테 주기 싫은 그거 맞는 거야? 정말?’
이게 남주라니. 순간 에스티아도, 메르헨도 불쌍해졌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번뜩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
에스티아는 일부러 능청스럽게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그분한테 소중한 물건이거든요.”
물론 소설 속에는 그런 내용이 티끌도 나오지 않는다. 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니 소중한 물건이겠거니 한 것뿐. 애초에 소설에는 ‘라 빅터 오스카’라는 인물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찾았으니 갖다 드리고 싶다고 편지를 보내니 찾고 있었는데 감사하다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직접, 저택에 가서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대공의 표정은 말 그대로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에스티아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괜찮으신 분이죠. 온화하신 분이시고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름도 몰랐던 인물이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일부러 대공을 도발하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이 펜던트가…… 저한테 또 다른 길을 제안할지도요. 즉…….”
에스티아는 오른손으로 펜던트를 꼭 쥐며 눈을 들어 보았다. 대공의 눈이 날카로운 가시를 담고 있었다.
“전하를 의식하여 펜던트를 떨어트렸다? 터무니없는 얘기라는 거죠. 오스카 후작님께 실례만 되지 않는다면 대문짝만 하게, 온 세상에 알리며 갔을 겁니다.”
대공의 시선이 그녀의 손 안에 있는 펜던트에 닿았다. 이제야 슬슬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후작이 그녀에게 청혼하는 것까지 봤다고 했으니 어쩌면 이거 꽤 먹히는 패일지도.
에스티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펜던트를 가방에 넣으려 했다.
그때 대공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탁 붙잡았다. 서늘했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섭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대해 보죠. 어떻게 그 지긋지긋한 마음에서 벗어나실지.”
손의 힘이 세서 손목이 아릴 정도였다. 아팠지만 에스티아는 꾹 참고 대답했다.
“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주 제대로 모시겠다 이거야.
에스티아는 그의 손에서 손을 탁 빼고는 그가 뭐라 하기 전에 걸음을 옮겼다.
대공이 따라오는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이상하게 아까 응접실에 있을 때보다 긴장되었다. 일부러 대공은 천천히 걷고 있었다. 마치 뒤에서 그녀를 일부러 지켜보려는 것처럼.
마차가 도착했다. 오스카 저택에서 보내 준 마차라 마차에는 오스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얼떨결에 증거를 제출한 기분이었다. 에스티아는 애써 웃음을 감추며 걸음을 옮겼다.
“글레멘드 영애.”
뒤에서 대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에스티아가 살짝 고개만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햇빛이 둘 사이로 눈부시게 빛을 쏟아 내고 있었다. 그래서 에스티아는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그의 얼굴이 묘하게 초조해 보였다는 건 그녀의 착각일 것이다.
“……아닙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네, 전하께서도 영애와 좋은 시간 보내세요.”
에스티아는 바로 등을 돌려 마차에 탔다. 눈이 편해지자 좀 살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차가 움직였다. 그제야 에스티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스티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대공은 이미 등을 돌려 저택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에스티아는 고개를 돌려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 덕에 대공이 들어가려다 말고 마차를 돌아본 건 보지 못했다.
* * *
메르헨은 에스티아가 선물하고 간 향초와 약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에버하르트가 나간 지 어언 10분이 흘렀다. 아무리 저택이 넓다 해도 마중 나가기까지 5분도 걸리지 않는다. 물론 다른 귀족들이었다면 배웅 나가면서도 미주알고주알 말을 주고받았겠지만 에버하르트는 에스티아를 경멸하니 그럴 일은 없었다.
15분.
메르헨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5분이 더 지났다. 에버하르트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메르헨 아가씨, 이 물건들 다 치울까요?”
하녀가 그녀 곁에 쭈뼛쭈뼛 다가오며 조심스레 물었다. 메르헨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직. 대공 전하께서 오시지 않았잖아.”
바로 치우면 어떻게 보이겠어. 메르헨은 애써 뒷말은 삼켜냈다.
그때 문이 열렸다. 메르헨은 역시 말을 아끼길 잘했다고 마음을 쓸어내렸다.
“오셨어요, 전하? 전 글레멘드 영애가 준 선물을 보고 있었어요. 너무 감동이에요.”
메르헨은 에버하르트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의 눈동자는 그녀를 향해 있는데 그녀를 보고 있는 거 같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메르헨은 애써 미소 지었다. 입가가 떨렸지만 다행히 그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에버하르트?”
메르헨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에버하르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아, 미안해요. 선물이 마음에 들다니 다행이네요.”
에버하르트가 미소 지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그 미소였다.
“맞아요. 너무 좋아요.”
이 미소를 에스티아는 못 봐서.
메르헨은 이번에도 쓰디쓴 뒷말을 삼켜냈다.